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8호]문화연대 소식, 둘: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중간평가>(2)
문화연대·내일신문 공동기획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중간평가>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문화연대와 내일신문이 공동기획으로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이 ‘문화융성’을 실현하고 있는지를 짚어보는 공동기획 기사를 <내일신문>에 연재하고 있다.
[뉴스레터8호]문화연대 소식, 둘: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중간평가>(2)
문화연대·내일신문 공동기획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중간평가>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문화연대와 내일신문이 공동기획으로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이 ‘문화융성’을 실현하고 있는지를 짚어보는 공동기획 기사를 <내일신문>에 연재하고 있다.
[뉴스레터8호]문화연대 소식, 둘: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중간평가>(1)
문화연대·내일신문 공동기획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중간평가>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문화연대와 내일신문이 공동기획으로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이 ‘문화융성’을 실현하고 있는지를 짚어보는 공동기획 기사를 <내일신문>에 연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리얼리즘과 위기의 대학
최철웅(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최근 몇 년간 캐나다와 칠레, 영국과 유럽 등지에서 등록금 인상과 학과통폐합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투쟁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2015년 한국의 대학가도 중앙대와 건국대가 앞장서 취업률이 낮은 인문예술계열 학과를 통폐합하려는 시도를 보이면서, 학교본부와 교수·학생들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이는 구조조정 성과에 따라 지원금을 차등 지급하는 교육부의 방침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서비스를 상품화함으로써 사회적 권리를 개인적인 구매를 통해 해결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항구적인 위기의 온상으로 곧잘 지목되는 것이 연금 서비스와 대학이다. 국가의 재정지출을 줄이고, 자본을 위해 민간보험과 사교육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신자유주의적 자기책임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영역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공무원연금법개혁과 대학구조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이 두 가지 절차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두 사안 모두 구조조정이 시급한 까닭으로 인구학적 요인들이 거론되나 이는 근거 없는 위협일 뿐이며, 대학의 경우 서울지역 대학의 전임교원 1인당 평균 학생 수는 31.6명으로 OECD 국가 평균인 15.6명의 두 배에 달한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 오히려 교육환경이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셈이다. 사실상 현재 대학위기의 온상은 학벌체제로 인한 서울과 지역대학의 양극화와 교육환경 개선 없이 등록금 장사만 벌이는 사립대학들의 전횡에 있다. 따라서 올바른 개혁의 방향은 교육공공성을 강화하고, 학벌체제 타파와 지역 간 균형발전을 위해 대학의 자원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방침은 정반대로 소수의 경쟁력 높은 서울소재 대학에 자원을 더욱 집중시키고,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오류에 대해선 다소간의 합리적인 판단만으로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오히려 곱씹어 볼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학생들이 대대적인 투쟁이나 저항 없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선 20대의 정치적 주체성의 조건과 상황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리얼리즘
대학가의 구조조정에 대해 대학생들의 저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에 비치는 모습과 달리 대학 내부에서의 움직임이나 저항의 동력은 사실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학생운동 조직이 거의 사멸한 상황에서 소수의 학생들이 운동을 이끌어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관심하다 못해 저항하는 학생들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더라도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편과 같은 구조적 원인을 지목하는 경우는 드물며, 대부분 절차적 민주주의와 소통에 대한 요구에 머물고 만다. 교육공공성 담론은 여전히 겉돌고 있으며, 대개 학과통폐합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거나 막연히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할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 오늘날 대학생들 사이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현실로서 당연시되고 있다. 다만 ‘부수적 피해’를 낳기에 그 피해에 대한 구제를 요청할 뿐이다. 엘리트 지식인들의 상식과는 반대로 이들에게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현실주의’가 정치적 이상의 자리를 대체함에 따라 현 질서에 대한 저항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지녔거나 몽상적인 태도로서 치부되고 있다. 『겟 리얼―이데올로기는 살아 있다』의 저자 일레인 글레이저의 표현을 빌자면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 없음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이 새로운 현실주의의 효과는 오늘날 대학가에 팽배한 ‘반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건 학내 여성운동이건 간에 대학에서 시도되는 일체의 운동에 대해 가해지는 일반적인 비난은 그것이 ‘정치적’이라는 것, 즉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 운동의 배후에 한총련이나 민주노총 등 ‘외부세력’은 없는지, 통진당이나 노동당에 소속된 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진 않은지, ‘순수한’ 의도로 진행되는 움직임이 맞는지. 이들에게 현실은 경쟁이나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같은 순수한 경제적 힘들이 작용하는 공간이며, 이러한 원리를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일체의 시도는 ‘정치적’인 것으로 자연스러운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이 현실주의자들이 곧잘 표명하는 또 다른 우려는 ‘분열시키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학내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결국 우리를 분열시키며, 경쟁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평소에는 찾아볼 수 없던 상상의 공동체가 갑자기 출현하는 순간인데, 그 공동체가 내부의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공동체의 분열이 아니라 공동체가 경쟁에 뒤쳐져 그 피해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인 셈이다. 이들이 공동체 내의 피해자에게 허용하는 것은 특수한 이해의 추구까지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경제인이므로, 학과폐지 등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인 정치적 의제로 내세워선 안 된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정치는 곧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는 불순한 의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다른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세월호유가족들은 피해자로서 고통을 호소하고 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을 보편적인 의제로 삼아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순간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감히, 불순하게도 정치적 행위를 하려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없음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그렇다면 이들은 정치적 중립성의 강박에 사로잡혀 전형적으로 속지 않으려다 속는 자들일까? 현실주의의 초점은 관념적인 ‘중립성’이나 ‘순수함’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 놓임을 잊지 말자. 사실상 현실주의자들은 기득권에 동일시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모든 정치적 당파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에 저항하는 당파성을 거부한다. 기득권의 비리나 부패, 정치적 당파성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이 곧 현실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득권자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약자들을 혐오한다. 적자생존의 경쟁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약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실제로는 열악한 사회경제적 위치에 놓인 이들이 기득권자에게 동일시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파시즘의 선례가 보여주듯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대안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운동이나 이데올로기가 부재할 때 대중들은 기득권에 쉽게 동일시하곤 한다.
