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4호] 85호 발간사 & 보도자료

발간사

 

우리는 새로운 봄이 오기 전에 의회정치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을 목도했다.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는 2월 23일에 시작해서 8일간 192시간 25분 동안 진행되었다. 특정한 입법 사안을 놓고 법 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무제한 토론을 벌일 수 있다는 제도가 대한민국 국회에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온갖 비난과 욕설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정회되기 일쑤였던 국회 의사당에서 이런 신성한 토론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벌어졌다는 것도 신기했다. 의원들끼리 서로 멱살 잡으며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비민주적 의회정치의 몰골을 TV로만 보던 국민들이 이 낯선 필리버스터의 토론현장이 정녕 우리 국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매우 희귀한 사거이기 때문이다. 곧바로 필리버스터의 민주주의 정치를 물 타기하는 행동이 이어졌다. 합법적이고 절실했던 필리버스터를 놓고 곧바로 여당 의원들은 총선 홍보용 선거 전략이라고 비난하고, 종편과 우익세력들도 이에 동조하여 필리버스터 죽이기 행동에 가세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온전하지 못한 몸을 이끌며 10시간 18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했던 은수미 의원을 향해 한 여당 의원은 “그런다고 공천 못 받아요”라고 비아냥거리고, 한 종편의 아나운서는 장시간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지저귀를 찾다”고 조롱 투의 여성비하 막말을 하는 상황을 마주하면 우리는 ‘숭고한 필리버스터의 희망’은 커녕 곧바로 한국의 의회정치와 우경화된 막말 방송의 현실로 귀환한다.

 

그래도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는 계속되었고, 시민들도 국회 앞에서 테러방지법의 저의와 예상되는 폐해들을 고발하는 시민 필리버스터를 진행하였다. 한국의 의회정치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자유 직접 화법 형태의 토론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당은 총선의 물리적 일정을 이유로 들어 여야가 합의한 공직선거법을 신속하게 처리할 것을 압박하며, 필리버스터의 중단을 주장하는 여론몰이를 했고, 야당 지도부는 총선 국면에서 역풍을 우려하여 서서히 출구 전략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시민사회 단체와 야당 일각에서는 총선을 연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민들이 열렬히 지지하는 ‘필리버스터라는 토론 민주주의’를 이어갈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결국 야당은 8일 만에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고 공직선거법과 테러방지법의 국회통과를 막지 못했다. 테러방지법은 독소 조항 하나 고치지 못한 채 통과된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을 저지하는 정치적 바리케이트가 되지 못하고, 단지 8일간 지연시키는 시한부 장애물 정도로밖에 되지 못했다. 의회정치 장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된 8일간의 필리버스터는 결국 의회정치의 장의 한계를 절실하게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의회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필리버스터의 국면을 지켜보면서 작년 문화예술계의 가장 뜨거운 토픽이었던 신경숙 표절 사건과 그로 인한 문학권력 논쟁들의 전개가 필리버스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소설가 이응준의 신경숙 표절 제기 글은 한동안 깊은 동면 상태에 있던 비평의 비판적 장을 다시 일깨웠다. 비평과 비평가들은 일제히 신경숙 표절의 심각한 문제들을 다시 거론하며 논쟁의 불씨를 당겼고, 신경숙 표절의 배후에 있는 ‘창비’와 ‘문학동네’와 같은 대형 문학출판사들의 권력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신경숙씨는 논란이 있고 한참 지난 후 지면 인터뷰를 통해 애매하게 사과했고, 잠정적인 절필을 선언했다. 창비와 문학동네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편집인과 편집위원 교체 등으로 쇄신책을 발표했다. 신경숙 표절 논쟁에서 도덕적, 윤리적 우위를 지닌 비판적인 비평과 비평가들은 이 국면에서 문학권력에 일부 변화를 일부 이끌어내고자 분투했다.

 

그러나 비평의 공세에 이기기 못하고, 스스로 자구책을 제출한 창비와 문학동네의 일부 변화의 움직임이 과연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의 표절 국면으로 대변되는 한국 문학의 당면한 많은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여전히 창비와 문학동네로 대표되는 한국문학의 지배적 장은 깨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오래 동안 안고 있던 폐부를 도려냄으로써, 그 권력의 재생산은 가속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의회 정치의 한계를 깨기 위해 시작된 필리버스터가 의회정치의 벽을 더 공공하게 만들었듯이, 신경숙 표절 사건에 개입하는 수많은 비평과 비평가들이 근본적인 문학의 장에 대한 자기내파를 하지 않는 이상, 표절사건에 개입한 비판적 비평들은 문학의 지배적 장을 더 공고하게 만들어 주는 양심적인 시멘트 역할에 머무를지 모르겠다.

 

『문화/과학』이 85호 특집을 ‘비평전쟁’이란 다소 도발적인 주제로 선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경숙 표절 논란으로 촉발된 비평의 비판적 기능과 비평가의 실천적 임무를 문학의 장에서만 머무르지 말고 문화와 비평의 장 전체로 확대하는 것이 중요해 졌다. 텍스트의 물신화와 비평 위기는 비단 문학의 장에서만 벌어진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장 전체에 걸친 문제이다. 우리는 최근 신경숙 표절 사건을 통해 촉발된 문학 장의 위기와 문학권력의 비판에 대해 지금 비평이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현재 비평이 처한 일반적 위기는 무엇이고, 비평은 왜 더 이상 읽히지 않고, 본격 비평은 왜 대중에게 외면당하며, 사회적 재난과 정치적 파국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비평전쟁’이란 이름으로 집약했다. 비평전쟁이란 언어는 비평이 텍스트에 벌이는 전쟁, 논쟁의 반대파를 향한 전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평전쟁의 실제 의미는 비평에 대한 비평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비평의 외부를 향해, 즉 창작과 출판의 이념과 권력을 향해 치열한 논쟁을 하겠다는 것은 비평전쟁에서 국지전의 형태에 불과하다. 비평전쟁의 전면전은 지금 우리 시대 비평의 존재, 기능과 역할, 새로운 실천에 대한 자기로부터의 싸움에서 시작된다. 즉 비평전쟁은 비평에 대한 비평의 전쟁, 즉 메타비평적 투쟁을 의미한다. 이번 특집에 실린 5편의 글은 모두 신경숙 표절 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그 방향과 결론은 기존의 비평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동연의 「비평전쟁 시대의 메타비평 메뉴페스토」는 이번 특집의 문제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글로, 현재 비평의 위치를 재정립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신경숙 표절 논란에서 비평이 해야 할 일은 표절의 객관적 근거를 밝히고, 그 배후의 문학권력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비평은 문학과 문학비평의 장에 대한 자기 내파와 새로운 대안적 장을 형성하기 위해, 상실된 비판의 복원과 상상해야 할 새로운 비평의 위상과 역할을 물어야 한다.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하며, 문학 장에 대한 자기부정의 미적인 근거를 찾아야 하며, 비평의 급진적 상상력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논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비평은 달라진 비평 장의 환경과 문화생태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인지적 지도그리기와 혐오, 증오, 분노, 배제, 공포의 감정에 휩싸인 우리 사회의 정동적 전환의 정치경제적 맥락에 대해 간파해야 하며, 재난과 파국의 지형의 토폴로지를 분석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비평의 위상과 실천을 재구성하는 메타비평적 선언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러한 메타비평의 메뉴페스토는 “전쟁과 폭력으로부터의 위협, 재난을 더 재난스럽게 만드는 통치술, 사회적 안전망이 거세된 일상의 위협들, 차별받고 배제된 사람들, 인권 없는 인권자들, 세월호를 비롯해 사회적 재난의 국면에서 잊혀져가는 피해자들,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에 희생되고, 국가의 검열로 창작의 권리가 박탈당한 예술가들의 현실”에 맞서는 싸움이다.

