[뉴스레터 15호][칼럼]선거 전야, 황정민 단상(손희정)

경향신문 기고문

 

선거 전야, 황정민 단상

 

손희정 (문화평론가)

 

 

노당당 하윤정 후보는 “아재정치 out”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가 과소대표되고 주류 남성이 과대대표되는 정치 현실을 ‘아재정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비례대표 의석이 54석에서 47석으로 7석이나 감소하면서 여성, 장애인, 이주민, 청년 등 정치적 소수자들이 대표성을 얻을 수 있는 비율은 더욱 줄었으니, 20대 국회에서도 이런 상황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물론 아재정치는 여성을 통해서도 계속된다. “여성이 너무 똑똑한 척 하면 밉상”이라던 김을동이나 한기총에 찾아가 “차별금지법, 동성애법, 인권관련법, 이거 저희 다 반대한다”고 말한 박영선, 논문 표절 의혹에 변명이랍시고 ‘지방대 출신 제자’ 운운한 더민주 비례대표 1번 박경미 등을 떠올려보라. 그런 의미에서 아재정치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구태정치의 다른 말이다. 혹은 대통령은 어떤가. 기실 아재정치의 정수에는 대통령이 있다. 한국 아재정치의 본질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아버지 정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정치가 계속되는 이유는 최근 한국영화 관객을 사로잡고 있는 ‘아버지 형상’에서 읽어볼 수 있다. 아버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부성멜로드라마의 인기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그 형상을 통해 ‘컴백’하고 있는 정치적 무의식은 주목해 볼만하다. 예컨대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명량>에서 이순신(최민식)은 한 나라의 장군이자 구국 영웅이면서 명백하게 아버지로 그려진다. 아버지의 ‘신의 한 수’를 이해하려고 발버둥치는 아들 이회(권율)가 영화 속 화자이기 때문이다. ‘장군=영웅=아버지’. 어쩐지 익숙하다.

그렇다면 박스오피스 2위 작품인 <국제시장>의 아버지 덕수(황정민)는 또 어떨까? 배우 황정민의 작품목록 변천사는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황정민이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 한 번 못하는 밴드 드러머(와이키키 브라더스), 노숙자로 세상을 떠도는 동성애자(로드무비), 바람 피느라 아들을 지키지 못한 변호사(바람난 가족), 실연으로 음독하는 ‘농촌 총각’(너는 내 운명), 그리고 트라우마 때문에 어른이 되지 못한 보험 사정원(검은집) 등이 김대중 정권 말-노무현 정권 기에 그가 연기한 ‘주변부 남성’이었다.

2009년, 그는 돈이라면 뭐든 하는 속물 탐정(그림자 살인)으로 돌아온다. 공무를 ‘사업(社業/私業)’으로 보았던 CEO 대통령 집권기의 일이었다. 이어서 황정민은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서민을 연기한다(댄싱퀸). 그는 ‘민주투사 출신 인권변호사’ 타이틀을 통해 시장 후보가 되는데, 이는 전부 우연으로 얻어걸린 이미지다. 영화에서 민주화 운동의 가치는 농담거리가 되고, 그 농담은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정치 영웅으로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자원이 된다. 정치는 이미지이자 이야기일 뿐이라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영화는 강변한다. 안철수 열풍과 더불어 정치혐오가 대중적인 마음의 풍경이 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2014년. 그는 온갖 역경을 살아내고 기어이 이곳에 도착한 ‘아버지’(국제시장)가 되었다. 그 아버지는 그저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사 자체가 되어 아버지들이 이룩한 근대화의 영광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못난 자식들’에게 아득함과 죄의식을 함께 떠넘긴다. 대중은 황정민이 어정쩡한 아들에서 역사 그 자체인 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지난 15년 간 꾸준히 지켜봐 온 셈이다.

황정민이 영화배우로 성장한 시기는 아버지와는 다른 가치를 가진 아들들의 정치가 펼쳐진 때와 겹쳐진다. 노무현은 탈권위의 정치를, 이명박은 탈대의의 정치를 선보였다. 그러나 그 정치는 결국 실패했고, 현실 정치에서의 세대교체 역시 미완의 과제로 남겨졌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탓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환상 속에 놓인 1인 남성 영웅의 정치서사는 필연적으로 실패를 노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바로 그 남성 영웅’이 트라우마 혹은 향수로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는 그 아버지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력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퇴행의 시대가 도래했다. 황정민이 그려내고 있는 노쇄한 영웅은 강력한 아버지의 거울상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지 못한 나이든 아들들은 ‘아재’라는 이름으로 구태를 반복한다.

우리 시대의 정치혐오의 바탕에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아재정치’가 있다. 필리버스터를 둘러쌌던 열광은 이것이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이기 이전에 특정한 정치, 즉 아재들의 구태정치에 대한 혐오임을 보여준다. 필리버스터 참여 의원 38명 중 17명이 여성이었다는 것, 김광진, 은수미 같은 정치인들이 특히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치가 스스로 정치임을 증명할 때에야 비로소 국민은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 총선 투표율은 떨어지는 반면 지방선거 투표율은 조금씩 오르고 있다는 점 역시 이의 방증일 터다. 이번 선거에서는 녹색당이나 노동당처럼 새로운 정치의 시도하는 정당들이 국회에 입성하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 글은 카테고리: 알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댓글은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