따라서 더 나은 대학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안적인 정치적 이념과 운동의 재구성이며, 그를 위해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 현실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운동과 이론이 퇴조하면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기획은 철지난 유물처럼 취급되고 있다. 대학가 담론 어디에도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된다.’는 지난 시기의 상식 또한 생경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데올로기 비판이 사라진 자리엔 탈정치화한 적나라한 ‘청춘의 민낯’을 폭로하거나 20대의 비참함과 곤궁을 안쓰럽게 묘사하는 인류학적·사회학적 탐구들이 들어섰다. 그러한 시도들은 어떤 좋은 의도로 기획되었건 20대의 주체성을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주어진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세대론’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과거 대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총체적이고 급진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학에서의 의식화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 비판’의 계기를 거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반 학생회와 학회, 세미나 모임의 소멸로 대학에서 그러한 과정을 겪기란 점점 더 희귀한 경험이 되어버렸다. 당장 서울 시내 대학 중에 학내에서 페미니즘 세미나를 접할 수 있는 대학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오늘날 20대들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이나 대항 이데올로기를 습득하기도 전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포섭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나 대학의 위기를 넘어 이 자생적인 자기-교육의 위기야말로 우리가 시급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경희대 원보, 2015. 4)
[야! 한국사회] ‘그냥’이 맞서다
권명아(동아대 국문과 교수)
결국, 그것을 봤다고 친구가 말한다.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끝까지 볼 용기가 났다고 한다. 나는 사실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아이들이 마지막 남긴 동영상 기록이다. 그 죽음을, 비참을, 슬픔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촉발한다. 인류가 존재한 시초부터 상징과 제의를 통해 그냥 그대로의 슬픔에 직면하는 고통을 완화해온 것도 그런 이유다. 상징도 제의도 없이 슬픔을 그냥 마주하는 일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그런데 그냥 그러고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와서 피켓만 들고 있다구요. 그냥 이것만 한다구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 은화의 엄마는 그냥 그러고 있다고 내내 말한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 엄마를, 슬픔을 그냥 마주해야 하는 고통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고통의 크기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유족들이 그냥 슬픔을 감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뭔가 거저먹으려 든다’고 매도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밥을 그냥 준다고 할 때는 도둑이거나 ‘종북’으로 모욕 주기에만 바쁜 실정이다. ‘그냥’은 이유를 따지고 도구적 계산을 앞세우는 입장에서 볼 때 텅 빈 무엇처럼 보인다. 그 텅 빔을 마주하는 건 또 다른 의미의 무시무시함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뒤 1년, 한국 사회는 서로 상반된 맥락에서, ‘그냥’을 마주하는 섬뜩함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어에서 그냥은 공짜나 ‘거저’와 같은 뜻이 아니다.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그냥은 단지 부사로서만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담화 표지의 기능을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냥’은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공짜라는 뜻으로 왜곡·축소되었다. 한국 사회는 ‘어떤 목적이나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그냥 인간이나 세상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했다. 있는 그대로, 그 자체의 모양을 이해하고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가치를 살피는 일이다.
슬픔과 밥이 ‘그냥’의 쓰임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밥과 슬픔을 계산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게 당연했던 삶의 흔적이 언어의 쓰임에 남아 있다. 공짜가 아닌 그냥 나누는 밥,계산될 수 없는 슬픔, 이는 인간 사회의 근원적인 영역이자 어떤 이유나 조건도 없이 모두에게 허용된 ‘공통의 것’이다. 그러니 그냥은 없고 공짜만 있는 사회란 공통된 것은 없고, 차별만 존재하는 사회이다. 근본은 없고 계산만 남은 사회이다. 결국 이 계산은 ‘목숨 값’이라는 무시무시한 조어를 낳는다.
‘그냥’의 세계를 매도하고, ‘그냥’을 나누려는 모든 움직임을 공짜나 거저 혹은 얼마인가의 맥락으로 환원해버리는 일은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심각한 상징적 폭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폭력에 맞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의 세계를 살려내고 있다.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는 무수한 이들이 그림, 사진, 플래시몹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슬픔과 분노를 나누었다. 상징도 제의도 박탈당한 채, 거꾸로 상징 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를 나누며 그렇게 사람들은 예술을 만들어왔다. 예술이 ‘무사심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공짜인가 아닌가?’만 묻는 상징 폭력에 맞서 ‘그냥 그렇게’ 하기를 계속하는 일,그것이야말로 세월호 이후 우리 앞에 도래한 ‘예술’의 세계이다. 함께 슬퍼하기를 거부하는 정치공동체(국가)와, 공짜냐 아니냐만 묻는 경제 집단을 넘어, 오늘 우리는 모두의 이름으로 그냥 그렇게 문득 출현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6989.html. 2015.4. 15)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지만 혼자 일하는 사람들 (김영선)
월간 <일터> 134호
『미생』의 장그래가 드라마 상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다. 오과장이 회식 후 길거리에서 만난 옆 팀 과장에게 “너희 애 때문에 우리애만 혼났잖아!”라며 고래고래 소리친 말에서 장그래는 ‘우리’라는 표현에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시청자는 그 우리라는 표현이 실질적인 의미의 우리는 아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장그래에게 만큼은 형식적으로라도 일정한 시간동안 특정한 공간에서 함께 티격태격 할 수 있는 그런 집합적인 관계 자체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분명 벅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에게 장그래가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던 ‘우리’라는 표현은 사실 성립되기 어렵다. 그것은 디지털 모바일 노동이 집합적이고 관계적이고 의례적인 시공간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노동과 비노동 간의 관계와 관련해 산업사회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동시간과 여타 남는 시간 간의 ‘분리’다. 대공장으로 표상되는 산업사회 이후 노동시간은 불규칙적이고 불연속적이고 성긴 형태에서 규칙적이고 연속적이고 조밀한 형태로 바뀌었다. 동시에 작업장 내에서 성기고 느슨한 시간이나 ‘낭비적인’ 요소들은 여지없이 제거되고 작업장 밖 여타 남는 시간으로 배치되어야 했다. 이것이 ‘분리’가 함축하는 바다.
