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5호][칼럼]‘예의바른 관계’의 지옥(최철웅)

경희대원 기고문

 

‘예의바른 관계’의 지옥

 

 

최철웅(카톨릭대 강사)

 

 

일본 츠쿠바대학에서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도이 다카요시 교수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관계맺음 형태를 ‘친절한 관계’라고 묘사한다. 그가 말하는 친절함은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고 배려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적극적인 관계맺음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까봐, 나아가 자신이 상처를 받을까봐 두려워 서로 주의 깊게 처신하는 데서 오는 친절함을 일컫는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인간관계를 추구하고, 상호간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들지 않으며, 조심스레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 말과 행동을 가린다. 그리하여 친절한 이들이 모인 공간에는 살얼음을 밟듯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상호간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형성된 ‘분위기’가 그 장소의 인간관계를 좌우한다. 이 관계는 서로 선을 넘지 않는 ‘예의바른’ 관계인 동시에,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보는 숨 막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일본의 어느 중학생은 교실에서의 이런 관계를 두고 “지뢰밭 같은 교실”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도이 교수는 친절한 인간관계 유지의 중압감이 ‘친구지옥’을 만들고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 ‘이지메’ 현상이라고 본다. 일본 사회에서 이지메는 오랜 연원을 갖지만,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이지메는 ‘피해자의 불특정성’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과거처럼 신체적, 문화적 차이를 지닌 약자를 차별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위기’를 깨는 누구나 이지메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우등생도 이지메 대상이 되고, 심지어 이지메의 가해자였던 학생이 다음번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즉, 오늘날의 이지메는 특정한 가해 학생들의 일탈이나 비행이 아니라, 대립을 회피하고 서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친절한 관계’ 자체가 만들어낸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친절한 관계 속에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타인의 행동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금 이 집단에서 버림받으면 끝장이다’라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한다. 대립이나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생각 차나 대립이 발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 대립점을 숨기고 상호 관심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생기는데, 이때 집단 내에 잠복된 대립의 불씨를 해소하는 방식이 바로 ‘이지메’라는 것이다.

 

‘개취존’ 시대의 예의바른 관계

 

도이 교수의 진단은 일본의 젊은 세대의 인간관계 양상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내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다른 수강생은 물론 교강사와도 깍듯하게 예의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가급적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전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애매하게 표현하기 일쑤며, 토론 시간에도 상대방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이견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게 좋은 것 같아요”나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등으로 단정적 표현을 회피하며,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네, 그런 것 같네요”라며 무의미한 동의를 표시한다. 사실상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놓이며, 상대와의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내심 아무런 의견을 표명하고 싶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발언기회가 주어지면 빼지 않고 나름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다. 묵묵부답의 상태로 괜히 분위기를 냉담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의 의아스런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싫기 때문이다.

이들 예의바른 청년들의 거리두기는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신중함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나름 존중할 만한 태도이다. 우리는 친근감을 표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영역에 불쑥 침범하거나, 큰 관심도 없으면서 사사건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들로 인해 충분히 고통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의 예의바름은 확고한 자기존중감에 기초하여 타인의 존재를 기꺼이 환대하는 태도라기보다 이질적인 타자와의 얽힘을 회피하는 냉담함에 가깝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경험을 수반하며, 그 과정을 통해 개인은 타자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그러나 ‘예의바른 관계’는 이질적인 타자와의 교류를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그러한 주체성의 변용을 건너뛰고자 한다. 그 결과 타자성을 끌어안지 못한 주체의 내면에는 오직 ‘나는 나’라는 동어반복적인 자기승인과 본인의 ‘감정’에 대한 확신만이 남는다. 타자성을 언어를 경유해 상징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감정만이 가장 순수하고 확실한 판단의 근거로 격상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언가에 “빡쳤다”거나 “극혐”이라고 선언해버리고, 내키지 않는 무엇에든 그저 “불편하다.”고 내뱉는다. 논리적인 해명은 불필요하며, 내가 불편했거나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절대적 기준이 된다. 이른바 ‘개인취향존중’의 시대에 감정/취향은 자아의 가장 순수한 부분으로 간주되며, 각자는 감정/취향을 지닌 존재로서 동등하다고 선언된다.

‘예의바른 관계’는 모든 참가자가 그러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몰입함으로써 유지된다. 왕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발설함으로써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따라서 청년들의 커뮤니티에서 가장 기피되는 인간은 ‘눈치 없는 자’이다. 분위기에 편승해 함께 열광해야 할 때 혼자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 예컨대 대학가의 운동권은 구성원들을 ‘분열’시킨다는 점에서 비난받으며, 사태의 잘잘못을 따지는 이들은 ‘선비질’한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구성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행사의 내용이나 가치가 아니라, ‘예의바른 관계’라는 형식 자체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동조하는 이유는 자기긍정감의 원천이 되는 타자의 인정을 바로 이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의바른 관계로 맺어진 커뮤니티는 사회적 위계 없이 모두가 n분의 1의 구성원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평등한 공동체이기도 하다. 거기서 각자는 자신의 감정과 취향을 전시하면서, 적당한 거리의 타자들에게서 상처 없는 안전한 인정을 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내부의 위계를 조장할 우려가 있는 ‘친목질’을 금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들은 평등하게 인정을 교환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거리감 있는 얕은 관계를 유지한다.

 

혐오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

 

‘예의바른 관계’를 맺은 청년들은 서로 미묘한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타인과의 섬세한 커뮤니케이션에 강박적으로 몰입한다. 그러나 사상이나 가치를 공유한다거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관계가 아니기에 당시의 상황이나 기분에 쉽게 좌우되고, 그리하여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관계이다. 더욱이 대립을 회피하는 것을 최우선시 하므로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분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없다. 그에 따라 분위기를 거스르는 ‘눈치 없는 자’들이나 외부의 타자에게 응어리진 분노의 감정이 표출되고, 나아가 그것이 내부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편이 되곤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학 새내기에 대한 가혹행위는 냉담한 인간관계 내부의 분노를 표출하는 ‘이지메’의 한 사례가 아닐까. 아마 기존 구성원들은 순수한 가학의 쾌락에 탐닉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례의 일부였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선후배의 역할 관계나 공동체적 유대감이 사라진 대학가에서 ‘예의바른 관계’의 거리감을 깨뜨리기 위해 신규 참여자들을 모욕함으로써 강제로 위계적 구도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이건 좀 불편하네요.”라며 분위기를 깨버릴 것이기에.

청년들이 협소한 인간관계 내에서 피곤하리만치 강박적으로 예의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자기표현과 자기긍정의 계기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방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적 역할이나 공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청년들은 자기긍정감의 원천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없으며, 내 존재를 고통스럽게 뒤흔들 이질적인 타자성의 개입에 취약하다. 과거 오르막 시대의 청년들이 진보의 감각과 결부된 자기변용의 가치를 적극 받아들였다면, 내리막 시대의 청년들은 현재의 순수한 나를 보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타자성은 자기변용의 계기가 아니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확고한 정박점 없이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의존하는 자아는 곧잘 ‘멘붕’하고 만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우나 심리적으로는 멀기만 한 ‘예의바른 관계’가 쌓여갈수록,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과 강박적인 자기애만 강화된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일거에 ‘리셋’하거나 자아의 요새 속으로 도피하려는 충동에 곧잘 사로잡힌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일단은 타자성과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순수한 자아라는 허상을 깨뜨리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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