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7호][칼럼] ‘다시 만난 세계’(손희정)

[경향신문 기고문]

[청춘직설] ‘다시 만난 세계’

손희정 (문화평론가)

지난 7월31일, 대학 내에 경찰병력 1600명이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학교의 독단적인 행정처리에 반대하면서 학교 측과 대치하고 있던 이화여대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교수는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4년 있다 졸업하는데?”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요즘 대학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스펙의 전당’에서 더 이상 학생들은 주체가 아니다. 그저 스펙을 구매하는 소비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잊은 대학이 학생을 일개 소비자로 취급한다 하더라도 학생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고 있는 ‘미래라이프’ 사업은 교육부가 진행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의 일환이다. 이화여대는 사업에 선정돼 정부로부터 35억원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름만 아름다운 이 사업은 지난 20여년간 지속된 대학 신자유주의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정부의 대학정책은 고등교육이 공공재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리하여 ‘자유화’란 이름으로 대학은 기업화되었고, ‘자율화’란 명분으로 무한경쟁의 방법론이 도입됐다. 그 최전선에 정부에 의한 ‘대학 평가’와 ‘구조개혁’이 놓여 있다. 인구감소로 고등교육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자 정부는 정원감축 및 지원금을 빌미로 대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이에 발맞춰 학교 구성원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파행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는 학문과 고등교육의 의미 자체를 시장주의로 재구성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학 측의 소통단절은 필수요소가 된다. 지금 이화여대가 겪고 있는 진통 역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최경희 총장의 불통과 독단으로부터 기인했다는 평가다. 이 흐름을 이끌었던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은 “취업이 학문보다 우선하며, 취업을 중심으로 대학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밝힌 바 있다. 정부에 의한 대학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대학의 등장은 한편으로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전락시켰다. 학부제와 상대평가는 학생자치를 무너뜨리는 기반이 되었고, ‘산학협동’이라는 이름 아래 지식과 사유는 시장의 부속물로 통합되었다. 비정규직 강사뿐 아니라 정규직 교수들의 ‘노동조건’ 역시 열악해졌으며, 이제 학위는 자격증에 불과하다.
‘미래라이프’ 단과대학에는 ‘뉴미디어 산업’과 ‘웰니스 산업’ 등의 전공이 신설될 예정이라는데, 이런 분야가 학위를 요하는 학제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은 대학 사회 내에 팽배한 ‘시장정서’ 안에서야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다”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작이 어찌되었건 간에 학생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대학의 구조 자체에 저항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학생들의 싸움을 ‘학벌 이기주의’라고 낙인찍는 대학 측과 언론의 프레임은 교묘하다.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인 불편함에 즉각적으로 호소하고, ‘여학생들의 속물근성’을 돋보이게 하며, 진보진영으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지 역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에 출연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한 학생은 말한다.
“직장인이나 고졸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다만 특별한 단과대를 신설해 학위를 수여하는 것에 의문이 있을 뿐이다. 그보다 본교에 이미 있는 평생교육원의 질을 높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사업은 4년제 졸업장이 있어야만 경력을 이어갈 수 있고 승진할 수 있는 사회의 비합리적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고 학벌주의를 조장할 뿐이다.”
물론 학생들의 싸움이 ‘학벌 이기주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추동력을 얻는 것일 수 있다. 사회의 꼴이 이러한데, 학생들에게만 급진성을 요구할 순 없다. 그러나 이화여대의 싸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하는 운동은 일종의 ‘사건’이다. 저항은 질문이고,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며, 꿈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학생들은 ‘중심 없는 다중’으로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통하고 모든 사안을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새로운 운동주체로서 이미 자신들의 투쟁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 중에 ‘투쟁가’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떼창’한 것은 그래서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야말로 그들은 세계를 다시 만나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나는 세계는 이전과 같은 세계일 수 없다. 그 싸움이 어디로 가든, 존경의 마음을 담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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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7호][서평] 포스트잇 추모가 불러낸 ‘정동(情動)’

[문화비평] ‘문화과학’ 여름호 특집 ‘情動’

포스트잇 추모가 불러낸 ‘정동(情動)’

