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6호][칼럼] 우리시대의 여성혐오 (손희정)

우리 시대의 여성혐오

 

손희정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녹지> 48호 기고)

 

 

오늘 아침. 일찍부터 <녹지>에 송고할 여성혐오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가 못 볼 꼴을 보게 되었다. ‘남남북녀 결혼 주선’을 전문으로 하는 한 결혼정보회사의 프로모션 웹툰을 본 것이다. “북한여성의 장점”이라는 제목의 이 웹툰은 “성형을 안 해도 예쁘다, 나이 차에 신경쓰지 않는다, 가난한 국가(북한)에서 왔기 때문에 검소하다, 군대에 나녀왔으므로 개념이 탑재되어 있다,남한 여성들처럼 결혼 조건을 재지 않는다, 동방예의지국의 효를 배웠기 때문에 시부모에게 잘한다, 여타 국제 결혼과 달리 혼혈이 아닌 순혈 자손을 얻을 수 있다” 등을 북한 여성의 장점으로 꼽고 있다. 물론 ‘그녀’는 순진무구하지만 남편 앞에서만은 색녀로 변신한다는 고리타분한 성적 판타지 역시 (아니나 다를까) 등장한다. 이 웹툰은 그야말로 21세기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형성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열 장의 jpg 파일에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으며, 일종의 ‘민족지적인 사료’로 취급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여성혐오 이야기’는 우연히 마주친, 그러나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이런 웹툰을 중심으로 풀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우선 아주 간단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그토록 여자를 사랑해서 여자와 한 이불을 덮고 살고싶어하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가 어떻게 여성혐오적일 수 있을까? 혹은 그런 광고에 현혹되는 남자들을 어떻게 여성혐오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혐오의 사전적 의미란 ‘미워하고 싫어함’ 아닌가.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성혐오는 의외로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들에게서 오히려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기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온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 및 강박적 이상과 판타지일 뿐, 물질성을 띈 개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의 여성이 그 틀에 부합하지 않다면 그 여성은 당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비단 ‘호색한’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남성 간에 교환 가능한 소유물로 생각해 온 가부장제 사회에 만연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제 웹툰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 광고가 제안하는 북한 여성의 장점, 즉 최고의 배우자를 구성하는 요건들은 가부장제가 구성해 온 이상적인 여성성의 조건이며 ‘서양물 든 김치녀’라는 미묘한 조합의 남한 여성들이 더 이상 체현하고 있지 않은 미덕이다. 따라서 남한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북한 여성은 경외의 대상이 된다. 이는 물론 일부 남성들의 ‘여성혐오 판타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에 복무해 온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치즈코는 이와 같은 여성혐오는 ‘여성멸시’와도 같은 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멸시’는 당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여성혐오를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 웹툰에서 “예비 신부님은 저의 재산이나 직업, 집평수 같은 것은 안 궁금하신가요?”라고 질문하는 풀죽은 남자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당대의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멸시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삶의 조건 자체에 대한 불안 및 공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안과 공포는 자본주의 체제와 그것이 보장하는 평등한 기회, 평등한 풍요에 대한 믿음을 위협한다. 자본주의와 그 정치적 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남성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약속하면서 세계사에 등장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주의는 남성들 간의 평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에 대한 환상을 근간으로 할 뿐이다. 이 동등한 관계에 대한 환상은 재산의 규모와 사회적 지위 및 그런 자산이 부여하는 권능을 증명하는 여성에 의해 깨진다. 과거에는 ‘용감한 자가 미녀를 차지’했다면, 이제는 ‘돈=힘 있는 자가 미녀를 차지’하는 시대인 것이다. (혹은 ‘미녀’가 돈=힘 있는 자를 차지한다.) 무소불위의 이데올로기이자 정치경제체로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거짓 약속과 그 제도적 오류를 직시하는 것보다는, 그 오류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여성을 혐오하는 편이, 성별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더 쉬운 일이다. 이때 여성이 ‘액받이’가 되는 이유는 물론 자본주의가 성별중립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결합함으로써 ‘근대적 가부장체제’로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 불안과 공포는 경쟁자로서 등장한 여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와도 연결되어 있다.이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 이론이 밝혀왔던 것처럼 남성에게는 없는 여성의 재생산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차로 ‘가정주부화housewifisation’ 된 남성들의 생산력 상실과 연결되어 있다.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을 가치절하하는 논리가 ‘그들은 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착안하여, 노동력을 유의미한 생산성에서 탈락시켜 착취하는 과정을 ‘가정주부화’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이런 노동의 가정주부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성별을 가리지 않고 확대·가속화된다. 가정주부화된 남성 노동력은 비정규직이나 유휴 노동력으로 유연화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유휴 노동력’은 잠재적인 생산력이 아니라 그저 잉여로 처리된다.) 가정주부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통치성이 ‘유연성’과 만난다는 점에서 “자본이 지구화된 경제에서 비교 우의를 실현하는 최적의 전략”(미즈·벤홀트-톰젠, 2013, 83쪽)이 된다.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국민의 한 명으로 인정 받았던 남성들은, 자본주의 역사 이래로 처음으로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엄기호, 201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이 웹툰이 “북한 여성은 군대에 갔다 와서 개념이 있다”고 말하면서 ‘군대’와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군대 복무에 대한 보상심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를 통해 국민이자 유일한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고자 하는 심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역차별이라는 환상과 그 안에서 배태되는 상실감과 분노 역시 그 근간에는 여성혐오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주부화’라는 개념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이, 이처럼 불안정한 경제적, 정치적 지위는 여성들이 영원처럼 경험해 왔고, 스스로 그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조건이다.

 

이런 불안의 판타지 안에서 여성은 꽃뱀 혹은 먹튀녀가 되거나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서 얼마 안 되는 밥그릇을 강탈해갈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경쟁자로 등극한다. 90년대의 여성혐오 담론이 ‘아줌마’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반면 2000년대에는 ‘된장녀’를 지나 ‘김여사’로 이동하는 것 역시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아줌마’에 대한 혐오는 공적 영역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9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그래, 나 아줌마다”라는 선언의 형태로 아줌마를 구해내고 동시에 IMF 이후 한국의 경제적 몰락 이후 국가가 ‘아줌마의 생활력’을 재전유하면서 아줌마에 대한 멸시/혐오는 담론의 장에서 사그라든다. (물론 현실의 장에서도 사그라든 것은 아닐터다.) 그러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 ‘소비력’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혐오의 대상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된장녀’는 한 손에는 비싼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고급 가방을 든 도시 여성이었고 ‘김여사’는 명백히 ‘오너 드라이버’였던 것이다. 이는 여성혐오의 성격이 멸시에서 위압감 혹은 박탈감으로 전환되었음을 암시한다.

