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2호][칼럼]진짜 안보 망치는 병영문화 체험_오혜진

한겨레 기고

 

[2030 잠금해제] 진짜 안보 망치는 병영문화 체험

 

오혜진(근현대문화 연구자)

 

최근, 가상의 5살 아동 ‘제제’에 대한 이야기가 온 지면을 덮었지만 나는 좀 다른 아이가 신경 쓰였다. ‘국민아기’라 불리는 세 쌍둥이, 일명 ‘삼둥이’들이 공군부대에 들어가 ‘병영문화 체험’을 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른 채 제 몸보다 큰 군복을 입은 유아에게 “역시 군인은 용감해” “아침부터 전우애가 넘쳐나는 생활관” 따위의 자막을 입힌 화면은 예능이라기엔 너무 안 웃겼다. 아이가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라며 ‘빨간 마후라’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실소했다. 어린이들과의 성적 접촉을 선호하는 성향을 ‘페도필리아’라 부른다던데, 옹알이를 갓 뗀 만 3살 유아가 ‘다나까’로 말하거나, ‘군대리아’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증상은 뭐라 해야 하나.

 

가부장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논리의 조우야말로 최근 ‘군대’라는 콘텐츠가 자주 호출되는 이유겠다. 하나 사태는 더 심각해 보인다. 이미 보도됐듯, ‘삼둥이’의 병영문화 체험은 ‘나라사랑 꾸러기 유치원’이란 걸 만들어 유치원에서도 안보교육을 실시하겠다는 정부의 새 정책과 긴밀히 호응하기 때문이다. 초·중·고 안보교육 사업인 ‘나라사랑정신 계승발전’ 예산도 대폭 늘었다 한다. ‘건전한 안보의식 함양와 국가관 확립’이 목적이라는데, 대체 ‘안보’ 혹은 ‘건전한 국가관’은 뭔가. 그건 꼭 안보교육이나 병영문화 체험 같은 장치들을 통해 함양돼야 하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신시아 인로는, 특정 유형의 남성(성)을 특권화하고 여성(성)을 선취함으로써 군사주의의 지구화가 달성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군사화된다는 것’은 ‘군사적 가치들(위계질서, 복종, 무력 사용에 대한 신념)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하고, 군사적 해결 방식을 각별히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군사적 태도가 만연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국방부가 교과서 집필에도 나서겠다는 판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민주화 시대’ 이래, 대한민국은 아주 깊고 빠르게 재군사화되고 있다.

 

기묘한 것은,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군사정권의 암흑을 강렬히 체험했음에도 군대의 질서와 문화가 일상화하는 것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무디다는 점이다. (‘삼둥이’의 할머니도 최근 남다른 인사성을 과시하며 ‘거수경례의 아이콘’이 됐다.) 전쟁 및 분단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 ‘안보’는 무소불위의 위력을 휘두르는 절대명제였고, 이는 언제나 군사주의를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늘 그렇듯, ‘국가안보’는 대개 외부의 적보다 국내의 ‘위험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말로 쓰인다. 국정교과서 반대자, 세월호 유가족, 심지어 동성애자들을 ‘종북좌빨’이라 부르고, 궐기한 민중에게 살상무기화한 최루액 물대포를 쏘며 적화(敵化)하는 사례들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안보’에 대한 새로운 이해다. 과연, 삼둥이는 ‘누구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 애들도 엄마와 아내와 딸을 당연히 ‘피보호자’로 여기게 될까. 비합리적 적대주의와 타자의 ‘여성화’를 통해 얻어지는 ‘남성다움’. 이에 대한 성찰 없이 함양되는 안보의식이란, 결국 폭력과 혐오가 판치는 ‘헬조선’의 주역들을 낳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안보’란, 평화운동에 대한 관심과 젠더감수성의 함양, 그리고 ‘탈군사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주자. 물론 애들 좀 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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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2호][행사안내]제3회 비판과대안을 위한 포럼L “진보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제3회 비판과대안을 위한 포럼L
“진보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2015/11/26(목) 15:00
세종문화회관 예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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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2호][신간안내]문강형준 <감각의 제국>