최익현 (교수신문 편집국장ㆍ문학 박사)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구절.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푸른 생명의 나무’를 놓고 해석이 서로 엇갈렸지만, 이건 차치하고 ‘모든 이론은 회색’이란 부분에 눈을 맞춰보자. 괴테는 어째서 ‘이론’을 잿빛 혹은 회색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경제학자인 류동민 충남대 교수는 오래 전 이렇게 썼다. “어쨌든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는 명제는 소박하게 말하자면 모든 이론은 절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시대적ㆍ사회적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론을 주장하는 이론가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류 교수의 지적처럼 이론이 회색인 것은 그것이 시대적ㆍ사회적 한계, 이론을 제출한 그 사람의 한계 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틈을 지닌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진보담론 휩쓰는 ‘정동’이라는 유령
근래 ‘정동(情動ㆍaffect)’이란 용어가 한국의 진보적 지식 담론 영역에서 자주 출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책도 발 빠르게 두 권 번역, 소개됐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ㆍ그레고리 시그워스 엮음, 갈무리 발행), ‘정동의 힘’(이토 마모루 지음, 갈무리 발행)이다. 권명아 동아대 교수가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갈무리 발행)을 통해 “정동(affect) 역시 여전히 번역어로서도 공통어를 갖지 못한 개념”이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3, 4년 만에 ‘정동 이론’은 확실히 빠른 속도로 연구자들의 관심을 흡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이론전문지 계간 ‘문화과학’이 이번 여름호에서 ‘정동과 이데올로기’를 특집으로 들고 나온 것은 문화연구 부문에서 ‘정동’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의 기괴한 작동 방식이나 그 내면까지 분석, 장차 도래할 미래의 가능성을 응시하려는 ‘이론적 갈증’에 목말라 있음을 보여주는 한 방증이 아닐까 싶다.
문학 연구에서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필요악이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 가장 많이 호명된 외국 이론가들이 루카치, 가라타니 고진, 발터 벤야민 등이었다는 한 연구자의 실증 보고는 ‘이론’의 의미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난무하는 수입 이론의 향연에 불과한가
도대체 연구자들은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이론에 목말라하는 것일까. 그것도 우리 현실로부터 출발해서 일반이론으로 나아가는 귀납이 아니라, 이론을 가져와 거기에 현실을 대입하는 연역을 말이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 난무하던 이론(가)의 향연에 불편한 감정을 오래도록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한 감정의 연장선에서 ‘정동’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문화과학’에 실린 ‘정동의 이론적 갈래들과 미적 기능에 대하여’(박현선)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동의 도래는 또한 이데올로기 논쟁의 전환 국면과 맞물려 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글로벌 정치 체제의 재편, 그리고 인지자본주의로의 이동 등 번성과 파국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에 더욱 복잡해진 권력의 작동 방식을 바라보는 담론적 성좌가 요청되고 정동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 글의 필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정동을 외래에서 온 것으로 보는 관점을 버려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하나의 전체 혹은 총체성으로 정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세월호ㆍ강남역ㆍ구의역이 불러낸 정동
여기서 두 가지가 눈에 띈다. ‘더욱 복잡해진 권력의 작동 방식을 바라보는 담론적 성좌’라는 ‘정동’의 이론적 성격, 그리고 이것이 외래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안에서 자라난 것일 수도 있다는 ‘정동’의 기원이다. 그렇기에 박현선은 “한국 근대의 역사와 정치적 주체의 형식을 닫힌 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이질적 공간과 시간의 지속, 감정의 요소들이 뒤섞여 드러난 것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정동의 연구가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촛불 시위가 보여준 정동적 힘, 세월호 침몰 이후 사회가 보여준 상실과 애도,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 사건과 구의역 비정규직 사망 사건에 대한 포스트잇 추모 등등. 기억의 정치적 정동과 이를 기억하는 미학적ㆍ정치적 기획 등이 연구 대상으로 확산될 수 있다.
물론 ‘문화과학’에는 이런 흐름에 대한 비판과 경계의 목소리도 있다. ”정동 이론’ 비판’(최원)은 ‘정동’을 새로운 미학적ㆍ정치적 기획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제시하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개인들의 상상에 개입해 들어오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최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회적 실천들(경제, 정치 따위)과 역사적으로 접합돼온 방식들에 대한 구체적 연구, 지금 그 접합이 해체되거나 새롭게 조직되는 방식들에 대한 구체적 연구, 그 속에서 드러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체제의 위기와 모순들에 대한 구체적 연구,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다양한 대중들의 실천 및 투쟁의 목표와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과제로 던져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단지 ‘정서’ 또는 ‘정동’에 대한 연구로 환원될 수 없다. ‘정서 이론’이 국지적 이론의 영역으로 재-위치된다는 조건 하에서,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다른 전제 위에서 재구성된다는 조건 하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정동’이 정치학과 미학, 문화 연구 등에서 더 깊이 확산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미결정의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정동’의 한계 아닌 한계는 역설적으로 더욱 더 연구자들을 사로잡을 지도 모른다. 현실의 문법과 맥락에서 이론의 유효성을 입증한다면 정동은 오래도록 연구자들과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동’이 일시 유행하고 마는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남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론에 대한 갈증은, 이론의 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텍스트를 읽어내고 다가올 미래를 읽어내려는, 이론의 외부를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이다.
(출처 http://www.hankookilbo.com/v/a4513e9d4bed4fae8fd5487c2893232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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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7호][학술자료] 서울형 문화권 선언을 위한 조사용역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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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정책포럼 문화담론 순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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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7호][칼럼] 사드, 포켓몬, 로컬 호러(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세상 읽기] 사드, 포켓몬, 로컬 호러

권명아 (동아대 국문과 교수)

 