 

정원옥의 「권력과 문화자본으로서의 비평의 문제들」은  『문화/과학』 일부 편집위원들이 이번 특집 주제를 위해 별도의 집담회를 마련하여 토론한 내용들을 대표 집필한 글이다. 이 글은 “비판적 기능을 담당하는 비평권력이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고 할 때, 비평의 기능 회복을 위한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문학, 미술, 영화, 국악 분야에서 내재된 권력과 비평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미술계, 문학계 등의 대안적 행동에 대해 주목하고, 비평의 자유로운 발언과 공론장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오혜진의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은 이번 특집 글 중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글이다. 그녀의 글은 신경숙 표절 논쟁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했던 많은 기성 평론가들과는 매우 다른 입장, 즉 비판적 여성주의, 소수자주의, 반계몽주의, 반문학패권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오혜진은 2015년 신경숙 표절 논란에서 재론된 문학권력론은 “1990년대의 문학(장)이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침윤되면서 정당한 사후평가를 받지 못한 채 폭력적으로 청산된 것들, 즉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며, “이들이 기억하는 신경숙과 창비의 성장과정은 ‘진보적 가치’의 보루였던 한국문학이 ‘변절’ 혹은 ‘타락’한 시간과 겹친다”고 본다. 2015년 문학권력론이 다시 제기된 내면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문학권력론의 두 입장들이 “여전히 차세대 ‘에이스’ 발굴에 골몰한다는 점, 즉 세계문학‧노벨상‧영화화 등의 강박을 통한 가부장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욕망을 공유” 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장편대망론’은 바로 이러한 586세대의 낡은 공통감각이 공모해 만든 지배적 문학규율이었으며, 여기에 깃든 정치적 무의식은 명백히 1990~2000년대 문학사의 젠더화와 타자화를 통해 586세대의 노스탤지어와 정통성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한국문학의 현실을 “‘수준미달’의 작가 신경숙 및 상업주의와 결탁한 창비의 ‘타락’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딘지 전가의 혐의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요즘 젊은 독자들이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와 같은” 한국문학의 퇴행의 총체를 ‘K-문학’이라고 냉소적으로 명명하는 사태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K문학’은 시장패권주의와 결합된 한국문학의 부정적 성격 전반에 대한 종족화를 경유함으로써 ‘한국문학’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조롱의 기표로 활용”되고, 바로 이것이 “21세기의 독자들이 ‘개저씨’들의 K문학/비평 복권에 냉담한 이유”라는 것이다. 오혜진은 “‘타락’한 한국 문학장을 ‘계도‧정화’하기 위해 비평의 권위가 ‘회복’돼야 한다는 관점은 여전히 20세기적 계몽주의 프레임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젊은 독자들을 위한 새로운 독자론의 구성, 문학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젊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한국 문학 장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세대의 비평적 감수성을 갖고 있는 오혜진의 글을 일독하길 권한다.

 

오창은의 「비평논쟁과 재현의 정치」는 한국 문학 및 문화사에 존재했던, 비평의 논쟁사를 거론하면서 비평논쟁이 공론장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기를 희망한다. 그는 1920년대 김환의 소설 「자연의 자각」을 놓고 벌인 염상섭, 김동인의 논쟁, 1970년대 미술계에서 발생한 이응로와 남관의 ‘창작과 모방’ 논쟁, 그리고 1990년대 문학평론가 김영혜와 영화평론가 유지나가 펼친 「그대 안의 블루」를 둘러싼 해석 논쟁들을 소개하면서 각각의 논쟁들에서 제기된 비평과 재현의 정치, 한국적 예술과 세계적 예술의 모순, 비평장의 폐쇄성과 전문가주의의 문제들을 지적한다. 그는 현재 비평논쟁이 위축된 이유에 대해 “문화예술의 제도화에 따른 폐쇄성의 강화”, “매체별로, 학회별로, 혹은 소속된 에콜 의 진영 안에서만 미치는 영향력”, “비평 담론의 약화와 텍스트 중심주의의 고착화”로 진단하면서, 폐쇄적 제도화와 텍스트 중심주의 비평의 폐해, 공론장의 쇠퇴를 극복할 수 있는 메타비평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강신규의 「하위문화 비평의 궤적과 방향: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비평을 중심으로」는 수용자의 영역에서는 활발한 한국 하위문화에 비해 그 장을 다루는 하위문화 비평이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럼에도 지속돼야 할 필요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속돼야 할지를 그동안 그것이 그려온 궤적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그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분야의 비평 현황을 점검하면서, 하위문화 비평의 위축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독창적 이론 및 방법론의 연구”, “비평의 역할에 대한 재정립”, “자유롭게 비평을 생산·배포·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비평 공론장의 형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번호 기획의 주제는 예술검열이다. 박근혜 정권 들어 심화되고 있는 예술검열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로 미술계와 국악계에서 야기된 예술검열의 사태와 문화행정의 파행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먼저, 박찬경의 「최근 미술계에서 있었던 검열사태를 보며」는 자국 스페인에서 예술검열의 혐의를 받았던 전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의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임 관장 임명을 놓고 미술계가 벌인 반대 행동에 참여하면서 갖게 된 예술검열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지난 이명박 정권과 현 정권이 문화예술계에서 하고 있는 검열의 행위는 “검열 자체가 목적 이라기보다는 효과적 억제”를 목적으로 하는 “검열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두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 기능하는 권력의 관리술이다. 이밖에 예술검열 사태를 진단하는 두 개의 좌담은 특히 국악계와 공연예술계의 예술검열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국립국악원 검열과 국악권력,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벌인 좌담과 정영두 안무가와 일본 예술가들이 함께 토론한 한국의 예술검열에 대한 토크쇼는 검열에 침묵한 국악계의 적나라한 권력의 문제와 한일 양국 예술가들이 검열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제 13회 북 클럽은 영문학자 오길영 교수의 신간 『힘의 포획』(산지니, 2015)을 선정하여 천정환 교수의 사회, 최진석 교수의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오길영 교수는 이 책에서 “근대미학이나 예술론의 한계를 살펴보려는 욕심이 있어 재현론, 반영론, 리얼리즘론 등의 쟁점들을 다시 따져보고” 종래의 재현론을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번호 문화현실분석은 최근 우리 사회와 문화의 장에서 제기된 주요 이슈들을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먼저 최소연의 「테이크아웃드로잉, 희생으로서의 예술」은 도시 젠트리피케이션 재난의 최전선에 위치한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임차인으로서 그녀가 겪은 재난과 유배의 시간들의 의미들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다. 그녀는 삶과 예술의 터전이었던 곳이 하루아침에 재난의 현장이 된 상황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지금 현대판 유배를 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집에 있을 수 있고, 내 집에서 나갈 권리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나에게 이 공간에서 나갈 권리가 주어져 있지 못하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공간 혹은 장소 혹은 집이라고 얘기 할 수 있는데,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를 나가는 순간, 여기를 부당하게 빼앗길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나는 잠시도 이 공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불안정한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여기를 유배지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재난의 상황을 인정하고, 이 상황을 막을 수 없다면, 당당하게 예술이 어떻게 자본의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자가 되는 지를 기록할 것을 다짐한다.