편집위원 신간 안내

 

문강형준 <감각의 제국>

<한겨레>에서 연재되고 있는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의 문화비평 칼럼 크리틱 64편을 책으로 묶었다. 사회 현상과 사건, 영화, 드라마, 책 등 다양한 문화 텍스트를 분석함으로써 오늘날 지옥 같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의 맥락을 짚어낸다. 이야기의 실체, 이면, 효과가 무엇인지 따져 묻는 과정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취하고 어떤 이야기를 버릴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함을 역설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대안을 이야기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진단과 판단이 필요하다. 비평이란 궁극적으로 양 갈래로 나뉜 길 앞에서의 판단과 선택을 의미한다. 우선은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시각이 먼저다. 자신과 불화하는 판단과 시각을 용납하지 않는, 혹은 판단과 시각을 갖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는 이 시대에, 기존의 이야기에 맞서는 대항 이야기로서의 이 칼럼들이 권력과 자본의 이야기에 빠져 있던 누군가의 생각을,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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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2호][칼럼]아이유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_손희정

가대학보 기고문

 

아이유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아이유가 컴백했다. 언제나처럼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제제>라는 곡이 놓여있다. 많은 독자들을 눈물 바다에 빠트렸던 브라질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다섯 살 짜리 주인공 ‘제제’를 성적 대상화하고 “꽃을 따라”고 적극적으로 유혹하고 있다는 죄목이다. 한국에 이 작품을 처음 소개한 출판사에서 아이유의 해석에 유감을 표하면서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논란은, 이제 소아성애의 대중문화적 재현에 대한 윤리적 판단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뒤따라 음원 불매 운동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아이유는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출판사는 유감을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소비자들은 음원 불매 운동을 펼칠 수 있고, 누군가들은 예술의 자유를 옹호하며 ‘대중 파시즘’을 비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이야기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이 ‘사건’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이유의 성장이 말해지고 전시되는 방식이고, 그런 맥락 안에서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상상했다는 점이다. 아이유의 성장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하나는 ‘소녀’에서 ‘여자’로의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돌’에서 ‘작가/아티스트’로의 성장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성장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유의 ‘섹슈얼리티’다. <제제>가 수록된 앨범에서 같이 소개되고 있는 <스물셋>이라는 곡에서 아이유는 말한다. “난 영원한 아이로 남고 싶어요. 아니 아니 물기 있는 여자가 될래요.” 대중은 아이유가 어떻게 ‘국민 여동생’에서 ‘여자’로 성장할지 주목해 왔다. 아이유 역시 바로 그 지점이 스물 셋, 대중 ‘여’가수의 상품성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아이유에게는 어떻게 ‘성적 존재로, 그리하여 성인 아티스트로 거듭날 것인지’가 중요한 화두였음이 분명하다. 성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 (사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성공한 아티스트가 되는 것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지점에 한국 사회의 성규범이 놓여있다.

이때 ‘한국 사회의 성규범’이란 ‘여성의 성’에 작동하는 규범이 아니다. ‘아이의 성’에 작동하는 규범이다. 이 사회에서는 아이를 탈성애화시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린 스타’의 ‘성인 스타’로의 발돋움에는 언제나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놓이게 된다. 게일 루빈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작업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제도, 그리고 법은 “유년의 ‘천진무구함’과 ‘성인’의 섹슈얼리티 사이에 놓인 경계를 유지하는데 특히 흉포하다.” 그리고 이런 흉포함은 물론 여성의 경우에 더 과도하게 활개를 친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여성 연예인’들은 ‘성인 인증’을 받기 위해 이중의 성별규범에 영합해야 한다. 포르노에 가까운 ‘성인 연기’가 여성 연예인들에게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는 경우들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이것이 그동안 아이유가 ‘성적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소아성애의 대상이자 로리콤 서사의 주인공으로 과잉 성애화되어 온 이유이기도 하다. 금지된 욕망이기 때문에 더욱 잘 팔리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제제>를 둘러싼 논란의 한 축에도 바로 이 문제가 놓여있다. 아이유는 성적 주체일 수 없었지만 언제나 과도하게 성애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 아이유가 자신의 연애를 공식화한 뒤, 스스로 ‘여자’가 되었다고, ‘성적 주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작업에서 어린아이를 성적 존재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흥미로운 도발이다. 이런 적극적 해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과연 소아성애인가? 아니면 한 여성이 오랜 시간 겪어 온 ‘사회가 해석하는 나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인가. 우리는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던 ‘그런 소녀’가 아니었다”는 일종의 ‘항변’을, 제제에게서 ‘섹시함과 사악함’을 읽어내고자 했던 그 ‘작가적 욕망’ 안에서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은가.