정체불명의 악취가 해안을 따라 이동하고, 해운대 백사장에서 대규모 개미떼가, 바다에서는 거대한 갈치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지방에서는 대지진 전조에 대한 ‘괴담’이 날마다 업데이트 중이다. 몇 번의 지진을 겪으면서 정부나 지자체의 무대책에 경악한 부울경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정보를 수집한다. 대지진 괴담은 이런 현실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다. 아무 정보도, 대책도 없이 날아온 사드 배치에 대해 성주 주민들은 공포를 호소하며 저항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지배 엘리트에게 성주 주민들은 한갓 괴담에 시달리는 비합리적인 사람들로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지방 사람들이 실감하는 현실적인 공포를 한갓 비합리적인 괴담으로 재현하는 게 바로 ‘외부 세력’이다.
‘몽매한 지방 사람들’에게 혀를 차는 사람들이 온갖 ‘시골 괴담’에 입맛을 다시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좀비와 함께하는 부산행 열차나, 곡성과 온갖 ‘시골’의 괴담을 중계하는 로컬 호러가 사드와 함께 도래하는 이 동시대성은 흥미롭다. 로컬 호러 장르는 신냉전 질서 속에서 지방에 대한 통치가 재편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냉전시대 대표 장르인 007시리즈에서 ‘자유진영’의 적인 동유럽의 주민들은 기괴하고 비합리적인 ‘괴물’로 표상되었다. 진영 분할을 적대 기반으로 했던 냉전 체제와 달리 신냉전 체제에서 적대는 내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파리와 올랜도 테러를 거치면서 기존의 ‘외부’에 의한 테러와 국내 테러, 증오 정치의 관계가 긴급한 화두가 된 것은 이런 이유다. 국지전과 국내 테러와 증오 범죄는 신냉전 체제의 주요 특성이다. 적대가 국지화되면 지방은 점령, 착취, 고립의 악순환에 빠진다. ‘외부 세력’이라는 서사는 이런 신냉전과 국지전의 맥락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저항이 ‘외부 세력’에 의한 것이라는 서사에서 지방의 ‘저항’ 가능성은 삭제된다. 기괴하게 순박하고 ‘자업자득’의 맹목을 반복하는 ‘시골 주민’과 저항하는 외부 세력이라는 서사는 정치와 문화 전반에서 생산되는 로컬 호러가 공유하는 문법이다.
지방에 대한 탈정치화는 한국적 로컬 호러 장르로 생산·재생산된다. <국제시장>이나 <인천상륙작전>처럼 냉전 복고를 지방색과 결합한 서사 유형이 한국형 스릴러나 호러와 각축전을 벌인다. 로컬 호러에서 지방은 장소를 불문하고 비합리와 괴기로 넘쳐나는 오지로 재현된다. 이 전형성은 기괴하다. 소녀들은 모두 귀신들리거나 살해당하거나, 볼모 잡힌다. 주인공은 모두 소녀의 보호자이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시골’의 귀신이나 비합리와 싸운다. 로컬 호러에서 지방은 제국주의자들의 꿈의 장소였던 문명 바깥의 식민지를 똑 닮아 있다. 지방과 탈문명화된 자연과 소녀를 동일성으로 배치하는 방식은 제국주의적 인종주의 서사의 젠더 분할을 전형적으로 답습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의 포켓몬 고 소동은 냉전과 신냉전 사이의 지방의 장소성을 흥미롭게 연출했다. ‘냉전 방어막’은 글로벌 ‘몬스터’에 의해 침투되었다. 다른 한편 냉전 방어막과 글로벌 측량술로 포섭되지 않은 자리에서 우연한 ‘해방 공간’이 펼쳐지고, 그 해방 공간은 금세 관광 열기로 불태워졌다. 신냉전 시대 지방의 생기는 사드와 포켓몬과 로컬 호러의 중첩 속에서 증오와 쾌락과 저항의 회로를 오가며 중계되고 전송된다. 신냉전의 국제질서에 대한 불안은 로컬 호러에 등장하는 기괴한 시골 사람들에 대한 조롱으로 자리를 바꾼다. 이미지의 쾌락이 현실 정치의 공포를 잠식한다. 로컬 호러 장르로 전송되지 않는 거기에, 당신이 경험한 적 없는, 공포에 맞서 삶을 구하는 저항의 생명 신호는 두근두근 울려 퍼진다. 전송의 ‘외부’가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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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7호][칼럼] ‘미러링’과 소수자의 언어(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미러링’과 소수자의 언어

오혜진 (문화연구자)

 