그런데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간의 명확했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노동시간과 여타 남는 시간 간의 구분이 흐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양한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노동과 비노동 간 경계의 흐려짐은 산업시대 ‘표준화’를 지향했던 노동시간의 패턴이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매개로 ‘비표준화’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그 변화는 단순한 형태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공통 토대를 삭제하는 방식의 질적인 차이를 내포한다. 여기서는 그 질적인 차이를 중심으로 디지털 모바일 시대의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간의 관계가 어떻게 재구조화되는지 일별한다. 디지털 모바일 시대의 노동시간 문제는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유난히 빠르게 파급되는 한국사회에서 더욱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나아가 디지털 기술의 구조변동이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빠른 기술 변화와 동시에 급격한 노동시간의 유연화가 상동한다는 가설 아래 그 구조적 유사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공통적인 시공간의 삭제
디지털 모바일 시대 눈에 띠는 변화는 산업사회가 표상했던 표준화된 전일노동이라는 노동패턴이 전반적으로 감소한다는 점이다. 출근에서 퇴근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진 노동패턴이 아닌 비표준 형태의 노동들이 여기에 해당할텐데, 이를테면 대리운전의 경우, 콜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대리운전 기사에게 언제, 얼마동안 일하느냐하는 시간의 관리는 기존의 전일노동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퀵서비스 기사, 방문판매원, 보험설계사, 프로젝트 기반의 전문직 종사자 또한 마찬가지다.이러한 노동자들은 독특한 시간의 세계에 놓이게 되는데, 그것은 출퇴근이라는 규칙적인 리듬과는 별개로 콜 신호에 따라 이곳저곳에서 접속/해제하는 그런 비규칙적인 리듬의 세계다. 여기서 연속적인 길이로서의 전일노동은 무의미하다. 디지털 모바일 기술은 업무의 발생시점, 빈도, 순서, 지속시간, 종료시점을 재구조화함으로써 노동의 단시간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대리운전 기사는 일하는 시간을 얼마나 어떻게 쪼개든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시공간에 구속된 업무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자율적이다. 그러나 콜 신호에 따라 여기저기 이동하며 조각난 일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자율성은 허구적인 수사에 불과하다. 형식적으로는 자율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콜 신호를 받기 위해 항시 대기해야하고 여러 건수들을 알아서 꾸리고 엮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감을 따라 부초처럼 정처 없이 표류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리차드 세넷의 지적은 이와 상통한다. 이러한 노동세계에서 전일노동이라는 시간적 묶음은 진부한 것이 된다.
공간 차원에서도 디지털 모바일 노동의 질적 차이는 발견되는데, 그것은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집단적인 장소에 구속됐던 업무들이 탈공간화된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공간적 집중이 불필요해진다는 이야기다. 산업사회의 기술이 ‘작업장’의 노동시간을 표준화 모델에 따라 연속적이고 조밀한 시간으로 최대화하는데 맞춰졌다면, 디지털 모바일 시대의 기술은 노동시간의 공간성 자체를 탈각시켜 버린다.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매개된 노동에는 특정한 장소에의 구속이 더욱 불필요해진다. 온갖 생산도구 기능이 집단적인 장소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인간의 신체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개별 노동자는 비가시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로 조각난 업무들을 실행할 뿐이다. 이러한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특정한 장소에서 서로 얼굴을 맞댈 필요가 없이 비동시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디지털 모바일 기기에 연결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네트워크 상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일종의 노드 형태로 공장이나 사무실에 구속된 노동과는 상이한 모습이다. 노동의 집단적 장소성은 사라지고 오직 ‘개인화된 노동’만이 디지털 네트워크에 걸쳐져 있기에 전례 없는 수준으로 이동성이 극대화된다.
함께 쉬기의 침식
“노동과정이 장소에 묶이지 않는다.”는 말을 관계 차원에서 다시 풀어보면, ‘동일한 장소에서 함께 일하기’의 정체성이 침식된다는 의미다. 공동의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 동안 함께 일하기가 가져다주는 집합적인 경험과 감각 말이다.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적용되면서 특정한 장소에서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자체가 줄어들기에, 콜 신호에 의해 매개되는 개인화된 노동 이외에 어떤 사회적 관계도 발생하지 않는다. 동료 관계는 사라지고 콜 신호를 향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만이 작동한다. 물론 콜 신호 주변의 사회관계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간성이 요구되는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우발적이고 단속적인 ‘마주침’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의 사회관계 방식은 정주형(定住型) 관계 보다는 호텔 투숙형 관계가 일반적이게 된다. (여기에서 앞서 말한 『미생』의 인턴사원 장그래가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던 ‘우리’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 없다.) ‘결속’에서 ‘접속’으로 옮겨가는 소통 방식의 변형인 것이다. 프랑코 베라르디의 말대로 소통 과정의 디지털화는 ‘쓰다듬고 냄새 맡을 시간’, ‘공간을 위한 시간’, ‘과정에 대한 감각’을 감퇴시키고 경험의 빈곤화를 유발한다. 결국 시간성이 요구되는 ‘오르가즘’이 사라지고 즉시적이고 자폐적인 ‘흥분’으로 대체된다.
노동의 탈공간화는 또한 ‘함께 쉬기’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침식한다. ‘(업무 전) 차 한 잔 합시다’,‘(점심식사 후) 커피 한 잔 합시다’, ‘(쉬는 시간) 담배 한대 태워요?’처럼 누군가에게 건낼 수 있는 여유시간과 휴게시간이 발생할 수 없다. ‘퇴근은 언제하나요?’, ‘(퇴근 후) 소주 한 잔 합시다’, ‘올 여름 휴가는 언제로 잡아야하는지?’ 등의 표현도 성립되지 않는다. 관계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의 함께 쉬기는 사라지고 만다. ‘우리’, ‘동료’라는 표현이 발생할 수 없는 그런 노동 세계인 것이다.
경험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생겨난다. 공통의 시공간은 집합적인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인 틀을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공장지대나 의복양식, 조직의례, 이완의 시공간이었다. 이에 반해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의 경험들은 콜 신호가 뜨는 곳곳으로 쪼개진다. 문화적 동질성을 구축할 공통의 토대가 사라지면서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의 시간은 지극히 개인화된 사건과 경험들로 채워진다. 이렇게 노동의 탈공간화는 (노동일에 포함되어 있던)‘집단이 공유하는’ 공간에 대한 공통 경험, 시간에 대한 공통 감각, 다시 말해 집합적인, 관계적인,의례적인 시공간감의 사라짐을 내포한다. 산업자본주의가 ‘근면한 신체’를 주조했던 것처럼,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매개로 자본은 사회적 인간형을 새로운 방식으로 주조하는데, 그것은 ‘구체성을 잃어버린 신체’, ‘분해되는 신체’의 형태를 띤다.