<제제>가 소아성애를 정당화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성적 약자인 ‘아이들’을 성적 폭력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 이 논란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네티즌은 이승연의 ‘종군 위안부 컨셉의 사진집’과 아이유의 <제제>를 같은 자리에 놓고 비판했고, 이 글은 공감을 얻으면서 여러 곳으로 공유되었다. 한편으로 이런 관점이 유일한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유통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승연의 사진집은 (그 역사 인식의 부재를 지적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명백하게 ‘강간 판타지’의 재현이다. 그렇다면 <제제>는 어떨까?

물론 소아성애는 비윤리적인가, 아이들은 성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존재일까 등 이 사건을 둘러싸고 논의되어야 할 문제들은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이 논란은 결국 섹슈얼리티를 둘러싸고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욕망의 표현은 또 어디까지 용인될 것인가’라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아이유라는 상징적 기표를 경유해서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 고정관념이 생산하는 효과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사회에도 루빈의 선언처럼 “성을 사유할 때”가 이미 오래전에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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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2호][연구자료] 콘텐츠산업 통계조사 산업별 결과 03 음악산업

콘텐츠산업 통계조사 산업별 결과 03 음악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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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2호][연구자료]사회적 자본시장과 성장자본: 보조금 연계형 사회영향투자

사회적 자본시장과 성장자본: 보조금 연계형 사회영향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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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2호][신간안내]84호를 발간하며

 

안녕하세요? 계간『문화/과학』 편집위원회입니다. 국내 유일의 문화이론 계간지『문화/과학』84호가 발간되었습니다. 관련하여 보도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이번 84호의 특집 주제는 <예술노동>입니다. 2011년 극작가 최고은 씨의 사망으로 예술인복지와 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되었지만, 2015년 연극배우 김운하씨의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예술복지와 예술노동의 문제는 특히 최근 도시재생의 젠트리피케이션 심화로 창작의 위기까지 가중되고 있습니다. 예술노동이란 개념은 창작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지만, 정작 예술가의 생존 현장에서는 절실한 의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사회적 파업과 투쟁의 현장이 늘어나면서 예술이 현장에 참여해야 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예술행동은 고통 받는 예술가의 예술노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최근 정부가 자행하는 예술 검열 사태 역시 우리 사회 예술창작의 권리, 예술노동, 예술행동의 문제들이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문화/과학』84호는 예술노동이란 주제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 대학로 극장이 폐관되고, 배우는 생활고에 시달려 죽음을 맞으며, 가난한 청년예술가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예술가는 고통 받는 이들의 현장을 포기할 수 없고, 예술의 검열은 더 강화되는 지금 우리 시대 예술의 위치를 묻는 특집 <예술노동>을 다룬 6편의 글!● 강원도 화천과 부산에서 오랫동안 지역 문화예술 활동을 한 극단 <뛰다>와 문화기획 집단 <플랜b>의 연대기를 담은 기획 <지역문화운동의 새로운 흐름들>!

● 한국사회 혐오, 표절, 광복70주년행사, 세월호특별법 보도담론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담은 4편의 문화현실분석 수록!

● 일본 퀴어문화와 중국 상해 신노동자의 미디어 재현 문제를 다룬 3편의 동아시아 문화연구 수록!

● 지젝의 슈미트 비판의 의미를 해석한 김정한 교수의 이론의 재구성!

● UC 샌디에고의 이진경 교수의 신작 <서비스이코노미>와 일본의 지역운동으로 발전한 NPO 교육운동의 현장을 다룬 권명아 교수의 글과 좌담 수록!