‘영어 쓰는 나라에서 태어날걸!’ 외국 오면 흔히 하는 생각이다. 언어장벽에 막혀 내 세련된 교양을 과시할 수 없다니 서럽다. 물론 뜻밖의 순간도 있다. 내가 한국어를 말할 때, 이곳 사람들은 낯선 언어의 출현에 놀랄 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반도 안팎에서만 쓰이는 한국어의 효용이 발생하는 것은 이때다. 나만 이해하는 언어로 이곳 문물을 평할 권리가 내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맛없는 음식이나 인종차별에 대해 한국어로 불평할 때, 나는 알지 못할 말로 떠드는 ‘우리’를 생경하게 쳐다보는 이곳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 즐겼다. 지배언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소수언어가 갖는 해방감을 맘껏 누렸다.
허나 좀 우습다.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언어가 있다’는 데 안도하며, 한순간 내가 이 언어위계에 기입된 권력관계를 뒤집었다고 믿은 것은. 소수언어가 해방과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비주류 언어로 배치되는 구조에서만 가능하지 않은가. 식민지의 작가 염상섭이 가르쳐준 것도 바로 이 피지배자의 언어전략이 지닌 딜레마였다.
<만세전>에서 왜 단발하지 않느냐고 묻는 일본 유학생 이인화의 말에 갓장수는 답한다. “머리만 깎고 내지인 사람을 만나도 대답 하나 똑똑히 못하면 관청에 가서든지 순사를 만나서든지 더 귀찮은 때가 많지요. 이렇게 망건을 쓰고 있으면 ‘요보’라고 해서 좀 잘 못하는 게 있어도 웬만한 것은 용서를 해주니까. (…) 노형네들은 내지어나 능통하시지요?” 애초에 제국의 질서에서 배제된 ‘비국민’으로 분류되면 순간의 차별은 받을지언정 살기는 더 편하다는 것. 그런 면에서 갓장수의 조선어는 ‘굴종의 언어’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갓장수에게 갓을 쓰고 조선어를 고수하는 일은 일본인의 개입을 허락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그렇게라도 식민자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피식민자들만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것. 실제로 제국 일본은 조선의 항거나 봉기를 자주 ‘소요’라 불렀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민족의 말이기 때문에 시끄럽고’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국문학자 이혜령은 이를 지배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고수하는 일이 피지배자에게 유일한 방패막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했다.
티셔츠 한 장을 계기로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또 화제다. 성평등은 지지하지만 메갈리아에는 동조할 수 없단 게 진보진영의 ‘최선’인 듯하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혐오의 언어이므로 ‘일베’의 언어와 같으며, 그래서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없단다.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를 소환해 폭력을 일삼는 일베의 혐오와, 거울을 들어 그것의 폭력성을 보여주려는 메갈리아의 전략을 동궤에 놓을 수 있다니 놀랍다. 소수자의 언어전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 소수자가 싸우는 대상의 혐의를 소수자에게 되씌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행해지는 무언의 폭력 아닌가.
물론 식민지 조선인들의 언어전략과 ‘미러링’의 메커니즘은 같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험에 드는 것은 늘 소수자의 언어라는 점이다. 소수자의 언어는 언제든 혐오의 언어라서, 굴종의 언어라서, 쾌락의 언어라서 ‘진정한’ 저항의 반열에서 탈락한다. 그러나 저항의 자원과 양식을 선별하는 것은 누구인가. 메갈리아는 ‘남성’이 아니라, 소수자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무지, 그 무지의 자격과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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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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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6호] 계간 <문화/과학> 86호 발간 독평회

 

계간 <문화/과학> 86호 발간 독평회

‘정동과 이데올로기’를 말하다

 

일시: 2016년 7월 6일 오후 7시-9시30분

장소: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한강진역)

(전화: 02-797-3139)

주최: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프로그램

 

발제자

◾ 정동과 이데올로기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계간 <문화/과학> 편집인)

◾ 정동의 이론적 갈래들과 미적 기능에 대하여

박현선(연세대학교 BK사업단 튜터교수)

◾ ‘정동이론’ 비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의 쟁점을 중심으로

최원(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토론자

◾ 권명아(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상운(도서출판 난장 기획위원)

◾ 정정훈(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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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6호] 문화과학 86호 신간안내

보도자료

 

수신: 문화부 학술/출판 담당기자

발신: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문화연대

(연락처: 편집인 이동연 010-8307-0464 sangyeun65@naver.com)

제목: 계간 『문화/과학』 86호(정동과 이데올로기) 발간 보도요청

● 86호 특집으로 여성혐오, 보복운전, 분노조절장애 등 감정과 정서, 심리 관련 사회문제의 급증을 계기로 사회문제 및 문화지형에 대한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한 <정동과 이데올로기> 기획!

● 정동의 시대를 맞아 정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정동의 이론적 갈래와 미적 기능, 정동이론과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접점, 현 시기 사회운동 위기에 대한 정동이론의 진단과 대안, ‘노오력’이라는 자기 감내의 정서가 만연한 청년문화 등을 다룬 5편의 글 수록!

● <기획 1>란에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바라보는 한 사진작가의 시선을 통해 여전히 기억해야 할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를 연작사진 형식으로 수록!

● <기획 2>란에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 일베 내에 존재하는 다층적 주체와 정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비롯한 우파의 역사전쟁에 나타난 우익의 심리 구조를 다룬 3편의 글 수록!

● 문화현실분석에 드라마 <태양의 후예>, ‘먹방’과 ‘쿡방’의 차이, 대중문화현상으로서의 알파고 신드롬, 필리버스터의 문화정치, 종로 3가 노인들의 하위문화적 실천 등을 분석한 문화비평글 수록!

● 제15회 북클럽으로 신지영의 <마이너리티 코뮌: 동아시아 이방인이 듣고 쓰는 마을의 시공간> 토론 내용 수록!

● <근대성 연구>는 ‘근대 철도의 또 다른 얼굴; 사고, 재난과 민중 통제’ 수록!

● 이론의 재구성에 알튀세르를 구조주의자로 보는 기존 입장을 비판하면서 여전히 우리 시대와의 조우 가능한 인물임을 다룬 제이슨 바커 글 편 수록!