 

조선령의 「복면의 문화정치학」은 “오늘날 세계를 떠돌고 있는 여러 이미지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자주 띄는, 설명하기 어렵고 매우 특이한 이미지 하나”가 바로 복면 혹은 얼굴가리기의 이미지임에 주목하면서. 최근 논란이 되었던 일명 ‘복면금지법’에 저항한 예술행동과 메르스 사태에서 많은 시민들이 사용한 마스크 등 우리의 일상에서 낮설지 않은 복면착용의 사례들을 분석한다. 그녀가 보기에 복면과 가면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복면은 벌거벗은 생명의 반대편에 있는 고전적인 가면이 아니다. 오히려 복면은 가면의 안티테제이다.” “가면이 하나의 페르소나라면 복면은 그 어떠한 정체성도 없는 순수한 차단막 그 자체이다.” 그런 점에서 복면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요하는 가면과는 다르게 정체성 자체를 삭제한다. 복면이 우리사회의 문화기호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생산하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 때문이다.

 

헬조선의 문화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김학준의 「질식의 예감」은 소위 ‘국까론’이 헬조선 담론에 미친 영향을 주목하면서, “자기혐오이며 동족혐오인 국까론은 한국사회가 그 동안 발전의 감정적 원천으로 동원해온 애국심이 파탄났다는 사실을 담담히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헬조선의 담론은 “어떤 책임도, 현실감각도, 비전도 없고”,  “명백한 죽음에의 공포가 온몸에 와 닿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질식감이, 헬조선의 진정한 멘탈리티”임을 이 글은 말하고 있다. 최근 웹툰의 문화적 붐과 그 재현적 성격을 분석한 박범기의  「웹툰, 사회적인 것을 재현하는 대중매체?」 는 최근의 웹툰의 창작 경향을 “소셜 웹툰”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적절한 환상을 만들어 그 환상 안에 자족하게 만드는 데서 나아가 직접적으로 사회의 모습을 당면하고 재현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웹툰은 기존의 대중매체가 사회적인 것들을 다뤄왔던 방식과 다른 형태로 사회적인 것들을 재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근대성 연구는 이번호부터 세월호 2주년을 맞아 ‘재난과 근대성’을 주제로 1년간 연재할 계획이다. 제일 먼저 기고한 이기훈의 「사고와 재난의 근대성 1 – 해상교통」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해난 사고들을 리뷰하면서 그때의 재난의 사고가 지금과 매우 흡사한 면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일제하의 해난 사고들을 통해서 한국의 근대에서 재난과 사고들의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안쪽을 들여다보도록 하자”는 것이 이 글과 이 연재의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이론의 재구성은 두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정치철학연구자이자 전문 번역가인 김상운의 「평등과 차연 sive 민주주의와 타자: 랑시에르의 데리다 비판 재검토」는 글의 제목대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데리다 비판을 분석한 글이다. 랑시에르는 자신의 민주주의 개념을 축으로 데리다에 대한 두 개의 글을 영어로 내놓았는데, 「민주주의는 무엇을 뜻하는가?」와 「민주주의는 도래해야 하는가? : 데리다에게서의 윤리와 정치」가 그것이다. 이 두 개의 텍스트들에서 랑시에르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전개하며, 자신의 민주주의 개념을 데리다의 그것과 구별하고자 한다는 점을 이 글은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수유너머 N 연구원인 이종현의 「시빌리테의 예술, 예술가로서의 시민」은 시민권의 새로운 구성에 천착했던 에티엔 발리바르가 예술과 정치를 사유하는 방식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발리바르는 시빌리테를 예술과 정치의 접근지대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가  「정치의 세 개념」에서 제안하는 시빌리테는 정치의 타율성의 타율성, 즉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주체를 낳는 방식, 또는 조건들이 주체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임을 강조한다.

 

『문화/과학』은 국내 유일의 문화이론 전문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앞으로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자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 먼저 함께 책을 만들고 있는 편집위원들의 역량을 지금보다 더 살리기 위해 다음호부터는 책임편집위원 제도를 만들어 해당 편집위원이 책 발간 일체를 책임지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 당장 다음 86호의 특집주제인 ‘이데올로기와 정동’은 김성일 편집위원이 맡을 예정이고, 90호까지 특집주제와 책임 편집위원을 미리 선정하여 장기기획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실무운영 간사를 두어 편집회의 ‘북클럽’, ‘독평회’ 행사를 체계적으로 운영할 계획이고, 후원독자를 적극 확대하여 독자 대중들의 폭을 지금보다 훨씬 넓힐 것이다. 『문화/과학』 후원 독자들의 변함없는 격려와 지지를 당부 드린다.

 

반가운 소식 하나 전한다. 수유너머 N 연구원이자 이화여자대학교 탈경계인문학 HK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최진석 선생이 신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러시아 국립인문대학교에서 문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진석 선생은 비판적 문화연구의 이론적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85호 발간에 앞서 올해 2월로 중앙대학교에서 정년퇴임 하시는 강내희 선생님에게 감사와 축하의 말을 편집위원들을 대신해 전하고 싶다. 아시다시피, 강내희 선생은 『문화/과학』을 창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 오래 동안  『문화/과학』 발행인으로 계간지의 발전에 기여하셨다. 앞으로 선생님의 학문적, 운동적 여정이 더 빛나시길 바란다.

 

2016. 3.

편집인 이동연

 

 보도자료

 

수신: 문화부 학술/출판 담당기자 

발신: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문화연대 

      (연락처: 편집인 이동연 010-8307-0464 sangyeun65@naver.com

 

 

제목: 계간 『문화/과학』 85호(비평전쟁) 발간 보도요청 

● 85호 특집으로 신경숙 표절 사태를 계기로 비평의 위상과 역할, 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비평전쟁> 기획!● 비평의 위기를 극복하는 메타비평의 선언, 비평과 권력-자본의 커넥션 문제, 문학패권주의의 해체, 비평 논쟁의 역사, 하위문화 비평의 새로운 경향과 한계 등을 다룬 5편의 글 수록!

● <기획>란에 박근혜 정부 하에서 벌어진 최근 예술검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제제기한 원고와 좌담-토크쇼 내용을 수록!

● 문화현실분석에 테이크아웃드로잉 사태, 복면의 문화적 의미, 헬조선 현상, 소셜웹툰 인기 원인 등을 분석한 문화비평글 수록!

● 제13회 북클럽으로 충남대학교 오길영 교수의 <힘의 포획> 토론 내용 수록!

● <근대성 연구>는 1년간 ‘근대와 재난’을 주제로 연재 시작!

● 발리바르의 예술이론과 랑시에르의 데리다 비판에 대한 재조명을 다룬 이론의 재구성 2편 수록!

 

특집 주제 <비평전쟁> 소개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소설가 이응준의 신경숙 표절 제기 글은 한동안 깊은 동면 상태에 있던 비평의 비판적 장을 다시 일깨웠다. 비평과 비평가들은 일제히 신경숙 표절의 심각한 문제들을 다시 거론하며 논쟁의 불씨를 당겼고, 신경숙 표절의 배후에 있는 ‘창비’와 ‘문학동네’와 같은 대형 문학출판사들의 권력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신경숙씨는 논란이 있고 한참 지난 후 지면 인터뷰를 통해 애매하게 사과했고, 잠정적인 절필을 선언했다. 창비와 문학동네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편집인과 편집위원 교체 등으로 쇄신책을 발표했다. 신경숙 표절 논쟁에서 도덕적, 윤리적 우위를 지닌 비판적인 비평과 비평가들은 이 국면에서 문학권력에 일부 변화를 일부 이끌어내고자 분투했다.