 

■ 많은 분들의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84호의 ‘특집’은 ‘예술노동’이다. 예술과 노동이라는 이질적 단어의 조합은 그 자체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술이 어떻게 노동인가라는 반발에서부터 예술마저 노동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회의적인 반응이 있는가 하면, 예술은 노동의 특수한 행위라는 입장, 예술노동은 예술도 노동도 아닌 다른 활동이라는 견해까지 예술노동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은 않는 예술노동이라는 이슈를 『문화/과학』에서 특집으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예술노동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최고은, 김운하 등 청년 예술가들의 잇따른 죽음이 있다. 생활고에 내몰린 예술가들의 쓸쓸한 죽음 이후 예술인복지법 등 지원정책이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의 궁핍한 삶의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더 적극적인 인식의 변화가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예술노동’이라는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무엇이며, 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 근본적 성찰과 맞닿아 있다. 바꾸어 말해, 예술가들에 대한 복지정책의 마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예술가들 스스로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권리와 역할을 갖는 존재인지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살아남기’를 모색하려는 능동적 시도가 곧 예술노동이라는 문제설정이었던 것이다.

 

예술노동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공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에 예속된 예술과 예술가들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적 사고와 실천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쟁과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예술가가 스스로를 구제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문제설정으로서 예술노동은 한국 사회의 여건에서 적절하고, 실현 가능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예술노동을 둘러싼 담론의 역사적․이론적 지형 및 실천 영역에서의 쟁점들을 살펴봄으로써 찾을 수밖에 없다.『문화/과학』이 예술노동이라는 논쟁적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목 차>

 

특집: 예술노동

예술노동의 역사▪이론적 궤적———————————————————————- 최진석(수유너머N 연구원)

예술노동의 권리와 사회적 자본형성을 위한 예술행동———————————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예술인복지, 무엇이 문제인가——————————————————————-김상철(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

예술노동 뒤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홍태림(<크리티칼> 발행인)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를 위한 연대의 노래————————–이원재(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

예술노동과 예술행동을 둘러싼 사회적 의미와 흐름에 대하여(좌담)———————-이광석, 이원재, 송경동, 김준기

 

기획: 지역문화운동의 새로운 흐름

예술텃밭에서, 저항하다————————————————————————————황혜란(극단 뛰다 배우)

부산의 문화적 현안과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송교성(플랜비문화협동조합 지식공유팀장)

김태만(부산해양대 교수)

 

문화과학 제13회 북클럽

이진경 『서비스이코노미』(소명출판사, 2015)

패널: 이진경(UC 샌디애고 교수), 문강형준(문화평론가),

이혜령(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정정훈(수유너머N 연구원)

 

문화현실분석

혐오없이, 혐오앞에서, 혐오와 더불어———————————————————– 시우(트랜스 크라이스트 연구모임)

표절에 대한 짧은 소회——————————————————————————————————- 최원(독립연구자)

신화정치의 위기 속 역사철학과 문화연구의 조우 ———————————–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여론은 흐른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여론’이라는 담론구성———————- 김수아(서울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인문장치의 발견

NPO와 공생카페: 지역 생협으로 발명한 ‘동아시아 공생대학’—————————-권명아(동아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동아시아 문화연구

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 불가시화에 저항하며——————————————얀베 유우헤이(일본 근대여성사 연구자)

다양한 지배, 다양한 저항————————————————————————–스나가와 히데키(LGBT 인권운동가)

신노동자가 ‘드림쇼’를 만났을 때——————————————————————————-궈춘린(상해대학교 교수)

 

이론의 재구성

지젝의 슈미트 해석과 비판 —————————————————김정한(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 연구교수)

 

 

<84호 특집 원고 소개>

 