특집 주제 <정동과 이데올로기> 소개

 

최근 피부로 전해지는 감각과 마음으로 느끼는 정서, 머리로 인식되는 심리가 우리의 삶을 해석하고 진단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집단 공포와 우울, ‘김치녀’와 ‘한남충’의 성대결, 다종다양한 돌봄산업의 성장, 대한항공 회항과 라면 사태에서 목격된 왜곡된 갑을관계, 언어폭력과 성추행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감정노동자들, 승객의 안전을 뒤로한 채 벌이는 운전자의 보복운전 등은 사회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

이로부터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정동’(情動, Affect)은 현실사회와 문화정세를 읽는 새로운 개념이자 분석틀로 제시되고 있다. 정동이란 주체나 객체에 속하지도 않으면서 주체와 객체 사이를 매개하는 공간에도 머물지 않는 비인격적 강도로서, 독립되어 있거나 자율성을 가진 실체라기보다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의 뒤범벅, 세계를 향한 신체들의 펼침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무언가 정동된다는 것은 정동을 불러일으킨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는 신체가 대상을 향하는 방식 속에서 표현된다. 가령, 행복, 즐거움, 열정, 불안, 분노, 달달함, 씁쓸함 등은 우리의 신체 지평 안에 자리 잡는데, 우리는 이러한 정동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 알게 된다.

정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정동 관련 정서와 심리의 목록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하위의 부분영역이 아닌, 사회를 만드는 일정한 방식으로서의 삶의 태도 혹은 생활양식을 만들기 때문에 생겨났다. 즉, 정동은 관습과 제도들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이면서 공통된 의미와 활동을 주고받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에 촉발되는 능력을 키워낼 새로운 형태의 문화정치 구상이 가능해진다. 이는 곧 정동의 문화정치라 말할 수 있는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정동이 권력의 이데올로기 작용의 이차적 효과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생체권력 같은 현대사회의 권력 형태들은 정동의 힘을 저지하거나 지시하는 게 아니라, 정동의 힘과 결합하여 작용하면서 신체가 구성체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물질적ㆍ정동적 과정을 강화하고 복수화한다.

『문화/과학』은 ‘정동과 이데올로기’라는 특집을 통해 최근 지적 트렌드로 부각된 ‘정동’ 개념과 이론을 검토함과 동시에 문화연구와의 접목을 고민하고자 한다. 정동 이론가들이 밝히고 있듯이, 정동 개념은 어떤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구성적 특성을 갖고 있어서 이론적 검토가 쉽지 않다. 즉, 저마다 정동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늘 다른 방식으로 정동을 논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둔다. 빠르고 명확하게 정동 지식을 얻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여간 고약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번 특집이 정동이라는 미지의 정글을 탐험하려는 독자들에게 일말의 지침서가 되었으면 한다.

 

<목 차>

 

특집: 정동과 이데올로기

정동과 이데올로기 —————————————————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정동의 이론적 갈래들과 미적 기능에 대하여—————————— 박현선(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동이론’ 비판; 알튀세르의 이데올롤기론과의 쟁점을 중심으로————– 최원(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마주침의 외면, 부대낌의 거북함-왜 운동은 위기를 반복할까?—————-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헬조선의 N포 세대와 노력의 정의론———————————— 정정훈(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기획 1: 세월호 2주기 참사와 노순택의 시선

참사 이후의 참사는 누구의 책임인가———————————— 노순택(사진작가)

 

기획 2: 우익의 심리 구조

박근혜 화법, Listen Carefully—————————————- 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우리’는 어떻게 ‘일베’가 됐는가————————————— 이길호(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수료)

한국 우파의 역사 전쟁에 나타난 인정욕망과 콤플렉스————- 김성일(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문화과학 제15회 북클럽

신지영 『마이너리티 코뮌: 동아시아 이방인이 듣고 쓰는 마을의 시공간』(갈무리, 2016)

패널: 이광석(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박소현(『문화/과학』 편집위원)

 

서평

『정동이론』(멜리사 그레그 외, 갈무리, 2016)ㆍ『정동의 힘』(이토 마모루, 갈무리, 2016)———— 이종찬(중앙대 영문학과 박사 수료)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김명희 외, 그린비, 2016)———————– 정원옥(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인문장치의 발견 3

식물성의 힘으로 맞닿기: 작가 김비를 만나다—————————– 권명아(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문화현실분석

멜로와 파병 군인, 한류의 만남: 묘하게 흥미롭고 묘하게 불편한 <태양의 후예>——– 권창규(연세대 국학연구원)

‘먹방’의 욕망에서 ‘쿡방’의 욕망으로——————————————— 노의현(수유너머N 회원)

대중문화 알파고——————————————— 주은우(중앙대 사회학과ㆍ문화연구학과 교수)

필리버스터와 발화행위의 미학/정치학——————————— 조선령(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종로 3가, 우리가 몰랐던 서울의 ‘섬’: 노인들의 아지트 만들기———— 오현주(한국외국어대 신방과 박사 수료)ㆍ옥은실(한국외국어대 신방과 박사 수료)

 

근대성 연구: 재난과 근대성

사고와 재난의 근대성 2–근대 철도의 또 다른 얼굴: 사고, 재난과 민중 통제— 이기훈(연세대 국학연구원 HK 교수)

 

동아시아 문화연구

기독교적 차원을 고수하다: 용서… 그리고 인간의 외부에 대하여—–레이 초우(듀크대 교수)ㆍ번역 이윤종(동아대 연구전담교수)

 

이론의 재구성

빗나간 마주침: 알튀세르-마오-스피노자———– 제이슨 바커(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ㆍ 번역 이재원(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 수료)