 

그러나 비평의 공세에 이기기 못하고, 스스로 자구책을 제출한 창비와 문학동네의 일부 변화의 움직임이 과연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의 표절 국면으로 대변되는 한국 문학의 당면한 많은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여전히 창비와 문학동네로 대표되는 한국문학의 지배적 장은 깨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오래 동안 안고 있던 폐부를 도려냄으로써, 그 권력의 재생산은 가속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의회 정치의 한계를 깨기 위해 시작된 필리버스터가 의회정치의 벽을 더 공공하게 만들었듯이, 신경숙 표절 사건에 개입하는 수많은 비평과 비평가들이 근본적인 문학의 장에 대한 자기내파를 하지 않는 이상, 표절사건에 개입한 비판적 비평들은 문학의 지배적 장을 더 공고하게 만들어 주는 양심적인 시멘트 역할에 머무를지 모르겠다.

 

『문화/과학』이 85호 특집을 ‘비평전쟁’이란 다소 도발적인 주제로 선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경숙 표절 논란으로 촉발된 비평의 비판적 기능과 비평가의 실천적 임무를 문학의 장에서만 머무르지 말고 문화와 비평의 장 전체로 확대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텍스트의 물신화와 비평 위기는 비단 문학의 장에서만 벌어진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장 전체에 걸친 문제이다. 우리는 최근 신경숙 표절 사건을 통해 촉발된 문학 장의 위기와 문학권력의 비판에 대해 지금 비평이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현재 비평이 처한 일반적 위기는 무엇이고, 비평은 왜 더 이상 읽히지 않고, 본격 비평은 왜 대중에게 외면당하며, 사회적 재난과 정치적 파국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비평전쟁’이란 이름으로 집약했다. 비평전쟁이란 언어는 비평이 텍스트에 벌이는 전쟁, 논쟁의 반대파를 향한 전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평전쟁의 실제 의미는 비평에 대한 비평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비평의 외부를 향해, 즉 창작과 출판의 이념과 권력을 향해 치열한 논쟁을 하겠다는 것은 비평전쟁에서 국지전의 형태에 불과하다. 비평전쟁의 전면전은 지금 우리 시대 비평의 존재, 기능과 역할, 새로운 실천에 대한 자기로부터의 싸움에서 시작된다. 즉 비평전쟁은 비평에 대한 비평의 전쟁, 즉 메타비평적 투쟁을 의미한다. 이번 특집에 실린 5편의 글은 모두 신경숙 표절 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그 방향과 결론은 기존의 비평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목  차> 

 

특집: 비평전쟁

비평전쟁시대의 메타비평 메뉴페스토  ————————————–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권력과 문화자본으로서의 비평의 문제들——————————— 정원옥(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오혜진(문화연구자)

비평논쟁을 통해 본 신경숙 표절 사건의 역사적 성찰———————오창은(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하위문화 비평의 궤적과 방향: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비평을 중심으로———-강신규(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기획: 예술검열

최근 미술계에서 있었던 검열사태를 보며————————–박찬경(미술가, 영화감독)

좌담, 국립국악원의 예술검열, 무엇이문제인가? ———–이동연, 유춘오(국악잡지 『라라』 편집장), 김서령(연출가)

한국예술 검열토크 —————————————————————–정영두(안무가) 외

 

문화과학 제14회 북클럽

오길영 『힘의 포획』(산지니, 2015)

패널: 오길영(충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천정환(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최진석(수유너머 N 연구원)

 

문화현실분석

테이크아웃드로잉, 희생으로서의 예술————————————— 최소연(테이크아웃드로잉 대표)

복면의 문화정치학———————————————————— 조선령(부산대학교 교수)

질식의 예감 —————————————————— 김학준(아르스프락시아연구소 연구원)

웹툰, 사회적인 것을 재현하는 대중매체?————————————- 박범기(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근대성 연구: 재난과 근대성

사고와 재난의 근대성 1 – 해상교통 ———————————이기훈(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 교수)

 

이론의 재구성

평등과 차연 또는 민주주의와 타자: 랑시에르의 데리다 비판 재검토———–김상운(정치철학연구자, 전문번역가)

시빌리테의 예술, 예술가로서의 시민——————————————–이종현(수유너머 N 연구원)

 

 

<84호 주요 원고 소개>

 

특집: <비평전쟁>

 

이동연의 「비평전쟁 시대의 메타비평 메뉴페스토」

이 글은 이번 특집의 문제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글로, 현재 비평의 위치를 재정립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신경숙 표절 논란에서 비평이 해야 할 일은 표절의 객관적 근거를 밝히고, 그 배후의 문학권력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비평은 문학과 문학비평의 장에 대한 자기 내파와 새로운 대안적 장을 형성하기 위해, 상실된 비판의 복원과 상상해야 할 새로운 비평의 위상과 역할을 물어야 한다.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하며, 문학 장에 대한 자기부정의 미적인 근거를 찾아야 하며, 비평의 급진적 상상력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논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비평은 달라진 비평 장의 환경과 문화생태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인지적 지도그리기와 혐오, 증오, 분노, 배제, 공포의 감정에 휩싸인 우리 사회의 정동적 전환의 정치경제적 맥락에 대해 간파해야 하며, 재난과 파국의 지형의 토폴로지를 분석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비평의 위상과 실천을 재구성하는 메타비평적 선언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러한 메타비평의 메뉴페스토는 “전쟁과 폭력으로부터의 위협, 재난을 더 재난스럽게 만드는 통치술, 사회적 안전망이 거세된 일상의 위협들, 차별받고 배제된 사람들, 인권 없는 인권자들, 세월호를 비롯해 사회적 재난의 국면에서 잊혀져가는 피해자들,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에 희생되고, 국가의 검열로 창작의 권리가 박탈당한 예술가들의 현실”에 맞서는 싸움이다.

 