최진석(수유너머 N 연구원),「예술-노동의 역사․이론적 궤적: 놀이노동의 신화에서 예술기계의 실재까지」

이 글은 산업화와 함께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놀이가 근대예술로 탄생된 이후 예술과 노동을 다시 연결시키려 한 시도들의 역사․이론적 궤적을 맑스주의 전통 안에서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전 자본주의 시기 ‘조화로운 삶’에 대한 엥겔스의 회고로부터 시작되는 글은 예술-노동의 테제가 러시아 혁명 이전에 체르니셰프스키와 플레하노프에 의해 예술이론으로 완성되었으며, 소비에트-러시아에서는 프롤레트쿨트와 레프의 문화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작업에서 최진석이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은 예술과 노동의 통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생산하는 삶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는 예술-노동이 상품화된 일상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생산하기 위해 요청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가치법칙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활동, 요컨대 ‘삶정치적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정치적 활동으로서의 예술-노동은 노동가치론의 전제들을 타파하고, 예술-노동의 주체로 설정되었던 인간을 넘어서서 “예술-노동의 기계적 배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과제로까지 확장된다. 그의 논지는 예술-노동이라는 문제설정에서 흔히 간과되었던 점,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생산하기 위해 예술과 노동이 연결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점을 거꾸로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생산적 노동의 지양을 전제하는 ‘삶정치적 활동’으로서의 예술-노동이 생존위기에 몰려 있는 예술가들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예술노동의 권리와 사회적 자본 형성을 위한 예술행동

이 글은 이론적․실천적 관점에서 예술노동의 쟁점들을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그에게 예술노동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지배체제의 외부로 향하는 ‘사회적 자본’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 사유로서 복지와 행동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예술이 위기를 맞게 된 원인을 ‘예술의 젠트리피케이션’과 ‘예술가의 프레카리아트화’로 진단하고, 이로부터 예술가를 위한 복지와 예술가에 의한 행동을 동시에 고려하는 예술노동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복지법과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사례비 및 표준계약서의 작성 등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예술가의 권리로 요구되어야 할 복지문제라면, 권력과 시장의 문제를 비판하고 전유하는 예술행동은 예술가들의 사회적 역할로 요구되는 것이다. 예술노동의 목표는 예술가들의 자립과 연대를 통한 사회적 자본의 형성에 있다.

 

김상철(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예술인복지, 무엇이 무엇인가: ‘잊혀진예술인 복지정책의 문제설정

이 글은 제대로 된 예술인복지정책이 수립되기 위한 조건과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정책 담당이기도 한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현장의 요구는 담론 차원의 논의보다 더 다급하고 절박해 보인다. 그는 예술인복지는 생계보장, 신분안정, 창작지원의 세 가지 영역에서 동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근거로 예술가도 국민이라는 점을 꼽는다. 즉,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예술가도 일반적인 사회보장체계로의 진입을 마땅히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국가가 예술인에 대해 사용자성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 문화산업자본에 대해 예술가들이 노동자성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권력과 자본에 투항하겠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도에 ‘개입하면서 넘어서는’ 가장 실현 가능한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홍태림(<크리티칼> 발행인, 작가), 예술노동 뒤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이 글은 현장의 목소리 혹은 현장 관찰자의 기록이라 할 만한 것이다. ‘예술노동 뒤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예술장의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만이 아니다. 인정투쟁에서 생존자로 남고 싶은 예술가들이 열망이 그러한 제도와 관행에 적극적으로 공모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술노동과 관련한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예술은 노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 예술과 노동을 동일하게 보는 입장, 마지막으로 노동은 예술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홍태림은 자신이 마지막 입장에 속해 있음을 털어놓으면서 예술노동에 대한 전적인 거부도 과도한 낙관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가 중도적 입장이어서가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가치는 노동과 동일시될 수도, 완전히 단절되어서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술노동과 관련한 논쟁은 “동시대 속 예술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관한 처절한 주관식 문제”일 따름이다.

 

이원재(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 콜트콜텍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연대의 노래

이 글은 정리해고에 맞서 3213일이라는 최장기 투쟁을 벌이고 있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과 예술가들이 어떻게 연대하며 지금까지 왔는지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콜트콜텍 예술행동이 “단순한 예술가들의 참여를 넘어 미학적으로도, 예술의 전문성이나 수월성의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창출해냈”고, “콜트콜텍기타 노동자운동의 예술행동은 기존의 사회적 이슈 기반의 예술행동과는 같지만 또 다르게 커뮤니티 기반형 예술행동으로서의 창작과 공유의 경험을 축적”했음을 강조한다.