 

<86호 주요 원고 소개>

 

특집: <비평전쟁>

 

이동연의 정동과 이데올로기

이 글은 이번 특집의 문제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글로, 현 시기를 ‘정동의 시대’로 인식하면서 정동의 사회적 현상들에서 정동과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견인하고 반발하는지 규명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데올로기 내 정동의 주체들, 탈이데올로기적 정동의 주체들, 정동 내 이데올로기의 주체들로 계열화하면서 정동 주체를 검토한다. 이어 그는 감정의 교환가치, 환상의 동일시 욕망, 혐오의 발화행위 같은 이데올로기의 변용이 신경증적 노이즈를 생산하며 이는 정동의 카오스와 짝패를 이룬다고 분석한다. 이때 정동의 카오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ㆍ분배ㆍ증폭되는 정동 양태를 뜻하는데, 이를 필자는 정동의 역능과 그것을 흉내 내는 사이비 정동의 감정들이 서로 부딪치고 섞이면서 생겨난 사회적 인간관계들의 혼종적 상태로 정의한다.

 

박현선 정동의 이론적 갈래들과 미적 기능에 대하여

이 글은 정동의 도래에 따른 전환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정동이론의 다양한 담론적 궤적을 추적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철학적, 이론적 개념으로 형성된 ‘정동’을 통해 미적ㆍ비평적 기획이 가능한 지점이 어디인지 탐색해 나간다. 아울러 정동 개념과 이론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의 규명을 통해 분석적 실효성을 평가한다.

 

최원 정동이론 비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의 쟁점을 중심으로

이 글은 정동이론이 갖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의 쟁점을 논구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정동 개념을 변화와 이행의 측면에서 검토한 후, 마수미(B. Massumi)의 정동이론이 ‘신체적 관념’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이후 주체의 원인이나 맹아를 주체 그 자체 안에서 주체를 선행하는 것으로 포착하는 모든 ‘발생론(genesis)’적 시도를 비판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이데올로기론)과 연결되어 분석된다.

 

하승우 마주침의 외면, 부대낌의 거북함: 왜 운동은 위기를 반복할까

이 글은 현 시기 사회운동의 문제를 정동이론의 함의 속에서 진단함과 동시에 그 대안을 찾고 있다. 필자는 근대 혹은 현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이 과학적 이념과 합리적 설득, 체계적 조직이 있으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온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어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활동을 검토하면서 “삶 속에서의 실험을 통한 에토스의 전환”을 논의한 정동이론의 상상력에 기대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정정훈 헬조선의 N포 세대와 노력의 정의론

이 글은 수능점수로 인간의 질과 등급을 매기는 것과 같은 청년세대들의 왜곡된 인식과 행동을 낳은 사회적 조건과 정념의 동학을 다룬다. 먼저 필자는 대학생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교내ㆍ외 구별짓지의 다양한 실태를 검토한 후, ‘헬조선’과 ‘금수저ㆍ흙수저’라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그 원인으로서 진단한다. 이어 ‘노오력’이라는 자기 감내의 정신이 어떻게 청년세대들에게 자신의 삶과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정의)이 되었는가를 규명하면서 민주주의 실종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기획 1> 세월호 참사 2주기와 노순택의 시선

노순택의 「참사 이후의 참사는 누구의 책임인가」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사건의 진상과 의미를 여전히 ‘기억’해야 할 우리의 사명을 다시금 각인시키는 연작사진 형식의 글이다. 특별한 제목 없이 총 17개로 구성된 글과 사진은 세월호의 침몰부터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보여주며 세월호를 우리의 기억으로 소환한다. 17번부터 시작해 1번으로 끝나는 구성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참사가 일어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의 역행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세월호는 기억의 수면 위로 생생히 떠오른다.

 

<기획 2> 우익의 심리 구조

 

김성윤 박근혜 화법, Listen Carefully

이 글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화 양상(어록)과 그 안에서 발견 가능한 의미와 심리구조를 다룬다. 필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록에서 인지부조화 경험과 조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데, 말실수나 횡설수설, 동어반복과 동문서답, 유체이탈과 시대착오 같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일단’ 박근혜 화법의 세계로 들어갈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문법 파괴와 의미 불일치 등의 불완전하고 모순된 말들이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대중 화법 안에서 어떻게 ‘정상성’을 찾아가는지 알게 있게 된다.

 

이길호, 우리는 어떻게 일배가 됐는가

이 글은 동일한 집단이 아닌 복수성으로 존재하는 일베를 추적하면서 ‘일베-되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규명한다. 필자는 세대나 계층 등의 속성 분류로 일베를 대상화하게 되면 일베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일베 내의 다수성에 주목한다. 이어 그는 디시 내의 소수의 숨겨진 장소였던 일베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보충적 자리에서 현재의 고정적 장소로 전환된 과정을 추적한다.

 

김성일, 한국 우파의 역사 전쟁에 나타난 인정욕망과 콤플렉스

이 글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국면 속에서 한국 우파가 벌여 온 역사전쟁 및 그 안에서 발견 가능한 역사인식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필자는 한국 우파가 역사에서 기술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찰하면서 이들의 심층구조에 자리 잡은 인정욕망을 발견한다. 이어 한국 우파가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것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역사에 대해 갖고 있는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필자는 한국 우파의 역사인식에 나타난 문제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어떻게 연동되어 나타날지 진단한다.