정원옥 「권력과 문화자본으로서의 비평의 문제들」

이 글은  『문화/과학』 일부 편집위원들이 이번 특집 주제를 위해 별도의 집담회를 마련하여 토론한 내용들을 대표 집필한 글이다. 이 글은 “비판적 기능을 담당하는 비평권력이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고 할 때, 비평의 기능 회복을 위한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문학, 미술, 영화, 국악 분야에서 내재된 권력과 비평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미술계, 문학계 등의 대안적 행동에 대해 주목하고, 비평의 자유로운 발언과 공론장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이 글은 이번 특집 글 중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글이다. 그녀의 글은 신경숙 표절 논쟁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했던 많은 기성 평론가들과는 매우 다른 입장, 즉 비판적 여성주의, 소수자주의, 반계몽주의, 반문학패권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오혜진은 2015년 신경숙 표절 논란에서 재론된 문학권력론은 “1990년대의 문학(장)이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침윤되면서 정당한 사후평가를 받지 못한 채 폭력적으로 청산된 것들, 즉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며, “이들이 기억하는 신경숙과 창비의 성장과정은 ‘진보적 가치’의 보루였던 한국문학이 ‘변절’ 혹은 ‘타락’한 시간과 겹친다”고 본다. 2015년 문학권력론이 다시 제기된 내면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문학권력론의 두 입장들이 “여전히 차세대 ‘에이스’ 발굴에 골몰한다는 점, 즉 세계문학‧노벨상‧영화화 등의 강박을 통한 가부장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욕망을 공유”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장편대망론’은 바로 이러한 586세대의 낡은 공통감각이 공모해 만든 지배적 문학규율이었으며, 여기에 깃든 정치적 무의식은 명백히 1990~2000년대 문학사의 젠더화와 타자화를 통해 586세대의 노스탤지어와 정통성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한국문학의 현실을 “‘수준미달’의 작가 신경숙 및 상업주의와 결탁한 창비의 ‘타락’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딘지 전가의 혐의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요즘 젊은 독자들이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와 같은” 한국문학의 퇴행의 총체를 ‘K-문학’이라고 냉소적으로 명명하는 사태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K문학’은 시장패권주의와 결합된 한국문학의 부정적 성격 전반에 대한 종족화를 경유함으로써 ‘한국문학’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조롱의 기표로 활용”되고, 바로 이것이 “21세기의 독자들이 ‘개저씨’들의 K문학/비평 복권에 냉담한 이유”라는 것이다. 오혜진은 “‘타락’한 한국 문학장을 ‘계도‧정화’하기 위해 비평의 권위가 ‘회복’돼야 한다는 관점은 여전히 20세기적 계몽주의 프레임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젊은 독자들을 위한 새로운 독자론의 구성, 문학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젊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한국 문학 장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세대의 비평적 감수성을 갖고 있는 오혜진의 글을 일독하길 권한다.

 

오창은 「비평논쟁을 통해 본 신경숙 표절 사건의 역사적 성찰」

이 글은 한국 문학 및 문화사에 존재했던, 비평의 논쟁사를 거론하면서 비평논쟁이 공론장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기를 희망한다. 그는 1920년대 김환의 소설 「자연의 자각」을 놓고 벌인 염상섭, 김동인의 논쟁, 1970년대 미술계에서 발생한 이응로와 남관의 ‘창작과 모방’ 논쟁, 그리고 1990년대 문학평론가 김영혜와 영화평론가 유지나가 펼친 <그대 안의 블루>를 둘러싼 해석 논쟁들을 소개하면서 각각의 논쟁들에서 제기된 비평과 재현의 정치, 한국적 예술과 세계적 예술의 모순, 비평장의 폐쇄성과 전문가주의의 문제들을 지적한다. 그는 현재 비평논쟁이 위축된 이유에 대해 “문화예술의 제도화에 따른 폐쇄성의 강화”, “매체별로, 학회별로, 혹은 소속된 에콜의 진영 안에서만 미치는 영향력”, “비평 담론의 약화와 텍스트 중심주의의 고착화”로 진단하면서, 폐쇄적 제도화와 텍스트 중심주의 비평의 폐해, 공론장의 쇠퇴를 극복할 수 있는 메타비평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강신규 「하위문화 비평의 궤적과 방향: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비평을 중심으로」

이 글은 수용자의 영역에서는 활발한 한국 하위문화에 비해 그 장을 다루는 하위문화 비평이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럼에도 지속돼야 할 필요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속돼야 할지를 그동안 그것이 그려온 궤적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강신규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분야의 비평 현황을 점검하면서, 하위문화 비평의 위축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독창적 이론 및 방법론의 연구”, “비평의 역할에 대한 재정립”, “자유롭게 비평을 생산·배포·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비평 공론장의 형성”을 제안한다.

 

<기획> 예술검열

이번호 기획의 주제는 예술검열이다. 박근혜 정권 들어 심화되고 있는 예술검열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로 미술계와 국악계에서 야기된 예술검열의 사태와 문화행정의 파행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박찬경의 「최근 미술계에서 있었던 검열사태를 보며」

이 글은 자국 스페인에서 예술검열의 혐의를 받았던 전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의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임 관장 임명을 놓고 미술계가 벌인 반대 행동에 참여하면서 갖게 된 예술검열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지난 이명박 정권과 현 정권이 문화예술계에서 하고 있는 검열의 행위는 “검열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효과적 억제”를 목적으로 하는 “검열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두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 기능하는 권력의 관리술이다.

 

이밖에 예술검열 사태를 진단하는 좌담과 토크는 특히 국악계와 공연예술계의 예술검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좌담회, 「국립국악원 검열과 국악권력, 무엇이 문제인가?」, 「예술검열 토크쇼」 

이 좌담회와 토크쇼는 국립국악원의 예술검열과 국악계 침묵의 관계를 다룬 좌담과 정영두 안무가와 일본 예술가들이 함께 토론한 한국의 예술검열에 대한 토크쇼는 검열에 침묵한 국악계의 적나라한 권력의 문제와 한일 양국 예술가들이 검열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현실분석> 

 

최소연 「테이크아웃드로잉, 희생으로서의 예술」

이 글은 도시 젠트리피케이션 재난의 최전선에 위치한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임차인으로서 그녀가 겪은 재난과 유배의 시간들의 의미들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다. 그녀는 삶과 예술의 터전이었던 곳이 하루아침에 재난의 현장이 된 상황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지금 현대판 유배를 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집에 있을 수 있고, 내 집에서 나갈 권리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나에게 이 공간에서 나갈 권리가 주어져 있지 못하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공간 혹은 장소 혹은 집이라고 얘기 할 수 있는데,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를 나가는 순간, 여기를 부당하게 빼앗길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나는 잠시도 이 공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불안정한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여기를 유배지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재난의 상황을 인정하고, 이 상황을 막을 수 없다면, 당당하게 예술이 어떻게 자본의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자가 되는지를 기록할 것을 다짐한다.

 

조선령 「복면의 문화정치학」

이 글은 “오늘날 세계를 떠돌고 있는 여러 이미지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자주 띄는, 설명하기 어렵고 매우 특이한 이미지 하나”가 바로 복면 혹은 얼굴가리기의 이미지임에 주목하면서. 최근 논란이 되었던 일명 ‘복면금지법’에 저항한 예술행동과 메르스 사태에서 많은 시민들이 사용한 마스크 등 우리의 일상에서 낯설지 않은 복면착용의 사례들을 분석한다. 그녀가 보기에 복면과 가면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복면은 벌거벗은 생명의 반대편에 있는 고전적인 가면이 아니다. 오히려 복면은 가면의 안티테제이다.” “가면이 하나의 페르소나라면 복면은 그 어떠한 정체성도 없는 순수한 차단막 그 자체이다.” 그런 점에서 복면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가면과는 다르게 정체성 자체를 삭제한다. 복면이 우리 사회의 문화기호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생산하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 때문이다.

 

김학준 「질식의 예감」

이 글은 헬조선 현상에 대한 비판적 글로  소위 ‘국까론’이 헬조선 담론에 미친 영향을 주목하면서, “자기혐오이며 동족혐오인 국까론은 한국사회가 그 동안 발전의 감정적 원천으로 동원해온 애국심이 파탄났다는 사실을 담담히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헬조선의 담론은 “어떤 책임도, 현실감각도, 비전도 없고”,  “명백한 죽음에의 공포가 온몸에 와 닿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질식감이, 헬조선의 진정한 멘탈리티”임을 이 글은 말하고 있다.