<좌담> 이원재, 김준기, 송경동, 이광석 예술노동과 예술행동을 둘러싼 사회적 의미와 흐름에 대하여: 예술노동과 예술행동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이 좌담에서는 예술노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부터 예술노동과 예술행동의 관계, 향후 예술노동과 예술행동을 둘러싼 쟁점들이나 제안 등에 대해 풍성한 의견들이 오고 갔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들린 이야기는 “동네 예술가로서 살아나가는” 지역화 전략(김준기)과 “다른 세계 자체를 꿈꾸는 행동들”(송경동)이 여전히 함께 필요하다는 마무리 발언이었다. 자신이 뿌리내린 지역 커뮤니티에서 예술가로서 살아가되 지구적 차원에서 상상하고 행동하는 삶. 그것이 예술노동과 예술행동이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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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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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칼럼] 돌아온 앨리스는 반란의 꿈을 꾸는가?(손희정)

돌아온 앨리스는 반란의 꿈을 꾸는가? (손희정)

 

 

여자들이 돌아오고 있다. <차이나타운>(2014), <암살>(2015), <협녀>(2015)와 같은 상업영화에서 <위로공단>(2014)이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와 같은 다큐멘터리와 작은영화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영화 이야기다. 한동안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 기근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는 IMF 이후 가장 먼저 해고되고 노동력 유연화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 노동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생산의 장에서 내쫓겨 재생산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거나 더욱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내몰려야 했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재현의 장에서도 거세되었다. 그 때문에 1990년대 스크린을 활보했던 다양한 직업의 여성들은 2000년대에는 실종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들이 어쩐 일인지 되돌아 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변화가 20-30대 여성들이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관객, 특히 여성-관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이런 흐름은 몇 몇의 할리우드 영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 <겨울왕국>(2013), 그리고 <말레피선트>(2014)로 이어졌던 ‘디즈니 페미니즘’은 이런 분위기를 견인했다. 천만 관객을 넘긴 <겨울왕국>에서 여성들은 ‘착한 딸 콤플렉스’를 넘어서 드디어 ‘나 자신’이 되는 여성의 자아실현 스토리에 열광했다. 그리고 자매애를 ‘진정한 사랑’으로 해석함으로써 여성 간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던 신선한 시도에 감동했다. 여성의 자기 찾기와 자아 실현, 여성 간의 관계 회복이라는 페미니즘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이었다.

 

여기에 <헝거게임> 시리즈(2012-2015)와 <다이버전트> 시리즈(2014-) 같은 영어덜트 장르는 강인한 소녀 전사를 선보이면서, 이성애 로맨스나 신자유주의 소비문화의 화려한 스펙타클을 벗어난 ‘다른 여성의 재현’이 어떻게 관객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지 보여줬다. 특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는 드물게 진보적인 캐릭터인 ‘캐트니스 애버딘’(헝거게임)은 전통적인 젠더 재현을 비틀뿐만 아니라, 독재에 맞서 가족, 동료, 그리고 이웃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활을 집어들고 민중 봉기의 아이콘이 되면서 혁명의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가져온다. 이런 다른 여성 캐릭터에 대한 요구는 201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 폭발했다. 출산 기계로 전락한 여성들을 구출하면서 반란을 꿈꿨던 ‘퓨리오사’는 그가 도망쳐 온 곳으로 되돌아가 (역시나) 독재자인 가부장을 처단하고 여성영웅이 된다. 한 줌의 씨앗으로 세계의 파국을 넘어서려는 ‘퓨리오사’의 단단하게 쥔 두 주먹,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여성연대가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이와 함께 김혜수, 김고은의 <차이나타운>이 등장했고, <암살>과 <협녀>와 같은 대작 영화들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더불어 여성 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다룬 다큐 <위로공단>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노동자의 고통과 피로함을 그리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녀는 괴로워>(2006)나 <써니>(2011), <댄싱퀸>(2012) 같은 흥행작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탈역사화된 공간에서 여성의 자아실현을 자기계발 및 소비문화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텍스트였다. 이 영화들이 그려내는 세계와 <차이나타운>, <위로공단>, 그리고 <앨리스>가 선보이는 세계 사이의 간극은 지금 스크린에 등장한 ‘다른 여성’의 모습이 어째서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전자의 영화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판타지를 판매했다면, 후자의 영화들은 우리가 아무리 ‘헬조선’에서 규범에 복종하고 순종적으로 살면서 ‘노오오오력’한다고 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차이나타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간극을 우리 시대의 여성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목격하고 만 것이다.