 

<문화현실분석>

 

권창규 멜로와 파병, 한류의 만남: 묘하게 흥미롭고 묘하게 불편한 <태양의 후예>

이 글은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태후’의 다층적 의미를 다루고 있다. 필자는 무비판적인 국가주의적 시선을 재생하고 있지만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불편하면서도 흥미롭고,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한 묘한 매력을 추적한다. 더불어 대통령까지 나서 ‘태후’를 애국심의 고취와 한류의 부흥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갖는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노의현 먹방의 욕망에서 쿡방의 욕망으로

이 글은 쿡방을 먹방 열풍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며 양자를 한데 묶어 분석한 기존의 방식과 달리, 먹방 열풍을 만들어낸 욕망과 쿡방 열풍을 만들어낸 욕망이 다른 방식으로 구성돼 있음을 논하면서 그 차이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분석한다. 무엇보다 쿡방 열풍은 적극적 행위와 참여를 향한 욕망이 요리에 투사된 것으로서, 레시피를 얻고 끼니를 때우며 부엌살림의 요령을 터득하는 것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 즉, 요리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본다는 활동(실천)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율성에의 새로운 욕망 분출을 갈망한 시청자의 바램을 쿡방이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은우 대중문화 알파고

이 글은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에 대한 미디어 및 대중의 폭발적 관심을 하나의 대중문화 현상으로 보면서 SF 영화 속에 나타난 인간과 기계(AI)와의 관계 대한 대중의 복잡한 심리를 추적한다. 가령,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녀>, <엑스 마키나>, <감기> 등은 기계(과학기술, AI)에 대한 대중의 낯설음과 불안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인간 정체성이 위협받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기술 개발의 맹목성과 무책임성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령 필리버스터와 발화행위의 미학/정치학

이 글은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이하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통과를 방해하기 위해 야당이 전개한 필리버스터를 분석한다. 김광진 의원으로 시작해 이종걸 의원으로 끝난 필리버스터는 9일 동안 야당의원 38명이 190여 시간 동안 진행했다. 필자는 필리버스터에 작동한 발화행위의 정치학을 분석함과 동시에 이를 예술장르 중의 하나인 퍼포먼스로 확장시켜 논의하면서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오현주옥은실 종로 3, 우리가 몰랐던 서울의 ’: 노인들의 아지트 만들기

이 글은 돈의동 노인들의 자생적 하위문화 실천을 관찰하면서 ‘종로3가’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장소인지 나아가 그들이 고민하는 일상과 소통의 문제, 노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을 살펴보고 있다. 이를 위해 필자들은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종로3가 노인문화에 관한 질적 자료를 수집했는데, 본격적 참여관찰은 201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루어졌고 장소는 탑골공원에서부터 지하철 1호선의 종로3가역을 지나 종묘공원까지, 그리고 돈의동 안쪽의 골목과 상점에서 이루어졌다.

 

 

 

문화과학사 전화: 335-0461/팩스: 334-0461 e-mail: transic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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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6호][칼럼] 여성혐오의 범죄화와 감정의 정치(최철웅)

경희대원 기고문

 

여성혐오의 범죄화와 감정의 정치

 

최철웅(카톨릭대 강사)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라는 기표를 사회적으로 안착시키면서 다양한 사회적 반응을 낳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나는 페미니스트다’선언이나 ‘메갈리아’등을 통해 터져 나오던 반-여성혐오 운동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질적인 단절을 겪은 듯 보인다.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에게 혐오표현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마음껏 ‘설치고 말하고 떠들자’던 자부심과 발랄함은 일순간 공포와 두려움으로 전환되었다. 여성혐오에 대한 투쟁이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회구조에 맞선 ‘문화전쟁’이 아니라, 실질적인 살해 위협에 맞선 ‘생존투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잔혹한 사건 현장이 이내 거대한 추모

현장으로 변모한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심원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상생활에서 24시간 내내 폭력과 추행, 멸시와 관음증적 시선의 위협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응어리진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강남역 추모게시판에 붙은 ‘살女주세요’라는 다섯 글자는 여성들의 절박함 심경과 그들이 공유하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건 이후 여성들이 겪은 고통과 위협에 대한 고백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간 여성혐오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고민과 공감이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통의 경험에 기초하여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직접적인 감정적 연대를 구축해가고 있다.