 

박범기의 「웹툰, 사회적인 것을 재현하는 대중매체?」

최근 웹툰의 문화적 붐과 그 재현적 성격을 분석한 박범기의 「웹툰, 사회적인 것을 재현하는 대중매체?」는 최근의 웹툰의 창작 경향을 “소셜 웹툰”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적절한 환상을 만들어 그 환상 안에 자족하게 만드는 데서 나아가 직접적으로 사회의 모습을 당면하고 재현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웹툰은 기존의 대중매체가 사회적인 것들을 다뤄왔던 방식과 다른 형태로 사회적인 것들을 재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문화과학사 전화: 335-0461/팩스: 334-0461   e-mail: transic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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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후기]독평회 관람기(조한별)

문화/과학 제84호 예술노동 특집 독평회 관람기

 

 

조한별(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전문사 과정)

 

<왼쪽부터 조선령, 이동연, 홍태림, 김상철, 김선민, 박인수, 정일수>

 

2015. 12. 29일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문화/과학 제84호 예술노동 특집 독평회가 진행됐다. 사회에 조선령, 필자로는 이동연, 홍태림, 김상철씨가 참석하였고, 독자 패널로는 김선민, 박인수, 정일수 씨가 참석했다.

이동연은 자신의 글은 몇 가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예술노동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많은 예술가들의 의견이 갈리는데, 국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분들과 예술노동이 가지고 있는 인권노동으로서의 권리를 거부하는 입장의 예술가들이 있으며, 예술노동을 창작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노동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하는 논리를 풀어내고 싶었다고 했다.

홍태림은 예술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공장미술제 사건이었다고 하면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홍태림은 자신의 글에서 예술노동에 대한 여러 사건들을 접하면서 예술과 노동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을 정리하였다. <예술은 노동이 아니다/ 예술과 노동의 가치는 같다/ 예술은 노동을 가능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홍태림은 세 가지의 주장에 대한 여러 논지들과 사례들을 언급하여 보기 쉽게 정리하였다. 예술=노동이다 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예술은 노동을 가능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한다고 하였다.

끝으로 김상철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부터 예술인복지법과 관련된 법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생활고로 인한 예술인들의 사망이 있었고, 예술가들에게 모욕을 주는 사회적 현상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었다고 지적하며 정부와 문체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였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노동이 아닌 것들은 이중의 배제를 겪고 있다면서 예술이 왜 노동이기를 거부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하였다.

 

나 역시, 여러 분들의 발제와 토론을 들으면서 결국 모든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조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상철씨의 말대로 그 중에서도 ‘노동’의 부분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들은 이중의 배제를 겪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통상적으로 노동이 배제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실마리를 풀어야 예술노동 문제의 실마리도 같이 풀리지 않을까.

 

 

<패널들의 토론에 집중하는 모습의 독자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변화가 급선무이며, 나아가 국민들에게 사회보장체계를 비롯한 복지정책이 결코 노동자들에 대한 베품이나 동정 따위가 아니라 국가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것임을 설득시켜야 한다. 이러한 토대가 마련된 후에 우리는 보다 끈질기고 피 튀기는 예술-노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결코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한 여러 선생님들의 생각을 전해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신 문화/과학 편집위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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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후기] 제14회 북클럽

문화과학 14회 북클럽

 

2015년 12월 11일. 평론집 <힘의 포획: 감응의 시민문학을 위하여>의 저자이신 오길영 선생님을 모시고 북클럽을 진행했습니다. 토론에는 최진석 편집위원, 사회에는 천정환 편집위원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제 14회 북클럽 내용은 오는 3월 발간 될 85호에 소개됩니다.

 

 

북클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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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후기]독평회+송년회

문화과학 편집위원회가 2015년 한 해 후원독자님과 필자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2015년 12월 29일 4시 이태원 테이크아웃 드로잉에서 송년의 밤과 84호 독평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문화과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을 초대하여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식사도 하고 좋은 공연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함께 하셔서 좋은 시간 만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독평회 사진

 

 

 

송년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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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연구자료] 변화를 만드는 마을미디어

제 4회 서울마을미디어축제 “수고했어, 마을미디어”
[포럼] 변화를 만드는 마을미디어
- 마을미디어가 만든 변화와 활성화를 위한 조건 모색하기 -

Session1. 변화를 만든 마을미디어

[발표1] 수원 ‘마을, 미디어로 놀다’

[발표2] 동작FM, 3년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비전찾기

[발표3] 부산 지역 마을미디어의 오늘 그리고 다음

Session2. 도약을 꿈꾸는 마을미디어

[발표4] 참여로 싹 틔운 마을미디어, 아름드리 나무를 꿈꾼다.

[발표5] 2015년 마을미디어의 좌표, 확산과 네트워킹을 위한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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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연구자료]제7회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_예술가,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도시재생

제7회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예술가,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도시재생

발제 1
젠트리피케이션의 원인과 결과: 그것은 언제나 저소득계층을 몰아내는가?
크리스 햄넷(런던 킹스칼리지 지리학과 교수, 영국)
토론 임동근(서울대 지리학과 BK교수)

 
발제 2
왜 지금 젠트리피케이션인가? 국내 젠트리피케이션 논의의 유행에 대한 진단과 전망
이선영(지리학자)
토론 박태원(광운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부교수)

 
발제 3
문화소비 주도 도심재생 전략의 문제점: 런던 헉스톤 Hoxton 사례
앤디 프랫(런던 시티대학 문화경제학과 교수, 영국)
토론 김경민(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발제 4
문화적 도시재생 정책으로서의 창작공간 사업과 젠트리피케이션
김연진(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
토론 이흥재(추계예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장)

 
발제 5
자본에 대한 자립과 투쟁으로서의 예술: 영화 <파티51>
정용택(영화감독)
토론 김규원(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좌장 김규원(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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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칼럼]이데올로기의 귀환(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문화비평]이데올로기의 귀환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독해불가 어록 중 최고 난도를 자랑했던 이 말은 사실 국민을 상대로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이겠다는 통치자의 가장 무서운 속내를 드러낸 언술이었다. 마치 고대 부족사회를 통치하는 어느 족장의 주술 같은 ‘혼이 비정상’이란 말은 권력의 영구 지배는 역사의 지배에서 시작된다는 분명한 통치술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결코 헛소리나 말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지배하기 위한 통치자의 집요한 신념과 자의식의 발로이다. ‘혼이 비정상’이란 비교술(秘敎術)은 곧바로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일본군 위안부의 한·일 간 정부 합의’라는 역사전투의 최전선으로 이행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비정상적 언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기획하려는 정치적 이행이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와 ‘일본군 위안부의 합의’는 영구집권을 위한 역사전쟁의 서막인 셈이고, 그 정치적 의도는 ‘혼이 비정상’이란 말에 압축되어 있다.