 

당대 여성혐오의 마지막 원인은 사적 영역에서 남자들이 경험하는 피곤함이다. 그것은, 이 웹툰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순진무구하며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외국 여성’과의 국제결혼이라는 남성 판타지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한 프랑스 저널리스트는 남성성에 대해 분석하면서’마초성’과 ’죄의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남성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아르케만, 2011). 그가 말하는 ’마초성’이란 68혁명 이전의 가부장제를 그리워하면서 현대를 개탄하는 남성우월주의이고, ‘죄의식’이란 68혁명 이후 ’모든 잘못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성들의 난감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죄의식은 모든 것을 남성의 탓으로 돌리고 남성을 비난하며 여성을 희생양의 자리에 올려놓는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둘 다 벗어난 남성을 ’화해한 남성’이라고 말하는데, 재미있게도 그가 예로 들고 있는 ’화해한 남성’은 러시아 여성과 국제결혼을 한 프랑스 남성들이다. 서유럽 여성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은 파트너와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는 남한 여성들로부터 느끼는 피곤함은, 이 남성 저널리스트가 느끼는 피곤함과 다르지 않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이야기에는, 그러나 분명한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백래쉬backlash’다. 즉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반발 혹은 반격에 불과한 주장인 것이다.

 

한 편의 웹툰을 통해 간단하게 살펴본 것처럼 우리 시대의 여성혐오는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가진 가부장제의 젠더질서가 자본주의라는 근대 정치경제체와 접목되면서 전지구적 가부장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현상이다. 거기에 그 성과를 보기 시작한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반발이 중첩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여성혐오는 탈역사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을 가진다. 물론 이 글에서 편의 상 네 가지로 정리한 요인들은 서로 쉽게 분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긴밀하게 얽혀있고 연관되어 있다. 혹은 오히려 한 가지 원인의 네 가지 차원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혐오란 단순한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여성의 이미지로 매개되는 사회적 권력 관계다. 특히 이 사회적 권력 관계는 여-남의 양성 간의 권력 관계일 뿐 아니라 여성을 교환가치로 환산하는 남-남 간의 권력 관계이기도 하며, 이를 ‘자기혐오’로서 경험하는 여-여 관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이성애적 교환경제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문화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권력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여성혐오’는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판타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간단히 폐기되지 않는다. 그 물적 토대 및 인식론적 토대와 대결하지 않는다면 여성혐오는 어쩌면 영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대결할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것 같다.

 

 

참고문헌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꿈지모 역,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동연, 2013.

엄기호,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남성성의 가능성/불가능성」, 권김현영 외, 『남성성과 젠더』,자음과 모음, 2011.

우에노 치즈코, 나일등 역,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2.

폴 아케르만, 이정순 역, 『Mr. 남성의 재탄생』, 사람의무늬, 2011.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6호][칼럼][유럽 배낭 여행기_3] 혼자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김성일)

혼자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무한 자유와 외로움 사이에서-

 

김성일(문화/과학 편집위원)

 

내 생애 첫 배낭여행은 터키와 이탈리아를 묶어 35일 일정으로 다녀온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8학번인 나에게 배낭여행은 꼭 해보고 싶은 로망이 아니었다. 주지하듯,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는 88올림픽을 계기로 시행되었고, 첫 번째 여행객은 산업화 시대의 역군인 아버지, 어머니 세대였다. 이후 해외여행문화가 대학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92학번 이후이다. 따라서 92, 93학번이 대학생 배낭여행의 1세대이다. 나는 졸업하는 순간까지 내 스스로 외국에 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내 나라인 한국도 제대로 여행한 경험이 없었기에, 해외여행은 다른 사람의 일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2004년의 배낭여행은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 TOP 10에 들어갈 만큼의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배낭여행 베테랑들의 틈에 끼어 갖던 터키와 이탈리아 여행은 이후 배낭여행의 불꽃을 점화시킨 라이터가 되었다. 당시 여행이 마냥 즐겁고 재미있지는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항공권 체크인을 하고 출국심사를 받는 것부터 다시 귀국하기까지의 모든 일들은 생애 처음으로 겪는 것들이었기에, 언제나 긴장과 두려움을 동반했다. 급기야 동행과 다툰 후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일정은 혼자 진행해야 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이탈리아 밀라노로 비행기를 타고 온 후 로마행 기차를 타기 위해 중앙역에서 헤매던 그 때의 일은 지금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러나 터키에서 동행들에게 배운 배낭여행 기법을 이탈리아에 와서 바로 응용하게 된 경험은 혼자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 자신감은 2008년 지역축제를 주제로 몇몇 지인과 유럽여행을 할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유럽배낭여행의 사전 훈련으로 떠난 2011ㆍ2012년의 일본배낭여행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그 자신감으로 2012ㆍ2014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각각 70여일의 장기 배낭여행을 갖다 왔다. 이 두 여행 역시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 TOP 10에 들 정도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이 두 여행은 혼자 다녀왔는데, 이유는 내 주변에 70여일의 기한으로 여행갈 처지에 있는 사람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장기 배낭여행은 절대 2명이 가서는 안 된다는 교훈 때문이다. 2004년 사이가 틀어진 지인과 지금도 연락을 끊고 지내온 상황은 여행 친구를 강박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음을 각인시켰다.