이러한 집단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정동은 여성혐오를 둘러싼 일련의 재현과 해석을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 의미화되면서, 정치적 논쟁과 사회적 갈등을 낳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강남역 추모현장에서는 여성혐오 담론이 성대결을 조장한다는 사람들과 여성혐오가 범죄의 원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고, 범죄의 성격규정을 놓고 ‘묻지마 범죄’냐 ‘여성혐오 범죄’냐에 관한 논쟁도 지속되고 있다. 다양한 쟁점의 계열들이 공존하나 논쟁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여성혐오를 개인적 일탈행위로 볼 것이냐, 구조화된 사회문화적 현실로 볼 것이냐를 놓고 형성된 듯하다. 이는 단지 경합하는 해석들의 충돌이 아니라 여성혐오 현상의 본질을 억압하고 회피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충동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러한 시도는 정부와 언론을 비롯한 일부 남성들의 ‘여성혐오의 범죄화’ 프레임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성혐오의 범죄화

여성혐오를 둘러싼 해석적 갈등은 여성혐오 개념 자체가 가진 모호함에서 일부 연유한다. 여성혐오는 때로 개별 남성들이 지닌 여성에 대한 멸시와 비하의 감정을 뜻하기도 하고, 때로 여성착취와 억압의 사회구조 및 제도적 차별 등 거시적인 구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성운동 진영은 대체로 후자의 관점에서 여성혐오를 사고하나, 그러한 구조적 조건 하에서 여성혐오 발언이나 행태가 발현되기에 둘은 첨예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여성 ‘혐오’라는 개념은 불평등이나 차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화적 차원까지 포괄하면서, 상호 의례적 실천이나 감정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여성(성)에 대한 멸시와 비하, 모욕 등을 사고하게 해준다. 단적으로 남성들은 ‘OO녀’라는 ‘낙인찍기’를 통해 여성들에게 수치심을 안기는 한편,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된 정체성을 여성 집단 전체에 투사한다. 이러한 행태가 언론에서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여성혐오가 얼마나 지배적인 문화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구조와 행위주체 사이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는 여성혐오 개념은 ‘강남역 살인사건’이라는 특정한 범죄현상과 결부되면서 불가피하게 첨예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여성들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라는 구조적 현실의 발현으로 보았지만, 일부 남성들을 비롯한 정부와 언론은 조현병 환자의 일탈적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둘 중 하나를 원인으로 규정하기 위한 공박이 지속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 둘의 관점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범죄의 사회적 속성을 점검할 때에는 개인적 차원을 괄호 치고, 개인의 책임을 물을 때에는 구조적 요인을 괄호 치는 식의 해석적 전환을 통해 두 차원을 얼마든지 동시에 사고할 수 있다. 범죄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나 위계적 문화, 개인적 이력, 범행의 가능성과 조건 등 다양한 요인들의 중층적인 결정에 의해 발생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조에 처해 있다고 해서 모든 개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우리는 여성혐오를 범행의 구조적 원인 중 하나로 사고하되, 여성혐오적 인식이나 행태를 보인다고 해서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범죄를 저지른 개인이 사회경제적 곤궁이나 불우한 가족사, 여성에게서 겪은 좌절감 등을 이유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범죄의 구조적 요인들은 사후적인 소급을 통해서만 식별되므로, 우리는 범죄의 원인과 발현에 관해 단순한 인과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언론 그리고 대중적 통념은 늘 범죄에 대해 단일하고 선형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한다. 우리는 범죄에 대해 개인의 행위성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하며, 그리하여 ‘범죄화’의 프레임은 중력처럼 끊임없이 논의를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여성혐오가 죽였다”는 여성들의 주장은 여성혐오가 범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의 배경에 놓인 여성혐오의 구조적 현실에 대한 각성과 대안 마련을 촉구하는 의미일 것이다. 정부는 결국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대책으로’CCTV 확충, 정신질환자 관리ᄋ감독 강화’등을 내놓으면서, 여성혐오 문제를 개별적이고 일탈적인 사건으로 치환시켰다.

 

감정의 정치와 그 딜레마

여성혐오를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 지배의 현실은 강력범죄와 같은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에야 비로소 사회문제로 가시화된다. 그러나 범죄화의 프레임을 거치면서 사건 자체가 지닌 강렬한 이미지와 일탈적인 성격이 전경화되고, 그러한 사건을 초래한 구조적 현실에 대한 강조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난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더해지면서 사건에 대한 의미화는 일찌감치 ‘공포와 안전’의 문제로 정향되었다.ᅠ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희생자에 대한 추모, ‘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는 일부 남성들의 성찰, 뻔뻔하게 여성혐오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에 대한 분노 등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분위기가 사건을 휘감고 돌았다. 물론 이러한 정서적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감정적 유대는 의식적인 사회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원천이자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정은 단지 순수하고 인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세월호 사태를 비롯해 강남역 사건에 대한 추모현장에서 ‘추모행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요구와 곧잘 맞닥뜨리곤 한다. 감정의 순수성과 자생성에 대한 강조가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정치성을 배제하는 데 동원되는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귀결된 안전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인 사회문화적 변형이 아닌, 정부의 즉각적인 통제와 관리강화로 귀결되기도 한다. 예컨대 오늘날 각국 정부는 테러나 이민자의 위협 등 공포를 사회통제의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시민들은 안전에 대한 열망으로 그러한 통제를 쉽게 받아들이곤 한다. 이러한 사태는 오늘날 공적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감정의 정치’에 내재된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견고한 현실의 벽과 공적인 정치의 무력함, 사회적 가치의 탈각과 냉소적인 태도의 지배 앞에서 감정은 인간적인 것을 되살리는 한편, 직접적으로 공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감정의 동원은 자칫 탈-정치화로 귀결되거나,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의 정치가 정치적 항의와 대안적 사회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되, 그러한 열망이 탈-정치화로 흐르거나 일시적인 분출로 끝날 위협을 경계하면서 꾸준히 정치화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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