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3호][칼럼]‘늙음’을 이해하는 법(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늙음’을 이해하는 법

 

오혜진(문화연구자)

 

 

최근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벌어진 ‘어버이연합’과 ‘대한민국 효녀연합’의 기묘한 ‘대치’가 화제였다. ‘효녀연합’의 홍승희씨는 밀어닥치는 어버이연합에 ‘미소’로 일관, ‘할아버지들의 역사적 상처를 이해하고, 그분들을 이용하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간 ‘할아버지’들의 왕성한 저력은 해명보다는, 일단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저 독특한 ‘늙음의 시간’을 이해하는 법을 아직 알지 못한다.

 

‘신경숙 표절사태’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작년에 한국소설이 집중했던 주제 중 하나는 ‘노년’이었다. 주요 문예지에서 ‘노년의 삶과 재현’, ‘사회적 노년과 말년성’ 같은 특집을 기획했고, 신진작가들 역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써냈다. 홍희정의 <앓던 모든 것>이 일흔세살 여성 ‘나’가 스물한살 청년과 동거하며 겪는 내적 성찰을 그렸다면, 김수의 <젠가의 시간>은 초등학교 교사직을 정년퇴임한 남성이 아홉살 여자아이에게 느끼는 소아성애적 욕망을 다뤘다. 두 작품 모두 금기시돼온 노인의 성적 욕망을 서사화했다는 점이 공통적인데, 이는 자연히 ‘노년서사’의 계보 및 그 전환을 생각하게 한다.

 

이태준이나 박완서, 최일남 등에게서 보듯, 한국소설에서 ‘노인’은 종종 신산한 삶을 온몸으로 살아낸 역사의 산증인이거나, 삶의 교훈을 전하는 현자, 지혜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식민 경험과 한국전쟁, 분단과 산업화의 시간을 오롯이 견딘 노인들의 육체와 이야기는 후세에 역사를 전하는 일종의 ‘미디어’였던 셈이다. 반면, 최근의 노년 서사는 주로 성(애)적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지닌 주체로서의 노인을 다룬다. 이는 물론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의 성적 욕망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상한 현실과 관련된다. <죽어도 좋아>나 <은교>같은 영화에서 노년의 성적 욕망은 건강한 생에의 충동이거나, 사회적 지위의 하강을 보상받기 위한 강렬한 주체화의 의지였다.

 

그러나 노인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재현하는 것에 대한 최근의 선호는 모종의 ‘은폐’와 ‘편향’을 낳기도 한다. 예컨대 ‘노인의 성적 욕망=건강한 삶의 충동’이라는 도식이 너무 공고한 나머지, 권력관계와 젠더정치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성관계를 별 성찰 없이 자연화·미학화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또한, 쪽방촌에서 폐지를 주우며 고독사하는 노인들,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종로 일대에서 성매매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 등의 사례를 떠올릴 때, 노인을 성애와 관능의 주체로만 재현하는 것은 분명 편향이다. 새삼 상기하건대, 한국은 노인빈곤율, 노인자살률 1위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요청된다. 특히 ‘노인의 사회적 삶과 정치성’ 문제는 그간 노년 서사에서 좀처럼 주목되지 않은 주제다. ‘어버이’나 ‘엄마’와 같은 타자의 호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걸고 표현하고자 하는 노인들의 욕망은 대체 뭘까. 이 문제야말로 ‘지혜의 화신’이나 ‘관능의 주체’ 같은 노인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가 아니라, 노년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와 삶의 조건, 그에 따른 노인들의 자기의식을 면밀히 궁구할 때에만 해명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비록 당장은 ‘어버이’와 ‘엄마’를 참칭하는 그들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언어설사”(홍희정) 앞에 좌절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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