문제는 나 홀로 여행이 낭만적이면서도 고달프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배낭여행은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중심으로 지구상에 하나뿐인 루트를 짠다는 점에서 매우 즐겁고 행복하다. 내 여행 스타일과 신체 리듬에 맞게 짠 일정표는 절대 자유의 징표이다. 대도시와 주요 관광지뿐 아니라 소도시의 아기자기한 골목길, 확 트인 호수를 힘차게 누비는 크루즈 여행, 울창한 숲길을 걷는 하이킹, 여행 일정을 빨리 끝내고 숙소로 와 즐기는 낮잠은 절대 자유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여행의 모든 일정을 혼자 준비하고 뜻하지 않은 트러블 발생 시 혼자 처리해야 하는 부담은 매우 큰 짐이 아닐 수 없다. 나 홀로 여행의 최대 난제는 식사이다. 영어나 방문국 언어로 쓰인 메뉴판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시켜야 하는 고충, 왁자지껄한 식당에서 혼자 테이블에 앉아 먹어야 하는 어색함이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 홀로 여행은 절대 자유와 외로움을 양 축으로 하는 외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광대의 연행(演行)과 같다. 혼자 있음이 자유롭고 좋게 느껴지다가도 지독한 고독으로 대면해야 하는 우리네 인생사가 나 홀로 여행에 극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인생사의 달고 쓴 맛이 압축적으로 경험된다는 의미에서 나 홀로 여행은 여행자를 철학자나 구도자로 성숙시키는 훌륭한 관문이 된다. 행복한 여행이 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몸의 상태에 민감해지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오감의 긴장도가 최고치로 오르는 나 홀로 여행은 궁극적으로 ‘나’를 만나게 한다. 이때의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니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 즉 한국에서 무엇을 했든 그 모든 것이 무력해진 상태에서 나를 보호할 건 오직 내 몸뚱이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 몸뚱이로 그 낯선 곳도 무탈하게 다녀왔는데, 한국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네덜란드 잔세스칸스 풍차마을

 

룩셈부르크 시내 협곡

 

벨기에 안트베르펜 노트르담 대성당 내 성화(‘플란다스의 개’에 나온 실제 성모상)

독일 하이델베르크 학생 감옥

독일 프랑크푸르트 ‘반세계화 Occupy 운동’ 텐트 농성장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폴란드 오슈비엠침 유태인 수용소

체코 프라하 존 레논 벽

오스트리아 빈 프로이트 박물관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모스타르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크로아티아 두브로부니크

 

스위스 융프라우요흐 하산 길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6호][신간안내]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언론보도)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언론보도)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108_0013401825&cID=10601&pID=10600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계간 ‘문화/과학’ 80호 발간을 기념한 단행본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가 나왔다. ‘한국 문화산업의 독점구조’라는 소제목을 단 이 책은 문화산업과 문화자본의 형성과정에서 독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한국에서 문화산업 독점의 특이성은 ‘문화콘텐츠와 미디어와의 커넥션’ ‘유통불공정 행위’ 그리고 ‘문화자본의 상징 권력’으로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고 짚는다. 문화콘텐츠의 독점은 그 콘텐츠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미디어의 커넥션 없이는 지배적 효과를 생산해 낼 수 없고, 거대자본이 틀어쥐고 있는 유통의 독점과 불공정행위 없이는 문화산업가들은 문화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주체들이 대중들과 미디어에 미치는 상징권력의 힘 없이는 문화산업의 파생상품들, 예컨대 주식자본과 광고 및 이벤트 상품을 독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제1부는 문화산업 독점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핵심 토픽들을 다루고 있다.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론,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의 이론을 중심으로 문화산업 독점의 문제를 고찰한 글, 한국 문화자본의 독점구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유통·배급의 불공정 문제를 다룬 글,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문화독점의 방식이 소수의 문화콘텐츠에만 한정된 것만이 아닌, 비주류 독립 분야의 문화콘텐츠에도 유연하게 적용되는 과정을 분석한 글, 그리고 특별하게 한국의 학술 문화자본의 독점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한국연구재단의 상징권력에 대한 비판적 글도 실려 있다.

제2부에는 한국 문화산업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독점의 문제를 다뤘다. 영화, 방송, 공연 등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전위에서 가장 주도적인 콘텐츠 생산과 유통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CJ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독점 현황을 다룬 글, 최근 영화산업에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구조를 다룬 글,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이후 한국 출판시장의 독점 지배구조의 판도를 전망한 글, 방송산업 영역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는 갑과 을의 구조적 착취를 다룬 글, 최근 국내 게임산업계를 평정한 넥슨의 지배구조와 게임서비스 유통 문제를 다룬 글 등이다. 현재 한국 문화산업의 개별 영역들이 어떻게 독점적인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3부는 한국 문화자본을 둘러싼 아시아의 유동적 상황을 분석했다. 최근 놀라울 정도로 아시아 문화산업의 영역을 휩쓸고 있는 중국 문화자본의 새로운 흐름들을 다룬 글과 신한류 시대에 한국의 문화산업과 국가가 글로벌 문화자본의 축적과정에서 어떤 동맹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분석한 글, SNS 시대의 뉴미디어의 문화자본이 어떤 지배구조 하에 있는지를 고찰한 글들은 한국 문화산업의 새로운 단계 이해를 돕는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윤종 성균관대학교 강사, 장서희 법무법인 나눔 변호사, 강정석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오창은 중앙대학교 교수, 이종임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최현용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 소장,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강신규 서강대학교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 윤영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 교수, 최영화 충남발전연구원 문화관광디자인연구부 책임연구원, 임태훈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운영위원장이 집필했다.

tekim@newsis.com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73919.html

 