 

한편으로, 위기의 시대를 타계하기 위해 남성들의 권위를 살려줘야 한다는 사회의 노골적인 요구에 합의했던 여성들은 이제 그런 남성 중심의 위기 탈출 전략이 아무런 ‘낙수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스트-IMF의 담론은 남성을 먼저 위로하면 여성의 삶도 함께 나아질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실제로 여성의 삶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득권자였던 남성의 삶 역시 함께 무너지게 되었다. 남녀 공히 ‘노오오오오력’ 해봐야 포잡을 뛰어도 빚 없이는 집 한 채 구할 수 없는 ‘앨리스’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사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오피스>(2015)다. 성실하기만 할 뿐 능력도 빽도 없는 ‘김병국 과장’은 부당 해고를 당한 뒤 자살한다. 그리고 자신과 똑닮은 ‘인턴 이미례’의 몸에 빙의된다. 그러나 ‘김병국’과 ‘이미례’는 애초부터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겹쳐져 있다. 만년 과장과 만년 인턴이 하나가 되어 직장 동료를 살해하는 이 공포물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앨리스’도 ‘김병국/이미례’도 갑과의 싸움이 아니라 치열한 ‘을 대 을’의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55년 전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렸던 김기영의 <하녀>(1960)에선 ‘하녀’가 부르주아 가정을 박살낸다. 2010년에 임상수가 리메이크한 판본에서는 전도연이 연기한 ‘하녀’가 대한민국 1%인 이정재의 거실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저항했다. 하지만 2015년이 되어 우리 시대의 ‘하녀’인 ‘앨리스’는 갑은 건드리지도 못한 채 식물인간이 된 남편과 뒤늦은 신혼여행을 떠난다. 무엇과 싸워야 할지, 혹은 무엇과 싸울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곳. 그곳이 우리들의 ‘차이나타운’이다.

 

그런 시대를 살기 때문일까? 섣부른 기대일 지도 모르지만, 이제 여성들은 다른 여성상을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크린으로 돌아오고 있는 앨리스들을 반기는 스크린 앞의 앨리스들은 갑의 세계를 뒤집어 엎 반란의 꿈을 꿀 수 있을까? 그 꿈을 구체적으로 꿔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2015년 10월 5일 가대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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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칼럼]‘헬조선’의 정치적 무의식(이동연)

‘헬조선’의 정치적 무의식 (이동연)

 

‘헬조선’ 현상에 대한 최근 경향신문의 커버스토리 기사는 이 단어의 발생과 용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경향신문과 데이터 컨설팅 기업 ‘아르스 프락시아’가 함께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헬조선’ 현상은 취업난에 고통을 받는 청년들의 넋두리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더 이상 사회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특히 청년 세대와의 직접 취재를 통해 ‘헬조선’이 희망 없는 교육, 국가의 무능과 미개한 통치성, 기업의 노동착취와 연고주의의 극단을 대변하는 일종의 ‘절망의 수사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경향신문의 커버스토리는 ‘트위터’나 ‘일베’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다른 SNS 공간에서도 헬조선은 미개하고 지옥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고, 하루빨리 헬조선을 ‘탈출’하고 싶다는 견해도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헬조선의 용법이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청년실업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주시하고 있다.

 

경향신문의 커버스토리는 헬조선이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드러내는 집단들이 유포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지 일베의 혐오 수사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헬조선은 한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정의와 윤리의 감정이 붕괴되고 있음을 청년세대의 입을 통해 경고한 근본적인 사회 체제 위기의 담론이다.