 

“정신을 집중해 화살을 쏘면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옛 말씀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올해 신년사 발언 중 한 대목이다. 판소리로 치자면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눈 대목’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정신집중’은 ‘혼이 비정상’과 묘하게 짝을 이룬다. 겉으로 보기에 어이없는 말처럼 보이지만, 박 대통령 통치술의 핵심을 보여주는 말들의 연속이다. ‘정신집중이면 화살관통’이란 말은 자신이 그토록 집요하게 관철시키려 했던 노동개혁과 경제선진화 법안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려는 결의의 수사학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기에 앞서 박 대통령은 “청년일자리, 기업경쟁력 약화, 인구절벽 등 당장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내부과제들도 산적해 있고,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역시 잠시도 마음을 놓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정신집중은 경제, 정치, 사회, 외교 등 국가적 위기 사태를 극복하려는 국민들의 총체적 마음가짐이어야 함을 요청하는 언술이다. ‘혼’과 ‘정신’은 통치자 개인의 심리 내면에 잠재된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내는 기표로서, 과거 파시즘의 시대, 유신의 시대에 통용되었던 ‘국민정신개조’라는 이데올로기 통치의 귀환을 알린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 마음의 우울증, 혹은 신경증을 대변했던 혐오, 분노, 증오, 모멸감이라는 언어들은 이론적으로 ‘정동의 지표’로 보기 어렵다. 우익들의 인간혐오, 헬조선이란 청년들의 분노,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차별과 모멸감은 ‘마음의 리듬과 배치’, ‘몸들의 관계’로서 정동으로 해석되기에는 너무나 적대적이다. “다양한 마주침의 리듬과 양태”, “감각과 감성의 신체적 능력”, “부딪침과 부대낌”이라는 정동이론으로 과연 한국사회의 적대적 감정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을까? 정동이 몸의 잠재성과 능력이라는 약속의 의미로 사용되건, 파국의 미래를 예견하는 위협의 의미로 사용되건, 정동적 사유, 정동적 전환은 역사전쟁, 이데올로기 전쟁을 선언한 통치 권력의 지배술을 대면하기에는 너무 여유로워 보인다.

 

혐오, 분노, 증오, 모멸감은 정동의 지표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지표이다. 물론 정동이론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는 않다. 정동이론은 이데올로기를 고려하고 전제하고 우회한다. 정동이론은 이데올로기의 이후, 혹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윤리적 파산 이후를 상상하는 일종의 ‘포스트-코기토’의 세계를 상상한다. 그래서 정동이론은 그러한 위협과 파국의 체제와 감정의 대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동은 그 진정한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 적대의 장에서 동요한다. 정동은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에 포섭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정치경제적 전환의 시기에 이데올로기가 귀환하고 있다. 통치자부터 그 맹목적 광기의 우익집단까지 모두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다. 광화문 세월호 단식농성장에서 벌인 일베들의 폭식투쟁, 조계사로 피신 중인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을 쫓아내라며 조계사 경내로 진입하는 어버이연합, 김제동을 종북 사회주의자로 낙인찍고, 아베께서 사과했으니 일본을 용서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은 “남은 여생을 편하게 지내시라”는 엄마부대 봉사단은 한심한 작자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전쟁의 전위부대이고, 분명하게도 통치자와 함께 ‘권력에의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

 

역사전쟁, 이데올로기 전쟁 국면에서 가져야 할 것은 ‘고귀한 정동’보다는 선명한 ‘대항 이데올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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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칼럼]‘늙음’을 이해하는 법(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늙음’을 이해하는 법

 

오혜진(문화연구자)

 

 

최근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벌어진 ‘어버이연합’과 ‘대한민국 효녀연합’의 기묘한 ‘대치’가 화제였다. ‘효녀연합’의 홍승희씨는 밀어닥치는 어버이연합에 ‘미소’로 일관, ‘할아버지들의 역사적 상처를 이해하고, 그분들을 이용하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간 ‘할아버지’들의 왕성한 저력은 해명보다는, 일단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저 독특한 ‘늙음의 시간’을 이해하는 법을 아직 알지 못한다.

 

‘신경숙 표절사태’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작년에 한국소설이 집중했던 주제 중 하나는 ‘노년’이었다. 주요 문예지에서 ‘노년의 삶과 재현’, ‘사회적 노년과 말년성’ 같은 특집을 기획했고, 신진작가들 역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써냈다. 홍희정의 <앓던 모든 것>이 일흔세살 여성 ‘나’가 스물한살 청년과 동거하며 겪는 내적 성찰을 그렸다면, 김수의 <젠가의 시간>은 초등학교 교사직을 정년퇴임한 남성이 아홉살 여자아이에게 느끼는 소아성애적 욕망을 다뤘다. 두 작품 모두 금기시돼온 노인의 성적 욕망을 서사화했다는 점이 공통적인데, 이는 자연히 ‘노년서사’의 계보 및 그 전환을 생각하게 한다.

 

이태준이나 박완서, 최일남 등에게서 보듯, 한국소설에서 ‘노인’은 종종 신산한 삶을 온몸으로 살아낸 역사의 산증인이거나, 삶의 교훈을 전하는 현자, 지혜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식민 경험과 한국전쟁, 분단과 산업화의 시간을 오롯이 견딘 노인들의 육체와 이야기는 후세에 역사를 전하는 일종의 ‘미디어’였던 셈이다. 반면, 최근의 노년 서사는 주로 성(애)적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지닌 주체로서의 노인을 다룬다. 이는 물론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의 성적 욕망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상한 현실과 관련된다. <죽어도 좋아>나 <은교>같은 영화에서 노년의 성적 욕망은 건강한 생에의 충동이거나, 사회적 지위의 하강을 보상받기 위한 강렬한 주체화의 의지였다.

 

그러나 노인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재현하는 것에 대한 최근의 선호는 모종의 ‘은폐’와 ‘편향’을 낳기도 한다. 예컨대 ‘노인의 성적 욕망=건강한 삶의 충동’이라는 도식이 너무 공고한 나머지, 권력관계와 젠더정치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성관계를 별 성찰 없이 자연화·미학화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또한, 쪽방촌에서 폐지를 주우며 고독사하는 노인들,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종로 일대에서 성매매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 등의 사례를 떠올릴 때, 노인을 성애와 관능의 주체로만 재현하는 것은 분명 편향이다. 새삼 상기하건대, 한국은 노인빈곤율, 노인자살률 1위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요청된다. 특히 ‘노인의 사회적 삶과 정치성’ 문제는 그간 노년 서사에서 좀처럼 주목되지 않은 주제다. ‘어버이’나 ‘엄마’와 같은 타자의 호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걸고 표현하고자 하는 노인들의 욕망은 대체 뭘까. 이 문제야말로 ‘지혜의 화신’이나 ‘관능의 주체’ 같은 노인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가 아니라, 노년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와 삶의 조건, 그에 따른 노인들의 자기의식을 면밀히 궁구할 때에만 해명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비록 당장은 ‘어버이’와 ‘엄마’를 참칭하는 그들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언어설사”(홍희정) 앞에 좌절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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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칼럼]괴물은 침묵을 먹고 자란다(손희정)

경향신문 기고문

 

[청춘직설] 괴물은 침묵을 먹고 자란다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지난 12월 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위험한 초대남-소라넷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편을 방송했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음란물 공유사이트인 ‘소라넷’에 대한 내용이었다.

 

소라넷은 1999년 개설되어 각종 포르노 이미지는 물론 몰래카메라(몰카)와 더불어서 성범죄 정보가 공유되는 불법사이트다. 회원수는 자그마치 100만명. 울산광역시 인구수와 맞먹는다. 적지 않은 숫자가 소라넷에서 유통되는 ‘타인에 대한 폭력’을 별 문제의식 없이 즐기고 있었다는 말이다.

 

‘위험한 초대남’ 방송 후 인터넷 게시판 댓글 등을 통해 많은 남성들이 보였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조심해야 한다, 남자들의 본능이다, 소라넷을 문제 삼는 여자들의 방식이 더 문제다” 등. 이처럼 우리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범죄가 왜 범죄인가를 설득하는 것 자체가 고된 일인 세상을 산다.