미래 서사가 불가능한 삶
자연 리듬에 맞춰 작업이 진행되던 ‘업무 지향적인’ 노동패턴이 산업화 이후 시계 시간에 의해 규정된 ‘시간 지향적인’ 노동패턴으로 변화한 것이 산업사회의 결정적 특징이라면,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계기로 시간 지향적인 노동패턴은 퇴색된다. 이는 노동과 비노동 간의 분명한 구분을 의미했던 노동패턴이 ‘노동시간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건수에 따라 조각난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전환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시공간에서의 작업과정과 작업시간에 기초한 업무평가가 아니라 콜 신호로 상징되는 건수에 기초한 평가가 중요해지는 노동세계의 도래 말이다!
네트워크에 접속-이탈하는 식으로 조각난 노동을 수행하는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삶의 파편화 가능성도 일반화시킨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자신의 삶을 연속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어떤 전후 연관성도 사라지게 한다. 서사적인 인생사를 꾸려가는 게 의문시된다는 말이다. 평생 계획은 커녕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다. 오늘의 일과표와 내일의 일과표 간의 연속성을 찾을 수도 없다. ‘견고한 제도 속에서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미래 서사를 기획’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옛것이 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를 예측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노동자 개인은 수시로 자신의 인생사를 취사선택하고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기계발의 방식이든 인생2모작의 방식이든! 이러한 맥락에서 위험을 계급지위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위험 가능성이 하층에 더욱 축적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취약 노동자 개인의 생애사는 파손당하기 십상이다.
또한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안정성과 주기성을 확보하기 곤란하게 만들어 노동시간 전후의 여타 남는 시간들을 안정적으로 기획하기 어렵게 한다. 생활패턴을 엇갈리게 하는 것은 물론 가족시간을 단절시킨다. 사회관계 시간은 비동기화되면서 여지없이 쪼그라든다. 식사시간, 쉬는 시간, 여가시간, 수면시간 역시 파편화시킨다. 접속적인 노동패턴은 시간 사용의 불규칙성과 비예측성을 낳고 자율적인 시간 사용의 안정적인 주기성까지 침해하기 때문이다.
시간구조는 우리의 삶(식생활이나 일패턴부터 가족관계, 사회관계, 여가활동, 수면패턴까지의 모든 부분)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특정한 노동시간표는 여타 남는 시간을 질적으로 다르게 모양짓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디지털 모바일 기기를 장착한 노동자들에게 노동과 여가라는 산업사회의 전통적인 구분법 또는 소위 ‘8시간 잠-8시간 노동-8시간 휴식’이라는 구호는 공허하기만 하다.
위험의 개인화
디지털 모바일 기술에 따른 노동의 탈공간화는 산업사회가 요구했던 근면한 인간형이 굳이 필요치 않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본은 더 이상 출퇴근시간 같은 집단적인 규칙으로서의 시간규율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본은 시간규율을 위한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콜 신호에 따라 이곳저곳 이동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외적인 형태의 시간규율은 무의미해진다. 노동자들에게도 시간규율은 더 이상 노동통제의 수단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각했다.”, “시간을 못 지킨다.”, “점심시간이다.”, “퇴근시간이다.” 등 집합적이고 규범적인 차원의 표현들은 모두 퇴색되고, 모자이크처럼 되어버린 시간 파편들만 남게 된다. 여기서는 오직 개별적으로 분절된 콜 신호에의 시간엄수가 관건이 된다. 이는 산업사회의 집합적인 시간엄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디지털 모바일 노동의 새로운 모습은 전일노동이 담보했던 조직적 전제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전일노동 시대 기업 조직이 제공해야 했던 집합적인 보장·보호 기능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전일노동 중간중간에 배치됐던 휴게시간은 발생하지 않는다. 휴가, 상여금, 퇴직금 등의 각종 부가급여도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전자장비를 구입·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모든 비용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더욱 눈여겨 볼 점은 건강상의 위험이나 미래 불안에 대처하는 비용까지 노동자 개인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공간화된 노동패턴에서 보장·보호 장치들은 공적인/조직적인 통제를 벗어나고, 위험을 처리하기 위한 집단적인 대응에 기대기도 어렵다.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언제나 핵심 언어인 연대는 시간의 파편들 사이에서는 생겨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위험 처리 비용은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공간적인 탈중심화가 이뤄지면서 노동자는 자기노동에 대한 주권을 얻은 듯 보이지만, 동시에 이런 노동에 있어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사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해 세넷은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은 죽은 셈이라고 지적한다.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위험을 더욱 개인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매개로 더욱 두드러지는 (노동과 비노동 간) 시간 경계의 모호함은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 간의 투쟁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유시간을 손에 넣기 위한 노동의 투쟁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과 자본 간 공통의 분모가 되었던 ‘노동시간’의 척도적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시간당 얼마’라는 시간과 임금 간의 연결고리가 서서히 해체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노동의 오랜 구호는 무용지물이 된다. 오직 콜 신호에 따른 건수와 실적을 채우는 것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시간으로 환원할 수 없는 형태의 일들이다. 노동과정의 디지털화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 세계에서 시간을 파편화하는 기획들에 저항하면서 자유시간을 손에 넣기 위한 투쟁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간 투쟁은 과거 산업사회 패러다임의 노동시간 단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 이는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유난히 빠르게 파급되는 한국사회에서 더욱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신임 편집위원 영입, 축하합니다
김대성 편집위원은 현대문학 전공으로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2007년 계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고, 1980년대 노동자들의 글쓰기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생활예술모임 <곳간>의 공동대표. 평론집으로 『무한한 하나- 몫없는 자들의 문서고』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어벤저스’ 속에 그려진 서울의 생얼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개봉 4일 만에 300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외화 중 역대 최고의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천만 관객을 기록했던 ’아바타’, 인터스텔라’, ‘겨울왕국’보다 훨씬 압도적인 흥행 속도여서 역대 최고의 흥행 외화로 등극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 대박이 날 거라는 것은 이미 모두가 예상한 바이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 제작 사상 서울이 처음으로 주요 촬영 장소로 선정된 데다, 그것도 미국 역대 흥행 3위, 2012년 상반기 국내 영화 흥행 1위였던 ’어벤저스’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프론’의 국내 촬영은 작년 3월 30일부터 16일간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감독인 조스 웨던은 제작노트에서 미래도시를 상상할 수 있는 로케이션을 찾다가 서울을 촬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실제 영화 속에 배경이 되는 세빛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강남대로 등은 첨단 미래도시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그리고 마포대교, 청담대교 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도심 속 초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확 트인 상공에서 스펙터클한 액션 장면을 담아내기에는 한강만큼 매력적인 곳도 없을 것이다. 조스 웨던 감독도 마포대교 뒤로 보이는 여의도 빌딩 능선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찍기에 최고의 장소라고 말한 바 있다.