 

헬조선으로 대변되는 청년들의 총체적 분노와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헬조선 닷컴의 메인 페이지의 살벌한 슬로건만 보면, 조만간 대한민국에 동학 혁명과 같은 민중 봉기가 일어날 듯한 전조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헬조선의 담론장은 의외로 평화롭다. 지금 여기, 지옥 같은 조선의 세상을 갈아엎겠다는 봉기의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그 재난의 사태를 관망하고 즐기는 분위기가 더하다. 헬조선의 절망과 분노의 글들은 매우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세상을 비난하지만, 그 비난은 비난에 불과할 뿐, 세상을 바꾸려는 직접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헬조선의 분노는 정치적으로 이완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봉합되어 이들 주체의 입장조차 무엇이 정치적 비판이고, 무엇이 탈정치적 냉소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헬조선의 분노의 눈초리는 사회 전체의 부조리, 부정의한 지배 체제에 향해 있지만, 정작 이 담론의 정치적 위치는 제로섬 게임에 빠져 있다. 이들의 분노는 영도의 글쓰기이다. 헬조선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헬조선’이란 작금의 세상을 뒤엎으려는 직접행동을 지연시키거나 해소시키기 위한 조작된 공론장 같아 보인다. 범용화된 현상으로서, 혹은 유포된 담론으로서 헬조선은 헬조선이라는 실재를 기각하고, 오히려 그 체제를 재생산하는 구성적 요소로 작동한다. 헬조선의 담론과 주체는 헬조선의 생산관계를 재생산한다.

 

헬조선에 대한 경향신문의 커버스토리리 기사가 아쉬웠던 것은 온라인에 기반 한 객관적인 데이터 분석에 치우진감이 없지 않아, 단어들의 표층적 연결 고리의 분석을 넘어서 단어 사이의 심층의 무의식을 해석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1970년대 영국에서도 청년계급들이 썩어 문드러진 영국사회에 대한 분노와 조롱의 문화가 있었다. 이름하야 ‘펑크문화’이다. 펑크족들은 자신들에게 실업과 절망만을 안겨준 국가를 향해 무정부주의를 외치고, 영국 왕실을 향해서는 “여왕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펑크족은 부모세대들을 저주하고자 부모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치의 십자상을 패용하고 다녔다. 이들의 인종차별적 행동은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오로지 부모세대들이 자신들을 미워해주길 바래서이다. 펑크의 저항의 스타일은 동시대 사회에서 버림받은 청년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지배 이데올로기로 흡수되고, 상풍형식으로 변질되었다. 국가는 이들의 분노를 오히려 굳건한 국가 지배체제를 세우기 위한 교훈으로 삼았고, 패션기업들은 펑크의 저항의 형식들을 고가의 상품으로 전환시켜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헬조선의 현상도 그런 모습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조선 닷컴의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삼성생명, 한화건설, 유학닷컴, 잡코리아 광고가 기사와 함께 연동되어 있다. 헬조선이 비난하는 대기업, 유학지상주의, 취업만능주의의 당사자들이 헬조선을 구성하는 글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헬조선의 담론들은 펑크문화에 대해 어느 영국의 문화연구자가 예리하게 분석했듯이, 동시대 사회의 모순들을 마술적으로 해소하려는 수사학에 불과하다.

 

정치적 무의식은 사회의 모순들을 텍스트 안에서 마술적으로 해소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모순의 심층을 사회의 표면 밖으로 끄집어내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헬조선의 정치적 무의식은 사회모순을 표상하는 텍스트 안에서만 기거하길 원한다. 그럴 경우 무의식은 대체되고 응축만 될 뿐 폭발하지 못한다. 지금 헬조선의 정치적 무의식은 불만의 도상, 분노의 기표만을 생산한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편집증만 생산할 수밖에 없다. 담론과 현상으로서 헬조선이 아닌, 정말로 지옥 같은 ‘헬조선’에 대한 정치적 무의식은 ‘헬조선’의 텍스트 밖으로 나와 폭발해야 하지 않을까?

 

 

(경향신문 2015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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