‘위험한 초대남’에서 공포 그 자체였던 것은 소라넷의 소위 ‘베스트 작가(잘 나가는 게시자)’ 닉네임 ‘야노’의 등장이었다. 그는 일반 여성뿐 아니라 여자친구의 나체 몰카까지 소라넷에 게시했다.

“얼굴 노출도 안 된 상태인데 피해가 큰가요?” 야노는 천진하게 말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자를 ‘골뱅이(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인사불성이 된 여성을 일컫는 은어)’로 만들어 숙박업소에 데려다 놓고 그 위치를 소라넷의 다른 남성들과 공유한 뒤 ‘돌려가며 강간’했다고 증언했다. 명백한 성범죄다.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는 단체에 따르면 이런 강간 모의는 하루에 적어도 2~3건씩 올라온다.

소라넷의 다른 사용자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설명한다. 그곳에서는 여성을 상대로 하는 범죄행각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웅시된다는 것이다.

센 걸 던질수록 더 많은 관심을 끌고, 더 큰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니 경쟁이 붙고 수위가 점점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경쟁은 결국엔 여성 나체사진이나 몰카와 같은 여성 이미지의 교환을 넘어 실제로 여성을 돌려가며 성폭행하는 여성 육체에 대한 교환으로 확대된다. “안 보셨어요? 헬스장 사진? 되게 유명했던 사진인데?” 소라넷에 올려 화제를 불러모았던 자신의 ‘작품(몰카 게시물)’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야노’의 의기양양함은 이 때문이다. ‘제어할 수 없는 성욕’이나 ‘본능’, ‘성적 취향’이 아니라, 이 의기양양함이 소라넷의 본질이다.

소라넷에서의 여성 이미지·여성 육체의 교환은 인맥, 정보, 충성, 뒤봐주기, 현금 등의 ‘선물’ 교환을 통해 관계를 조직하고 그 관계 안에서 위계를 형성해 가는 남성 사회의 인터넷판인지도 모른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들이 주고받는 가장 흔하지만 가장 중요한 ‘선물’로 취급되어 왔다.

이처럼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자 전리품이라는 생각, 그렇게 여자를 남성 동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실망시켰을 땐 어떤 식으로든 보복당해도 싸다는 멸시의 마음.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는 이런 사고방식이 아니라면 소라넷은 존재할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 소라넷 운영진은 이런 뒤틀린 남성연대에 기생해서 돈을 번다. 소라넷의 베스트 작가들은 여성을 성기로 치환하는 포르노적 이미지를 게시함으로써 회원수를 늘리고, 일반 회원들은 그 이미지와 더불어 광고를 소비함으로써 소라넷에 돈을 벌어준다. 자본과 남성 간의 공모가 소라넷이라는 불법사이트를 만들어 낸다.

소라넷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멸시와 혐오가 어떻게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불법적인 음란물이 좌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농담이나 취향, 유희가 아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침해이자 폭력이며, 인간 존엄의 훼손이고, 범죄다. 그리고 외면과 침묵, 혹은 무관심을 가장한 방조가 이런 폭력과 범죄의 구조를 지속시킨다.

단속 시작 2주 만에 소라넷 내부에서 활동하던 1000여개의 카페를 폐쇄시켰다고 자랑스러워 하는 대한민국 경찰은 소라넷이 번창해 온 그 16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강간 모의를 고발하고 소라넷 폐지 청원을 하는 등 여성들이 움직이고 진선미 의원이 그에 부응하지 않았다면, 소라넷 문제는 여전히 남성들의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공공연하게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는 소라넷만의 문제도 아니다. 괴물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기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남성 중심적 구조 자체가 괴물이다. 괴물은 침묵을 먹고 자란다. 그러므로 이제 남성들의 차례다.

 

“소라넷은 소수만의 문제이며, 남성 전체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라고 물러나 있을 것이 아니라 괴물을 키우는 ‘침묵과 암묵적 동조’라는 일상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를 함께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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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3호][칼럼]기억하는 사람들의 힘(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야! 한국사회] 기억하는 사람들의 힘

 

권명아(동아대 국문과 교수)

 

 

최근 ‘위안부’와 관련한 논의는 외교적 차원이나, 담론 차원에서 기존의 국제적 연대와 연구, 실천의 역사를 모두 파괴하고 있다.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전쟁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까? 외교적이든, 담론 차원이든 이런 전쟁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무엇보다 지난 발자취를 기억하고 보듬고 살피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1990년대 학계에서는 학살과 전쟁의 기억을 기념하는 작업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국가주의적 우상화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과 항쟁을 기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비판과 공론화가 가능했다. 이런 역사에 비춰 보면 현재 기념과 기억의 문제에서는 국가와 민간 영역이 역전된 상황이다. 평화비(소녀상)는 민간 영역에서 설립한 것이다. 국가 기념물이 만들어지고 대중화되어 ‘특권화’되는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20여년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억과 기념은 국가가 아닌 일반 시민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서만 겨우 가능했다. 게다가 이런 국제적 연대를 통해 만들어진 기념물은 단지 ‘소녀상’으로 특권화되어 있지 않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좀 떨어진 도카시키나 미야코 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아리랑비’가 있다. 미야코의 아리랑비는 어린 시절 ‘위안부’ 여성을 만났던 기억을 간직한 요나하 히로토시의 개인적 추도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전후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녀들의 생사가 궁금했던 소년 요나하는 그녀들을 만났던 기억의 터에 돌을 놓아 추도했다. 개인적인 추도는 한·일 양국 연구자들의 공동 조사로 이어졌고, 2008년 미야코 지역의 위안소 지도와 지역 주민의 증언을 담은 보고서가 발간되고, 기림비 제막도 함께 진행되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아시아 여성을 기리기 위해 11개 언어로 만들어진 비문은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여성을 추도하는 의미로 베트남어가 추가되어 12개가 되었다. 이 작업에는 미야코 평화운동가와 여성들, 일본과 한국의 연구자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함께 참여했다. 이 작업에 참가한 시미즈 하야코와 우에사토 기요미는 지금도 미야코에서 평화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성노예화를 비판하고 피해자를 기리는 상징과 기념물을 만드는 일은 이런 시민들의 국제적 연대를 매개로 한 평화운동의 힘으로 이뤄졌다. 일본이나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오히려 시민운동과 평화운동이 지속해온 기억과 추도 작업을 무력화하기에 급급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추도하는 일은 무책임한 국가에 대항하여 싸워온 아시아 시민들의 반전 평화 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 한-일 외무장관 회담과 소녀상 철거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아시아의 반전 평화 운동의 역사를 무력화하는 총체적 위기로서 인식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기억을 이어나가는 것과 함께 아시아의 평화 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는 일 역시 절실한 상황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빼앗지만, 기억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는 인간 존재의 원초적 힘이다. ‘소녀상’을 철거할 수 있다는 발상은 누구의 동의 없이도 삶을 박탈하는 전쟁을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전쟁 논리를 고스란히 닮았다. ‘소녀상’이 가부장적 순수성의 이념을 특권화할 위험성이 있다면, 더 다양한 기림비와 평화비를 만들자. 파괴가 전쟁 국가의 몫이라면, 생성과 일굼은 전쟁논리에 저항하기 위한 인간 존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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