다른 생각 불허하는 문화권력 독점 현상

지난해 8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명량>은 전국 스크린의 최대 61%를 차지해,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 측면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사진은 당시 서울 용산 씨지브이(CGV) 티켓 창구.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CJ·한국연구재단 독점 강화
다양성 침해하고 경쟁 부추겨
지식생산의 대중화 멀어져
한국의 학술, 대중문화, 출판 분야에서 문화자본의 독점적 지배력이 우려할 수준으로 커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계간지 <문화/과학>이 80호 발간을 기념해 특별 단행본으로 낸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는 최근 한국의 문화자본 집중화 현상을 본격적으로 파헤쳤다. 13명의 전문가가 학술과 문화산업 각 분야를 점검하고, 자본 축적과 재생산을 분석했다.
오창은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문화/과학> 편집위원)는 한국연구재단이 ‘학문권력’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이 기관은 1981년 인문사회분야 지원을 위해 설립된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이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 한국과학재단과 통합되면서 “메머드급 연구관리 전문기관”으로 바뀌었다. 2014년 한국연구재단의 총 예산은 무려 3조6993억원. 이 중 인문사회 분야 예산은 2250억원에 머무는 데 견줘, 원자력 진흥 관련 단일 예산은 684억원 더 많은 2934억원이었다고 지은이는 밝힌다. 기관 통합을 반대하던 연구자들의 우려대로 인문사회 분야 지원이 홀대 당하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재단 활동이 젊은 연구자들의 새로운 학회 창립이나 학술지 창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연말까지 재단이 학술지 평가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우수등재학술지를 선정해 집중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학문의 위계와 규율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오 교수는 분석했다. 학술지를 등급화해 학문의 다양성 증진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분석을 종합하면, 학계에서 한국연구재단의 힘은 독보적이다. 국내 연구개발(R&D) 분야, 인문한국(HK) 지원사업, 두뇌한국21플러스(BK21 플러스)도 총괄한다. 대학 평가를 좌우하는 이들 사업 수주를 쥐고 있는 것은 물론, 교수 채용 가능성도 걸려있다. 연구지원을 받고 논문을 양적으로 축적하면 교수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전임교수가 된 뒤에도 재단의 ‘신진연구자지원’을 받고 등재지 이상 학술지 논문 게재 편수를 늘려야 정년보장교수가 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등재 학술지 논문쓰기에 몰두하면서 학문적 성과의 대중적 공유를 멀리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식생산과 학술서 출판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생기고 만 것이다.
오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이 정치권력의 변화에 따른 의제 설정에는 발빠른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 ‘녹생성장’ 관련 연구주제를 지원과제로 다수 선정하고, 지난해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인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에 부합하는 연구지원 체계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 교수는 재단이 “정치적 효용성 측면에서 정권에 동원”되고 있으며 “(학문 지원을) 국민국가의 규율권력 내로 협소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단의 독점적 지위와 권력 행사로 학문은 대중과 거리가 멀어지고, 연구자들과 학문후속세대의 일상까지 규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이 책은 대중문화를 비롯한 문화자본 전반의 독점 문제를 집중 분석했다. 이윤종 <문화/과학> 편집위원(성균관대 강사)은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 개념과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이론을 중심으로 위계화·서열화된 지배구조를 비판한다. 미술관이 난해한 작품을 진열하며 문화의 계급화·차별화를 공고히 하듯, 영화의 생산과 소비에서도 계층적 구별짓기(부르디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강정석 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문화/과학> 편집위원)은 씨제이 씨지브이(CJ CGV)가 거대 블록버스터뿐 아니라 다양성 영화 전문상영 브랜드를 시도한 것을 ‘독점 현상의 유연화’라고 지적한다. 독점에 대한 대안으로 다양성 영화 분야의 대기업 진출이 이뤄졌지만 그 시장 안에서 창작자들끼리 또 다른 경쟁적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종임 문화연대 미디어센터 운영위원(고려대 강사)은 씨제이 이앤엠(CJ E&M)이 콘텐츠생산과 미디어플랫폼 운영을 함께 하면서 방송, 게임, 영화, 음악·공연사업 부문을 거느린 거대 미디어 기업으로서 부가시장 전체를 장악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스크린 독점으로 돈을 벌듯 8개나 되는 방송 채널에서 같은 시간대에 <삼총사> 같은 드라마 한 편을 편성하는 물량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은이는 “부가시장 전체가 하나의 콘텐츠 공급사와 하나의 플랫폼사로 재편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게임콘텐츠 제작과 유통에서 나타난 독점 집중화 현상(강신규), 거대 상징화된 문화자본으로서 ‘케이팝’의 문제(이동연)도 거론된다. 특히 국가 한류정책과 한류 문화자본의 글로벌화의 문제(최영화)는 문화 정책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지은이들은 문화 자본 축적이 그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게 아니라, 김대중 정부 때부터 집중적인 문화 진흥 정책에 따른 투자 확대와 공공 지원 덕분에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각 정권의 문화자본 투자 규모와 공공적 지원이 얼마나 큰 규모이며 어떤 역동을 거쳤는지에 대한 데이터와 심층 분석이 부족해 아쉽다. 웹툰 같은 인터넷콘텐츠 산업까지 장악해가는 문화자본의 독점 효과에 대한 더욱 정교한 분석과 폭넓은 연구 협력이 필요해 보인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162109205&code=960205

[책과 삶]독점적 자본에 휘둘리는 문화계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문화/과학 편집위원회 | 문화과학사 | 325쪽 | 20,000원

 

관객, 독자, 청중, 유저가 없으면 영화, 출판, 음악, 게임 산업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문화 산업을 움직이는 것은 문화 콘텐츠 소비자일까. 계간 ‘문화/과학’ 80호를 기념하는 특별 단행본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는 이러한 인식의 순진함을 논파한다.‘문화/과학’ 이동연 편집인을 비롯한 필자들은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문화산업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산업의 독점구조가 형성됐다고 지적한다. 미디어는 기업과 한통속이 돼 그들의 콘텐츠를 내보냈고, 유통망 역시 기업에 의해 장악됐으며, 그 결과 기업은 문화권력으로서의 상징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는 산업근대화 시기 재벌기업들의 성장과 비슷한 양상이다. 영화, 책, 음악, 게임 등 각 분야의 독점 양상을 살폈다.

■ 영화계, ‘9 :1’의 공고한 벽

지금 한국 영화산업의 각종 지표는 승승장구다. 연간 관객 수는 2억명을 돌파했고, <명량> 한 편이 170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으며, 투자 및 제작부문 수익률은 15%에 이른다. 하지만 스태프에 대한 부당 처우, 대작의 스크린 독과점,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등 해묵은 문제들도 여전하다.

최현용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 소장은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대기업들의 과점 체제야말로 한국 영화산업의 지배구조”라고 지적한다. 영화산업은 통상 제작부문, 유통부문, 상영부문으로 구분되는데, CJ를 필두로 한 소수 기업들이 이 모든 부문을 사실상 장악했다.