미래도시를 대변하는 영화 속의 서울은 중세도시를 대변하는 이탈리아의 아오스타벨리와는 대조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아오스타벨리는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거대한 협곡 속의 요새 소코비아라는 가상 국가로 그려진다. 그래서 미래도시 서울이 번잡하고 차가운 반면, 아오스타벨리는 수려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두 장소는 영화의 사로 다른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그래서 문제는 미래도시냐, 중세도시냐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모습, 그리고 미국의 블록버스터 영화제작자가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있다.
‘어벤저스’에 담긴 서울은 정말 제대로 그려진 것일까? 몇몇 평론가들과 네티즌들은 서울의 본 보습이 영화 속에 충분히 담기지 못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서울의 고궁, 한옥과 같은 고풍스러운 역사문화유산이 영화 속에 재현되었다면 서울의 이미지가 더 호소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서울의 정형화된 모습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가 상상하는 미래도시에 부합한다. 고층빌딩과 차로 빼곡한 도심, 바쁜 지하철 안, 첨단 IT 시설과 포스트모던한 공공 조형물이 있는 서울이야 말로, 외국인이 생각하는 서울의 정형화된 이미지이다. 물론 고궁과 한옥도 있지만, 그것은 서울 전체 모습의 일부에 불과하다. 영화 속 서울의 풍경은 스튜디오에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 같다. 서울에서 실제 촬영을 했지만, 정작 영화 속 서울은 거대한 세트장 같다.
내가 보기에 바로 그런 점이 역설적이게도 ’어벤저스’가 서울을 아주 잘 담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벤저스’에 그려진 서울은 서울의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는 다소 컴퓨터 그래픽 같은 서울의 이미지 속에서 실제 살고 있다. 세트장 같은 고층 빌딩,역사적 배려가 없는 그냥 세련되기 만한 첨단 공간들, 숨 막히는 지하철, 삶이 배제된 낡은 철재공장 지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다. 영화 속 서울의 배경이 어색해 보이는 것은 과도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 때문이 아니라, 서울의 공간 자체가 컴퓨터 그래픽 같은 비현실적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벤저스’의 서울은 솔직하고 잔인하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두 장면이 기억난다. 하나는 캡틴 아메리카가 서울 강북의 어느 판자촌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장면과 다른 하나는 토르가 마지막 장면에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캡틴아메리카의 시선 속에는 수천억을 들여 만든 세빛섬이 초점화되어 있다. 그리고 토르가 말한 ’안전’은 지금 서울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어벤저스’의 촬영 제작 지원에 들어간 39억의 공공재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은 서울의 관광효과 때문이 아니라, 두 영웅의 시선과 발화가 서울의 민망한 ’생얼’을 제대로 드러내 준 것 때문이다.
일상의 재구성 담론의 재구성
김일림 (<문화/과학> 편집위원)
세미나의 포문을 연 ‘정동의 정치학’
“문화연구는 죽었다. 그러나 다시 문화연구다.”
묘비가 세워진 자리에서 성찰과 희망이 움텄다. 그 현장은 부산이었다. <문화과학>과 부산대 인문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세미나 <한국문화연구, 지금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가 지난 4월3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부산대 인덕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김용규 부산대 영문과 교수가 좌장을, 김성환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교수가 사회를 맡은 이 세미나에는 약 50여명 이상이 끝까지 자리를 지켜서 문화연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 날 부산에서 이동연, 정원옥, 김성일 편집위원은 각각 ①<문화연구의 종말과 생성-비판이론과 담론의 재구성을 위하여>, ②<학제간 연구를 통한 ‘문화연구자’양성기획의 현주소>, ③<이론적 실천과 현실개입의 추이를 통해서 본 한국 문화연구의 궤적>을 발표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김태만(해양대 동아시아학과), 임영호(부산대 신문방송학과), 홍성민(동아대 정치외교학과), 조선령(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는 진지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풍부한 논의를 이끌었다.
이동연 편집인은 1992년 <문화과학> 출범 당시 애초 표방하던 기치가 문화연구가 아니라, 과학적 문화론이자 유물론적 문화론이었음을 언급하고, 그럼에도 <문화과학>과 문화연구가 ‘이론’을 토대로 접점을 이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나아가 이론에 대한 무관심이 피부로 다가온 2005년 이후, 문화연구의 지형이 달라졌음을 토로했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주체성의 정치학은 더 이상 문화연구에서 논해지지 않고, 제도의 확장이 역설적으로 문화연구의 종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에 그가 대안으로 내세운 것은 정체성의 정치학에 대한 현재적 재구성이다. 문화연구는 정치를 이야기하기보다 문화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다시 정치경제학으로 회귀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메타 이론을 구성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감성적 활동에 주목하는‘정동의 정치학’, ‘욕망의 정치학’, 그리고 ‘감성의 정치학’이다. 90년대 정체성의 정치학이 다루지 않았던 비물질적 노동, 인지의 문제를 문화연구의 새로운 이슈로 다뤄야 한다는 논지다.
