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2호][칼럼]예술가가 검열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_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예술가가 검열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우리는 지금 정신의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5년간의 징역살이. 가슴이 답답하고, 울분으로 오한이 나지만,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견뎌야 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노동자, 장애인, 학생, 교사, 농민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아마도 예술가만큼 마음의 상처에 치를 떠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지금 나쁜 권력으로부터 유례없는 검열의 광풍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문화예술계에 자행되는 검열과 배제의 사건들은 실로 전방위적이다. 2013년 9월부터 지금까지 대략 2년 동안 문화예술계에서 벌어진 검열과 배제의 사례들만 해도 20여건이 넘는다. 2년간의 기간임을 감안하면 월 1회 정도 예술 검열과 관련된 논란이 불거진 셈이다. 소위 <월간 검열>이란 잡지도 낼 수 있을 정도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매가박스 개봉 중단, 박정희 유신 정권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월간『현대문학』이 이제하 등 소설가의 연재 중단,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 벨> 멀티플렉스 상영 거부, <다이빙 벨> 상영을 이유로 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삭감 의혹과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종용, 제35회 서울연극제의 아르코 예술극장 사용대관 심의 탈락, 박근혜 정권을 패러디한 <경국지색> 전단지를 배포한 윤철면씨에 대한 자택 압수수색,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을 살포한 이하 작가 연행, <모든 군인을 불쌍하다>를 연출한 박근형 교수의 ‘창작산실’ 사업 선정 작품 강제 제외, 한국문화예술위 산하 한국공연예술센터에서 세월호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연극 <이 아이> 공연을 방해, 그리고 가장 최근에 국립국악원 ‘금요공감’ 프로그램에 출연한 ‘앙상블 시나위’의 <소월산천> 공연에서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 부분을 제외할 것을 요구.

 

이런 검열과 배제의 사례들은 대체로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유형은 천안함, 세월호 등 시국사건이나 사회적 재난을 예술작품으로 재현하는 것에 대한 검열로 이는 이들 작품의 대중적 유포를 차단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두 번째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부친 박정희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작품을 검열하는 것으로, 통치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체의 행위에 대한 통제이다. 세 번째는 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활동에 참여한 예술가 개인과 단체들에 대한 검열로 각종 지원 사업에서 배제하거나 공식적인 행사에 필요한 공공지원을 차단한다. 마지막으로는 정부여당의 반대편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검열로 이는 예술의 진보적 가치에 대한 부정과 진보정치의 역사적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의도를 갖는다. 전체적인 검열의 사례들을 분석했을 때, 시국사건이나 사회적 재난에 대한 표현물의 검열보다는 박근혜 통치자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표현물에 대한 검열이 더 많다. 이는 최근 검열이 전제 군주적, 혹은 근대 파시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어떤 예술가도 통치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검열의 방식 역시 매우 구체적이고 집요하다. 전시, 상영, 게제, 공연을 삭제하거나 강제로 중단시킨다. 작가 및 작품을 고소 고발하거나 체포하고, 공공지원 플랫폼에서 비판적 예술가들을 배제하고, 예산을 삭감한다. 검열의 주체 역시 위계적이다. 국가권력의 통치성을 기획 조정하는 권력의 상층부에서 검열을 주도한 흔적이 엿보이며, 문화예술의 지원기구들 내부의 자체 검열도 만연되어 있다. 이들은 검열의 주체이자 대리자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들은 스스로 검열의 주체가 되면서도 위로부터의 검열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통치자에 대한 충성경쟁으로 스스로 알아서 검열하여 든다. 예술가와 예술단체들의 자기검열도 심각하다. 공공지원을 받기 위해 검열이란 센서를 통과할 수 있는 작품을 사전에 기획한다든지, 참혹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의 표현들을 스스로 자제하려 든다. 예술계 내부의 자기 검열은 결국 예술가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예술가들이 지금 매우 우울한 것은 권력의 검열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검열의 두려움과 그로 인한 정신의 무기력증에 대한 공황 상태 때문이다. 검열의 과잉으로 집약되는 지금 권력의 상징폭력은 어쩌면 자기 정체성의 실체가 드러날 것에 대한 공포심의 극단적인 반응일 수 있다. 통치자는 검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당화하고, 허구로 구성된 자기 정체성의 폭로의 두려움을 제거하려든다.

 

그러니 검열로 인해 예술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검열은 지금의 권력, 지금의 통치자 자신의 두려움을 심화시킨다. 검열은 통치자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국립국악원 사태에 맞서 당당하게 행동하는 안무가 정영두가 페이스북에 올린 자기 고백을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제가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제가 무언가 두려워할까봐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예술가들을 겁쟁이로 만드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예술가가 두려워하면 지는 것이다. 예술가가 당당하면 오히려 통치자가 두려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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