CJ E&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 등 대형 배급사가 배급하는 소수의 영화가 다수의 스크린을 차지한다. 개봉 첫 주 많은 스크린을 확보해 이른 시간에 최대의 매출을 올리는 와이드 릴리스 전략이 보편화되었기에, 스크린 확보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전국 2000개에 가까운 스크린 중 상위 1~3개 영화가 1500개 내외 스크린을 차지하는 일이 잦다. 상황이 이렇기에 평균 제작비 이상의 영화를 만들려는 제작자는 이들 대형 배급사와 투자계약을 맺어야 한다. 대형 배급사의 투자를 받지 못하면 설령 돈을 구해 영화를 만든다 해도 불리한 상영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상영관을 잡지 못해 흥행 부진을 겪고 있는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최근 사례다. 2013년 영화진흥위원회 집계 결과 CJ E&M 등 5대 배급사는 영화 편수에서 16%를 차지했지만, 매출은 94%를 가져갔다. 6%의 매출을 둘러싸고 수많은 수입영화 배급사와 소규모 영화제작사가 다툼을 벌이는 상황이다.

9 대 1의 공고한 벽을 허물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배급과 상영의 분리, 극장별 1개 영화의 최대 스크린 수 제한, 마이너쿼터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모두 난점을 갖고 있다.

■ 소수 온라인 서점, 시장 주도

영화판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하 그레이)는 출판산업에 분기점을 만들었다. <다빈치 코드>는 출간 6년 만에 전 세계에서 8000만부가 팔렸는데, <그레이>는 3개월 만에 4000만부가 팔렸다.

판매부수가 기록적이라는 점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레이>는 미국의 출판산업, 특히 전자책 산업이 섹스 코드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영국 작가 E L 제임스는 인터넷에 직접 <그레이>를 발표했고, 세계 최대 출판사인 랜덤하우스 산하 빈티지의 편집진은 이 책을 3부작으로 개작해 팔았다. 하드커버, 소프트커버, 전자책 순으로 출간했는데, 특히 전자책의 호응이 엄청났다. 랜덤하우스는 <그레이>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2위 규모 출판사인 펭귄을 합병했다.

한국의 출판시장도 디지털 유통체계 중심으로 거듭난 상태다. 온라인 서점은 초창기였던 2000년 시장 점유율이 2.7%였으나, 2010년에는 39.0%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오프라인 중소서점들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온라인 서점과 살아남은 대형 오프라인 서점은 베스트셀러 위주로 판매 시스템을 개편했고, 극소수의 책이 시장을 주도하는 현상이 보편화됐다.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시장 전체를 견인한 것도 아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밀리언셀러는 관련 도서의 판매를 창출하지 못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베스트셀러는 출판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한 출판사의 영업이익만을 극대화시켰을 뿐”이라고 말했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기획이 아니라 선인세 경쟁과 저자 캐스팅에 열을 올리고 점유율 싸움을 벌였다”고 회고했다.

서구 출판계에서는 유통 공룡 아마존과 대형 출판사의 대결이 한창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싸움에서 아마존이 이기면 “작가와 출판사들은 아마존의 하청업체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기호 소장은 온라인 서점의 시장 장악으로 인해 한국 출판이 다양성, 창의성, 의외성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 SM의 시가 총액, SBS 압도

어느새 ‘가요’ 대신 ‘K팝’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대중음악이 글로벌 팝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아이돌 그룹을 결성하는 데 한국 기업은 특출한 실력을 보이고 있다.

아이돌 그룹 기획 시스템은 1980년대 말 팝음악 시장에 불어닥친 일시적인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기업들이 만든 프로젝트였다. 수백명의 10대 가수 지망생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열어 소년들을 뽑았고, 이들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란 이름의 보이 그룹이 됐다. 한국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가 1990년대 중반 만든 HOT가 아이돌 그룹의 효시로 꼽힌다.

현재 활동 중인 아이돌 그룹 기획사는 50여개에 이른다. 2010년 이후 매년 50개가 넘는 아이돌 그룹이 데뷔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진출을 가능케 한 주역이지만, 역으로 아이돌 그룹의 득세는 다른 음악 장르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들은 지상파와 케이블의 음악 프로그램뿐 아니라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연예기획사들이 방송과 구조적인 커넥션을 맺었고, 시청자들은 이를 별 수 없이 보고 듣는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미디어 플랫폼은 무한에 가깝게 증식 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유통될 수 있는 콘텐츠는 여전히 한정적이다. 이제 콘텐츠를 제공하는 기획사가 갑이고 내보내는 미디어는 을이다. 15일 기준 SM엔터테인먼트의 시가총액은 8125억원으로, 최대의 민간 방송사인 SBS의 5111억원을 압도한다.

하지만 아이돌 중심의 K팝이 지속가능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모든 인기 장르는 쇠퇴한다. 이동연 편집인은 “어린 시절에 데뷔한 아이돌 그룹들은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전략 때문에 일회용 소모품으로 기능한다”며 “K팝의 제작 시스템은 여전히 근시안적”이라고 말했다.

■ 넥슨 1강 체제 부작용 심각

2014년 기준 한국의 게임산업 규모는 10조원에 육박하고, 게임 수출액은 문화콘텐츠 산업 전체 수출액의 60%를 차지한다.

규모가 커진 만큼 다양한 생태계가 작동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게임시장은 넥슨, 엔씨소프트, 한게임, 넷마블 등 다양한 회사들이 차별화된 장르의 게임을 만들었으나, 2000년대 후반부터는 넥슨 1강 체제로 재편됐다.

1994년 설립된 넥슨은 ‘메이플 스토리’ ‘던전 앤 파이터’ 등 인기작을 포함한 70여개 게임을 서비스 중이다. 아시아, 북미, 유럽 등 60여개 국가에 진출했으며, 총 3억여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넥슨 성장의 동력이 인기 게임 개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넥슨은 2004년 ‘마비노기’ 이후 이렇다 할 인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넥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공격적인 인수·합병에 있다. 넥슨은 네오플을 인수해 ‘던전 앤 파이터’를, 게임하이를 인수해 ‘서든 어택’을 가져왔다. 인기 게임을 경쟁사에 빼앗긴 넷마블, 한게임은 이후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넥슨은 계속된 인수·합병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게임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확보했고, 개발사의 개발 역량을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게임산업 전체에 미치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인수된 회사는 대작 게임 중심의 조직개편을 겪었다. 이 와중에 다수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중장기적으로는 게임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경쟁력도 떨어졌다. 넥슨은 인수한 회사의 게임이 인기를 끌지 못하면 곧바로 내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넥슨이 선구적으로 도입한 부분 유료화 모델이 유저의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한다는 점도 비판받고 있다.