문화연구와 학문제도의 모순
문화연구학과 박사인 정원옥 편집위원은, 문화연구자를 양성하는 대학의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생생하게 논했다. 기업화된 대학과 운동의 좌표 상실은 표리일체이며, 이러한 현실에서 문화연구학과 학생의 대부분이 전공의 모호성과 소수성의 경험으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 분과학문 체계에 비전문가로서 개입해야 한다는 한계, 그리고 모든 분야의 교수와 심사위원이 참여하는 논문 심사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심사기준이 문제되는 현실 등이 그러하다. 예컨대“이 논문을 문화연구 논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준조차 합의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전임교원의 부재, 불투명한 진로 역시 문화연구학과가 당면한 문제였다.
과연, 대학 내에 문화연구학과가 존재해야 하는가.
토론자로 참석한 김태만 교수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표명했는데,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미묘하게 달랐다. 취업률이나 사회적 효용성에 기초하여 대학이 평가당하는 현실에서 대학의 문화연구학과는 구조 조정의 잘못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구적인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진 문화연구학과가 역설적으로 대학평가에 잘못된 근거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상황에서, 이제, 문화연구는 학제로서 성공 가능한가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연구는 애초 대학 밖에서 이루어졌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문화’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서울 몇몇 대학의 문화연구학과 실태만으로, 한국 전체의 문화연구학과가 실패했다고 매도하지 말라는 의견까지. 다양한 관점이 교차했다.
이와 관련하여 임영호 교수는 “문화연구의 중요한 출발점은 간학제인데, 이게 제대로 실행이 안 된다. 같은 아파트에 400여 가구가 함께 사는 거다. 소통을 안 하니까. 학제적 접합 노력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위기라고 하면서 학제화를 추구하는 게 문제였다”라고 피력했다. 좌장을 맡은 김용규 교수는 한국의 학문 환경에 그 원인을 두었다. “정통 학문이 아니면 뿌리 내리기 힘든 것이 한국이다. 비교 문학도 한국에서는 뿌리 내리지 못했다. 문화연구 역시 그렇다”면서, 문화연구학과의 위기가 비단 신자유주의적 환경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발표자와 토론자가 다소 의견이 달랐을지언정, 그들이 일관되게 주목한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자성적으로 논한 것은 김성일 편집위원이었다.
우리의 ‘근대성’을 되돌아보자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김성일 편집위원은 위와 같은 의문을 품고 한국 문화연구의 궤적을 되짚었다. 80년대의 중심을 이루었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90년대에 한국 사회에 등장한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그리고 신자유주의 비판까지. 그는 이론적 검토와 함께 서울문화연구소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당시의 삶이 즐거웠고 뿌듯했으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는 “문화백수로 있으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던 그 기분이 지금 신진 연구진에게 있는가? 또 지금 40-50대들의 자리를 충원할 수 있는 새로운 인력들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이 시점에서 다시 대두되는 것이 대중문화의 정체성이다. 이제 ‘좋아하는 것’과 ‘비판적으로 회고하는 것’을 구분하고, 지적인 상상력으로 과거를 돌아보자고 주장했다.
김태만 교수가 김성일 편집위원에게 던진 문제제기는 현실적이고 날카로웠다. ①서울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가? 지역성 자체가 사고 영역에 내재하지 않는다. ②문화운동(연구)의 정치적 무력함은 문화연구와 실천의 무력함인가? ③문화연구자의 고령화는 문화연구의 제도화가 아닌가? ④토착적 이론 형성과 이의 세계로의 발산에 대한 입장. 즉, 서구 이론 수입을 넘어서 토착 이론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은가?
이에 김성일 편집위원은 먼저 지역성, 교류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토착 이론 형성과 새로운 문화연구를 근대성 모색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근대의 형성 고찰이 한국적 이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김태만 교수의 지적에 동의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 속에서 이론과 실천은 괴리된 것이 아니었고, 늘 함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조선령 부산대 교수는 운동권의 종말과 대중문화의 도래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에 주목하면서“문화연구를 80년대의 문화예술운동의 테두리에서만 사고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표했다. 문화는 단지 이데올로기의 표현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므로, 문화에 대한 내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화는 하나의 자료로서 접근하면 안 된다. 적어도 문화연구자는 그 내재적 작동방식을 보아야 한다. 결론을 예증하는 사례로 격하시키면 안 된다”는 요지다.
‘문화연구’의 현실 참여 vs. ‘문화연구자’의 현실 참여
임영호 교수는 암묵적으로 동일시되고 있는 ‘문화연구’의 현실 참여와 ‘문화연구자’의 현실 참여를 구분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동시에 한국의 문화운동은 실천이 강하지 못 했다고 평했다. 스튜어트 홀의 경우, 정치적인 참여는 접었지만, 그의 이론은 수십 년 동안 매우 시의적이고 구체적으로 현실에 개입했다. 대처리즘 등장을 예고했고, 새로운 권위주의적 대중주의 등장 예견했다. 임영호 교수는 스튜어트 홀을 통해서 이론과 실천의 밀접한 관계를 보았다. 일관된 이론의 힘, 현실 국면 분석이 문화연구의 현실참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묘비가 세워진 이 자리에서, 그가 생각하는 문화연구의 역할은 무엇인가.“스튜어트 홀은 문화연구를 정의 말라, 학제화하지 말라, 체계화하지 말라고 했다. 문화연구는 이론적인 체계화, 학제화가 아니라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홀은 식민지 좌파 흑인으로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론을 체계화의 대상이라기보다 현실에서 문제를 얻는 해답을 얻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론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걸 못했다는 점이 이번 세미나 주제에서 중요한 문제이다.”임영호 교수가 주목한 것도 결국 ‘우리의 현실’이다.
이론의 계보를 따라가고, 마르크스의 결정론을 부정하기 위해 비결정론을 보지만,‘왜’ 그런가는 설명 안 한다는 것이다. 70-80년대 마르크스를 읽었으나 소외를 피부로 못 느꼈다면,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소외를 피부로 느끼는데 그것을 아무도 이야기 안 한다는 지적이다.
홍성민 교수의 주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어려운 이론에서 벗어나서 일상의 쉬운 언어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다.“일단 우리 문제를 던져놓자. 공부 안 한 사람이 알아듣게 하자”는 것이다. “1968년에 들어서 유럽 사회는 내셔널 프리덤 말고 일상생활에서 나를 지배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생활세계에 대한 지배성 각성. 한국사회는 아직 68 정도 수준의, 시빌 저스티스 등이 아직도 해결 안됐다. 내셔널 문제도 아직 해결 안 된 것이다. 들뢰즈, 푸코 등이 아직 와 닿지 않는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라고들 하는데 사실 그 문제가 아닌가?”지금도 여전히 안보논리와 경제논리가 확고한 현실에서, 우리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연구는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모색 과정 자체라고 생각한다. 무언의 침묵을 깨자”, “제도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제도의 안팎에서 문화를 연구하는 그 전체상이 바로 문화연구다”라는 코멘트로, 김용규 교수는 이날 세미나를 정리했다.
공유되고 연대되어야 할 현장성
부산 세미나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토론자들의 진지한 문제제기와 참여자들의 열기였다.김용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문화연구와 <문화과학>의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문화과학>을 매개로 많은 비판이 나왔다. 그 비판에 애정과 진지함, 그리고 학문적 고뇌가 담겨있었음은 물론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부산 세미나장에서 <문화과학>이 이방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날 발표를 한 <문화과학> 편집위원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풍부한 현장 경험자들이었다. 그들의 현장성은 왜 공유될 수 없었는가.‘문화연구’의 현실 참여와 ‘문화연구자’의 현실 참여를 구분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론’과‘현실’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정교화 하는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과학>이 이방인이었던 이유는 단지 지역성의 문제로만 귀결되지 않을 것이다. 공유되어야 할 문제의식, 현장, 이론, 일상의 문제다. 피부에 와 닿는 문제. 그래서 다시 제기되는 것은 연대와 공유다. 김용규 교수의 말을 또 한 번 가져오자면“먹고 사는 문제가 곧 문화의 문제다.” “70대 하층민은 왜 계속해서 새누리당을 뽑는가? 왜 부산에서는 새누리당을 오래 지원하는가?”를 다뤄야 한다.
결국 인간의 문제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 감성, 정동을 토대로, 현실을 사유하고 성찰하고 문제의식을 가다듬자는 것이다. 이동연 편집인은 “15년 넘게 문화운동을 해왔는데,현실과 이론의 문제로 들어가면 정세적인 문제에 대해 분석할 필요성을 현장에서 많이 발견하게 된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론 지향이라는 지적에 대해 공감한다. 동시에 이론은 노동,폭력, 권력의 문제를 야기하는 구조를 발견하고 폭로하고 제도적 방기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 운동, 임금 운동에 대해서도 문화연구가 할 일은 많다. 그래서 담론을 재구성하자는 것이다”라고 마무리했다.
요컨대 문제는 우리의 현실, 일상의 재구성으로 귀결된다. 일상은 대개 거대한 비일상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개나리를 떠올리게 하던 노란색 스카프가 세월호 이후에 정치적 의미가 된 것처럼. 그래서 부산 세미나에서 길어 올린 키워드를‘일상의 재구성 담론의 재구성’으로 갈무리하고자 한다.
◆권명아
5월 8일, 교토의 코리아연구 컨소시엄에서 <한국에서의 혐오 발화의 역사적 원천과 그 전개>라는 주제로 발표함.
◆노명우·오혜진
4월 17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3회 안전과 생명윤리 포럼-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노명우 편집위원이 발표자로, 오혜진 편집위원이 토론자로 참여함.이광석
문화연대와 예술행동공부단 주최로 5월 6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저자 이광석과 함께 하는 “Book+Talk+뉴아트행동주의”>에서 발표함. 박활민(삶디자이너), 이원재(문화운동가), 이하(미술작가), 임정희(연세대학교 교수), 차지량(예술가) 등이 ‘저자와의 수다’에 참여.
◆이광석
문화연대와 예술행동공부단 주최로 5월 6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저자 이광석과 함께 하는 “Book+Talk+뉴아트행동주의”>에서 발표함. 박활민(삶디자이너), 이원재(문화운동가), 이하(미술작가), 임정희(연세대학교 교수), 차지량(예술가) 등이 ‘저자와의 수다’에 참여.
◆이동연
4월 22일 문화연대/서울연구원 주최, 예술인을 위한 서울플랜 토론회에서 발제
4월 23일 한국도시설계학회에서 <세운상가군> 포럼에서 ‘동아시아 전자상가 비교연구’ 주제로 발표
4월 29일 문화도시연구소에서 <예술이 도시를 만나다> 주제로 강연
5월 8일 오전 10시 <세운포럼> 5월 세미나 참여 예정
5월 18일 카이스트에서 <문화자립과 어소시에이션 운동>주제로 특강 예정
◆천정환·정원옥
4월 28일, 중앙대에서 열린 <자유인문캠프 오픈토크05-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천정환 편집위원과 정원옥 편집위원이 강연자로 참여함.