강신규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은 “넥슨은 이제 다각적인 인수·합병 전략을 통해 국내를 넘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면서도 “국내 게임산업을 망쳐가면서까지 넥슨이 얻어야 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6호]동정

◆이동연
-1월 23일 제3회 <세운포럼> 참여 <세운포럼, 무엇을 할 것인가?> 토론
-1월 23일 문화과학 서울시립미술관 공동주최 심포지엄 <글로벌 문화정체성의 이주의 기억> 사회자 참여
-1월 28일 2015년 자유인문캠프 문화과학 주관 강좌 <재난의 통치, 통치의 재난> 강의
-2015년 2월 5일 돌곶이 문화예술마을만들기 포럼 참여 발표

◆문강형준·정원옥
- 세월호 작가기록단이 기획하고, 창비와 한겨레21이 주최하는 <고통을 마주하기: 『금요일엔 돌아오렴』 깊이 읽기> 행사에 정원옥(3월 6일), 문강형준(3.13) 편집위원이 참여, 시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장소 미정.

카테고리: 알림 | Comments Off

[뉴스레터6호][칼럼] 노인과 진보(권명아)

노인과 진보

 

 

권명아 편집위원(동아대 국문과 교수)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일흔 어름의 할머니에게 “한창 좋은 때다”라고 말하는 풍경이 참 먹먹했던 적이 있다. 늙음과 젊음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몇 백 년을 살았는지 가늠하는 게 헛된 고목 아래 앉아 나이듦에 대해 묻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곱씹어본다. 유용하고 무용한 세상의 지식을 많이도 들춰보았지만, 나이 들며 마주하는 낯설고 두려운 질문에 대해 그 지식의 서재에서 답을 찾기는 참으로 어렵다. 세상을 향해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내고 조언과 진단을 서슴지 않는 지식인에게도 나이 들며 부딪치는 질문은 그저 홀로 침잠해야 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물론 건강에서 재테크까지 나이 들면서 챙겨야 하는 일들을 조언해주는 정보는 넘쳐난다. 그러나 나이듦과 정치라는 두 항을 이어주는 지식이나 담론은 거의 부재하다.

다만 세대 논쟁만이 뜨겁다. 세대 논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와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진보, 혁명, 변화.’ 이런 단어에서 우리는 암암리에 젊음, 청춘을 연상한다. 보수가 ‘늙음’,오래됨과 자연스레 연결되듯이 진보는 언제나 ‘젊음의 것’이었다. 이는 근대 주체가 형성되어온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보수=늙음’, ‘진보=젊음’이라는 식의 의미 연결을 넘어서지 않는 한 우리는 정치적 주체에 대해 진부한 세대 논쟁을 넘는 새로운 담론 지형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간다’(progress)는 의미를 지녔기에, ‘젊음’의 시간성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이론적 입장에 따라 진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래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생태주의나 근대적 개념이 인간 모두를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굳이 ‘진보’라는 개념을 선호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이 있다. ‘진보’라는 개념은 품을 수 있는 주체가 한정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기득권 수구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유는 때로, 아니 언제나 현실에 뒤진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원래 살던 대로 살 권리’를 요구하는 밀양 할매들의 십년이 넘는 투쟁은 ‘청년 진보’라는 표상을 뒤흔들었다. 또 혐오를 무기로 삼는 청년 우익의 등장은 보수가 더 이상 오래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뼈아프게 환기시켰다. 그러나 ‘밀양’을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듯이,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나이듦을 사유하는 것은 아직은 시작 단계다.

나이듦을 단지 숫자로 환원되는 ‘나아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나이듦은 육체의 나아감을 측량하고 관리하는 기술과 학문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나아감에 속한다. 그러나 나이듦이란 신체적 상태의 변화와 생각, 정서, 관계 맺음, 삶과 사회에 대한 태도의 변화 역시 함축한다. 이는 단지 노화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론적 나아감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나아감이야말로 정치적 사유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근원적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호감을 얻기 위해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고 청년 문화에 동참하는 진보정치의 노력은 가상하다. 그러나 이런 ‘청춘의 코스프레’는 어쩌면 나이듦에 대한 진보정치의 불안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이듦이라는 차원을 이론과 실천 속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진보정치는 그 자체의 나아감에도 근원적인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바지를 벗고,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종편의 괴성으로 상쇄시키고 있는 저 ‘고집불통의 노친네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민중 속으로’ 나아가는 진보정치의 길인지도 모른다.

 

<한겨레신문> 2015.1.1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3606.html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6호][소개]문화사회연구소 예사인 예순 일곱 번째 세미나(2/24)

다산 세미나 1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문화사회연구소 ‘예사인 세미나팀’에서 매월 셋째주 월요일에 ‘책과 수다’가 어우러지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나눔으로써 더욱 풍부해질 수 있는, 증여를 통해 정신적 낭비를 만끽하는 방법이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사인 세미나팀’은 2009년부터 함께 책 읽는 사람들이 모여 감성적 교감을 쌓아오고 있습니다. 예술/사상서/인문서를 읽고 대화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해나가길 원하는 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사인 세미나’에 새롭게 참여하실 분은 문화사회연구소 홈페이지(http://www.kccs.or.kr)에 댓글로 신청해주세요. 텍스트 발제는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해왔던 멤버들이 맡아서 하니, 부담 없이 참여하세요.

‘예사인’은 ‘예사로운 사람들의 세미나’, 그리고 ‘예술/사상(사회)/인문 세미나‘의 줄임말입니다.

 

 

○ 장소 : 문화사회연구소 (찾아오는 길http://www.kccs.or.kr)

○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66-67번지 3층 (우편번호 121-869)

○ 세미나 참여 신청 방법 : 문화사회연구소 홈페이지(http://www.kccs.or.kr)에서 댓글로 신청하세요

 

○ 일시 : 2015년 2월 24(화) 저녁 7시

○ 텍스트 :  정약용,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2009.

○ 세미나 발제

* 제1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 금은돌

* 제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 박범기

* 제3부 둘째형님께 보낸 편지 : 유진홍

* 제4부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 김성현

 

 

※ 2015년 상반기는 ‘다산 세미나’로 이어집니다. 매월 세번째 주 월요일에는 다산 정약용의 책을 읽으며, 한국 사상의 정취를 음미합니다. 예사인 세미나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2월 24일(화) 저녁 7시: 다산세미나 1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3월 16일(월) 저녁 7시: 다산 세미나 2 – <정선 목민심서>

* 4월 20일(월) 저녁 7시: 다산 세미나 3 – <다산 정약용 평전 1>

* 5월 18일(월) 저녁 7시: 다산 세미나 4 – <다산 정약용 평전 2>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6호][행사후기] <글로벌 문화형성과 디아스포라의 기억들: 이주, 문화지리, 문화정체성>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아프리카 나우: Political Patterns>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2014.12.16.~2015.2.15.). <아프리카 나우>는 아프리카 현대미술을 주제로 작가 20명의 회화, 조각, 설치, 영상 작품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전시회다.

 

이 전시회와 연계하여 지난 1월 23일 <글로벌 문화형성과 디아스포라의 기억들: 이주, 문화지리, 문화정체성>이라는 주제의 콜로키움이 열렸다. 콜로키움은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종문제 및 다민족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슈를 점검해 봄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본격화되고 있는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의식과 이에 따른 글로벌 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논의하고자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것. <문화과학> 편집위원들이 사회자, 발표자, 토론자로 대거 참여하였고, 콜로키움은 방청석이 꽉 찬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6호][연구자료]예술인복지정책의 평가 및 개선방안 국회토론회

예술인복지정책의 평가 및 개선방안 국회토론회

 

2014년 4월 11일 (금)  오후 3시 국회 의원회관 제 세미나실

국회의원 배재정 |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원회 | 문화연대

 

 

Download (PDF, 617KB)

 

2013년 예술인복지법 개정안 병합심사 중 아래와 같은 전문위원 의견이 젳ㄹ된 것에 대하여 강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실태조사에 있어 계약서 제출 의무화에 대하여 모 전문위원은 “계약서 제출 요구는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고, 표준계약서 작성의 의무화에 대해서는 “표준계약서 사용을 강제하는 것은 자유로운 예술 활동 저해 및 사인의 권익을 침해하는 비판적 소지가 있으며, 계약 당사자 간 다양한 계약 형태를 반양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벽은 관(官)만이 아니라 민(民), 즉 기성예술계에도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예술인복지TFT에 참여한 예술인협회/단체의 대표자들은 예술인복지정책과 예술인자격증명의 비현실성을 신랄히 지적하면서도 결국 기존협회/단체의 기준과 요구사항을 강조했다. 이는 본의 아니게 미조직.청년 예술인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27p. -나도원 _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위원장

카테고리: 알림 | Comments Off

[뉴스레터6호][칼럼] 예술인에게 ‘복지’와 ‘사례비’는 왜 정당한가?: 2014년 서울시 창작 공간 국제심포지엄 리뷰 (이동연)