이광석의 『뉴아트행동주의: 포스터미디어, 횡단하는 문화실천』(안그라픽스, 2015)
<문화/과학> 편집위원이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 전공 교수인 이광석이 『뉴아트행동주의: 포스터미디어, 횡단하는 문화실천』을 펴냈다. 이 책은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안그라픽스, 2010), IT Development in Korea: A Broadband Nirvana?(Routledge, 2012), 『디지털야만: 기술잉여, 빅데이터와 정보재난』(한울, 2014)에 이은 그의 네 번째 단독 저서다. 그는 그 동안 테크놀로지, 미디어·예술행동주의, 문화의 정치경제학, 디지털 공유지, 빅데이터 감시 등을 주제로 꾸준한 연구 작업을 해왔다. 『뉴아트행동주의』는 국내에서 주목할 만한 미디어 저항과 비판적 예술·문화의 사례를 면밀히 살펴봤다는 데 의의가 있다. 즉 이 책은 “현실 개입의 사회미학적 관점 아래 기술·미디어와 창작 실험을 좀 더 긴밀하게 접합하는 문화실천의 경향을 이론화하고 그것의 사례 발굴을 국내 현장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독자적 의의를 갖는다.”(24)
『뉴아트행동주의: 포스터미디어, 횡단하는 문화실천』은 최근 한국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예술창작과 미디어 표현의 비판적 흐름을 주목한다. 특히 체제 권력에 틈입하는 국내 창·제작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예술행동, 문화간섭, 행동주의, 대안미디어, 전자저항, 자가 제작문화 등 다종다양한 실천을 ‘뉴아트행동주의’라 정의하고, 기술과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문화실천의 지적 계보를 살핀다. 동시대 미술, 디자인, 문화, 미디어 영역에서 활동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과 주권 공간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행보를 통해 우리 문화실천의 새로운 지형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1. 문화실천 논의의 새로운 방향
-뉴아트행동주의: 전술미디어의 역사적 유산
‘뉴아트행동주의’에 대한 총론이자 이론을 담은 장으로, 서구의 문화실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 ‘전술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영역과 경계를 넘나들며 저항의 다채로운 실험과 실천정신을 사유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몰락 이후 1990년대 중반 북유럽을 중심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던 비판적 문화실천이자 미디어운동의 새로운 도발적 흐름, 이른바 전술미디어의 이론적, 역사적, 실천적 경험으로 ‘예술’ ‘미디어’ ‘온라인’을 가로지르는 문화실천의 계보를 정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실천의 지형과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전술미디어란 특정한 정치 이슈와 관련해 예술행동, 문화간섭(cultural jamming), 대안미디어운동, 전자저항을 가로지르며 미디어 수용 주체들이 현대자본주의에 따른 삶권력(bio-Power)’의 파동으로부터 자신의 주권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문화실천과 현실 개입의 운동을 지칭한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전술미디어의 진화는 운동의 횡단형 계열체를 만들어내면서 서구 문화실천에 여러 실천적 울림을 남겼다. 반면 우리의 문화실천은 여전히 예술-문화-언론-정보운동이 상호 서로 단절되어 각자 도생하는 지형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13~14)
“또 하나 이 책의 핵심은 역사적으로 유럽 전술미디어의 유연한 문화실천 경험과 유사하게 국내 지형에서 몇 가지 유사한 징후를 드러내는 사례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국내 미디어 작가, 문화 기획·매개자, 소셜웹 등 문화미디어 행동가들이 지닌 사회·문화적 관심사와 그들의 문화실천적 행동의 경향을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정리했다. 나는 이 같은 전술미디어적 국내경향을 ‘뉴아트행동주의(new art activism)’이라 칭한다.”(14)
2 뉴아트행동주의의 열여덟 창작 실험실
-표현의 자유와 시각적 상상력의 복원
자유로운 상상을 억제하는 권위에 저항하고 속박의 정치를 치받으며 온·오프라인 정치 패러디, 풍자, 벽낙서, 포스터 작업 등 다양하고 재기발랄한 표현의 자유를 예술행동의 의제로 삼는 미디어 작가들을 소개한다. 여기에 담은 이들의 창작 작업에서 억압 논리의 조악함, 비상식의 사회상, 정치적 낙후와 코미디가 주는 현실, 엄숙주의에 대한 도전을 충만한 패러디와 해학으로 재해석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하(포스터아티스트), 김선(실험영화감독), 구헌주(그라피티아티스트), 조습(시각예술가), 문형민(시각예술가), 연미(시각미술가)의 작업이 소개된다.
-온라인 소셜 가치와 뉴아트행동주의
사회적 개입의 쟁점들이 온라인의 ‘소셜’웹과 접붙는 경향에 주목한다. 소셜미디어란 기술적 현상이 어떻게 작가들이 추구하는 개입의 미학과 접목되는지에 대한 관찰이다. 사회적 캠페인과 프로젝트를 펼치고 온라인상에서 공유하고, 한국사회에 개입하는 방법을 소셜웹에서 찾는 등 각각의 창작 활동과 온라인 활동의 연계성을 눈여겨본다. 배인석(시각예술가), 양아치(미디어 아티스트), 강영민(팝아티스트), 홍원석(커뮤니티아티스트), 차지량(미디어아티스트), 윤여경(인포그래픽디자이너)의 작업이 소개되고 있다.
-자립형 기술문화의 탄생
예술 개입의 경험들이 자립 기술문화 등과 결합하면서 좀 더 실험적인 제작문화운동으로 성장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 흐름은 체계적 권력에 의해 ‘읽기문화’에만 길들여져 삶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주체성 회복의 ‘쓰기문화’를 독려하는 개입의 미디어 기술문화 경향에 해당한다. 촛불소녀 캐릭터를 만들거나 선물경제 문화를 실험하며 삶디자인 운동을 펼치고, 목공 등 자작문화를 통해 잃어버린 손의 감각을 익히고, 대안적 플랫폼 개발을 통해 자립형 예술가들의 생존력을 기르고, 예술청년들의 생존적 대안 공간을 실험하는 등 주류적 관성에 저항하는 발상전환의 예술적 흐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박활민(삶디자이너), 청개구리제작소(크리티컬메이커), 길종상가(생활제작디자이너), 최태윤(전시기획자), 와이피(캐릭터아티스트), 김영현(문화기획자)의 작업이 소개된다.
『뉴아트행동주의』는 포스트미디어 시대, 아방가르드 전통을 계승하는 창·제작자들의 새로운 문화실천을 엿보고 그 함의를 꼼꼼하게 짚어낸 작업이다. 이광석은 왜 3년에 걸쳐 이 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던 것인가? 「나오는 글」의 한 구절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해준다.
“테크노 자본의 파장에서 이탈하거나 탈구하는 주체의 형질 전환이 저항의 단초가 되어간다. 저항의 파장을 일으키며 자생적으로 흩어지고 모여 분출하는 디지털 수용 주체들의 “처음부터 무수한 중심들”, 이들이 바로 대안사회를 구성하는 출발이자 희망이다. 체제에서 탈구된 나쁜 주체들이 꾸미는 미래 기획의 개념과 언어들로부터 대항권력의 구체적 그림을 그려보는 일을 시작할 때다.”(385)
( 이 글은 출판사의 책 소개를 참조하여 편집부가 재구성하였음)
『뉴아트행동주의』를 다룬 기사입니다.
(디자인 정글)
http://magazine.jungle.co.kr/cat_magazine_special/detail_view.asp?table=hotnissue&master_idx=112&menu_idx=314&main_menu_idx=81&sub_menu_idx=83&pagenum=1&temptype=5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8798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