예술인에게 ’복지’와 ’사례비’는 왜 정당한가?: 2014년 서울시 창작 공간 국제심포지엄 리뷰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11월 27일 서울시청 신청사 3층 대회의실에서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제6회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노동하는 예술가, 예술환경의 조건”이 성황리에 마쳤다. 주최 측의 전언으로는 심포지엄 2주 전에 이미 참가 예약이 완료되었고, 사전 등록을 하지 못한 분들 중에서 일종의 기관 프리미엄을 내세우며 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는 요청이 적지 않을 정도로 있었다고 하니, 웬만한 아이돌 그룹 콘서트 부럽지 않은 행사였다. 한편으로 오늘날 예술가들의 경제적 형편을 화두로 삼은 이번 심포지엄에 예술계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예술계의 어려운 생존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니, 행사의 흥행이 꼭 반갑지는 않아 보인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와 삶의 양극화가 급기야 예술의 장 안으로까지 영향을 미쳐 예술가들의 생계와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우리는 2010년 인디 뮤지션 이진원과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을 통해 눈으로 직접 목도한 바 있다. 모르긴 몰라도 생존의 위험에 내몰린 가난한 예술가들과 이들에게 어떤 지원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야 하는 문화예술 관계 기관 담당자들에게는 이 심포지엄의 주제가 매우 시기적절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 거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출범 이후 예술인 복지정책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예술가들, 혹은 예술 관련 기관들이 이 심포지엄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정보와 교훈 제법 많을 듯했다. 한국에서 예술인 복지와 그들의 생존을 위한 공공의 지원을 위한 담론은 이제 본격적인 출발선 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심포지엄은 예술과 노동의 관계, 예술가의 경제적 활동의 현황, 예술인 복지를 위한 국가정책의 역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따른 사례비 지급의 근거 등에 대해 한국을 비롯해 다른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서로 비교할 수 있어 유익한 행사였다. 먼저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암스텔담대학의 명예교수인 한스 애빙(Hans Abbing)은 예술가들의 빈곤에 대해 당연시하는 예술계 풍토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노동자들의 평균임금보다 낮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이를 불평하기는커녕 기꺼이 작업하려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가치 비용 높아 어쩔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이러한 주장이 예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예술 창작의 즐거움, 예술의 에토스라는 것이 경제적 빈곤을 감내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예술가들만의 상징적 보상체계라고 말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예술계 내의 예술가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려는 잘못된 근거에 불과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근대 예술미학의 숭고한 슬로건이 예술가들을 착취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것은 애초부터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한스 애빙은 이러한 잘못된 논리에 저항하는 전략으로 문화와 예술의 시장에 대한 대안적 상상, 문화예술 공공공간의 민영화에 대한 반대, 정당한 대우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예술기관들의 인증 활동,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좀 더 다양한 영역에서의 활동 등을 제안한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박영정 연구위원은 한국의 예술인 복지정책의 추진현황과 과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박영정 연구위원은 문화정책의 역사에서 예술인 복지를 다루었던 사례들, 문화관광연구원이 조사한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의 주요 통계 결과들을 제시하고, 2011년에 제정된 예술인복지법의 주요 내용을 검토하면서 현재 한국의 예술인 복지 정책의 수준을 언급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술인 복지정책의 추진방향으로 예술가들이 사회보장체계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개선,예술인들의 특수성을 고려한 복지정책의 설계, 예술인 사회보장체계와 예술인 지원체계의 연계지원 방안 마련, 장기적인 예술인 복지정책의 로드맵 수립 등을 제시하였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재불 문화정책 연구자인 목수정씨는 현재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시각예술인 사회보장제도의 개정안 국면을 소개하면서 예술인 복지정책을 주도한 주체들 간의 역설적인 갈등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목수정씨의 언급에 따르면 프랑스의 시각예술인들의 사회보장제도는 ’예술인의 집’(La Masion des Artistes)과 ’작가사회보장협회’(AGESSA)로 구분되어 관리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예술인의 집이 예술가들의 복지정책을 주도한 기관이었지만, 예술인의 집에 등록되는 예술가들의 자격이 일정한 소득(연간 8,487 유로, 한화로 1,160만원)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 이하의 소득을 받는 예술가들은 더 열악한 상황임에도 예술인의 집에서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최근에 프랑스 정부는 예술가들과의 합의 하에 예술가 자격의 기준을 없애고, 두 기관의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관 통합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동안 기득권을 가졌던 ”예술가의 집” 집행부가 반대하면서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목수정씨는 낡은 예술인 사회보장 제도를 혁신하기 위해서 1953년에 만들어진 예술인 사회보장단체를 폐지시킨 ”예술인의 집”이 40년이 지난 후에 대다수 예술가들이 지지하는 새로운 통합 조직 설립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때문에 저지하려는 행태를 지적하면서 예술가들이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네 번째 발제자로 나온 전 ’영국시각예술인연합’ 디렉터였던 수잔 존슨(Susan Jones)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영국문화예술위원회’의 독립성의 기본 원칙이 ’경제논리로부터의 예술의 예외성’이었음을 먼저 강조한다. 경제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통상 가난한 예술가들을 국가차원에서 보살펴주는 것이 위원회의 기본 임무인 것이다. 그래서 영국문화예술위원회는 1979년에 정부 지원을 받는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회를 할 때, 사례비를 책정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10년간 73%가 증가할 정도로 매우 긍정적이었지만 최근에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많은 전문 시각예술가들이 직업의 기회를 잃을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존슨의 발표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술가들에게 사례비를 주는 것이 왜 정당하며, 어느 정도의 사례비를 지급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꼼꼼한 사례를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발제문을 보면 예술가들의 사례비 지급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영국예술계가 수많은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에 설립된 비영리 예술가 정보제공 회사인’a-n’은 국가예술발전전략의 일환으로 잉글랜드 문화예술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서 예술가들에게 사례비 지급과 관련된 실용 지침서를 제작하였고, 시각예술인들은 예술 사례비 캠페인 선언문’(Paying Artists Campaign Manifesto)을 만들기도 하였다. 예술가들에게 사례비 지급의 정당성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예술인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공공기관들의 노력은 아직 그 단계까지 공론화가 되지 않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마지막 발제자인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인 안소현씨는 먼저 ”예술을 둘러싼 경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예술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과 양립불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던진다. 때때로 이러한 질문들이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예술작업의 물리적 노동력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예술가의 가치와 경제적 가치의 환원불가능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예술가들에게 정당한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으려는 잘못된 논리로 이용된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창조력의 경제적 가치를 어떻게 환산가능할까? 연소현씨는 이 환산의 근거를 예술가들의 인지도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창조력의 경제적 가치를 예술가들의 인지도로만 환산할 경우 이것역시 시장논리에 의존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제시하는 대안은 예술가들의 창조력의 효과이다. 예술가의 인지도와 창조력의 효과가 명백하게 구분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녀가 말하려는 작가사례비는 ”작가의 창조력을 환산한 대가가 아니라, 작가의 창조력으로 인한 효과, 즉 기관이 취한 부가가치에 대한 사례비로 이해해야”하며, 그래서 작가에게 사례비를 지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예술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5명의 발제 이외에도 전시보조 인력의 모호한 지위와 위치의 문제를 다룬 <만능벽>이란 영상이 상영되었는데,  이 영상을 제작했고 스스로 이 영상의 주인공인 권용주 작가의 설명을 통해서 예술과 노동, 예술가와 경제적 보상의 관계가 갖는 모호한 의미를 새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5명의 발제와 3명의 토론, 그리고 많은 청중들과의 질의와 응답으로 이어지는 대략 4시간이 넘는 심포지엄을 진행하면서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술가들에게 적절한 사회보장이 필요한 이유와 근거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가 다르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대체로 예술가들에게 사회보장제도가 필요한 근거로 정당한 원칙을 중시하는 듯했고, 영국은 합리적 근거를 중시하는 듯했다. 말하자면, 명분과 원칙이 정당하면 예술가들이 특별한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과 그러한 당연한 주장을 국가와 대중들에게 설득하려면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 말이다. 확실히 프랑스와 영국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예술인 복지정책에는 과연 정당한 원칙과 합리적 근거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는 예술가들에게 사례비는 어떤 의미일까 하는 점이다. 대체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행위를 경제적 행위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 행위에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문제는 어떤 경우는 그 예술적 행위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양극화가 매우 심해 사례비의 정당한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과 다른 경우에는 예술가의 사례비를 창작활동에의 헌신 운운하면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가들에게 사례비는 어떤 의미로 간주해야 할까? 심포지엄에 참여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사례비의 의미는 정당한 창작활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으로서 ’지급’(payment)과 예술창작행위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존경과 영예의 의미로서의 ’사례’(honorarium)가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례비에서의 ’비’와 ’사례’의 의미는 경제와 예술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에게 정당하게 작업을 한 만큼 그 대가를 지불할 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 비용을 마땅히 지불하는 이 이중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이해되고 인정될 때, 한국에서 예술인 복지와 권리는 비로소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까?

카테고리: 알림 | Comments Off

[뉴스레터6호]제11회 계간 <문화/과학> 북클럽

제11회 계간 <문화/과학> 북클럽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강내희:(문화과학사, 2015)

주최: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일시: 2015년 2월 24일(화) 오후 4시-6시

장소: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세종문화회관 뒤편 마당)로 결정되었어

문의: 02-745-1603

참가자: 강내희(중앙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저자)

조형근(한림대학교 연구교수, 사회)

서동진(계원조형예술대학교 교수, 토론)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