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6호][칼럼] 예술인에게 ‘복지’와 ‘사례비’는 왜 정당한가?: 2014년 서울시 창작 공간 국제심포지엄 리뷰 (이동연)

예술인에게 ’복지’와 ’사례비’는 왜 정당한가?: 2014년 서울시 창작 공간 국제심포지엄 리뷰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11월 27일 서울시청 신청사 3층 대회의실에서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제6회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노동하는 예술가, 예술환경의 조건”이 성황리에 마쳤다. 주최 측의 전언으로는 심포지엄 2주 전에 이미 참가 예약이 완료되었고, 사전 등록을 하지 못한 분들 중에서 일종의 기관 프리미엄을 내세우며 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는 요청이 적지 않을 정도로 있었다고 하니, 웬만한 아이돌 그룹 콘서트 부럽지 않은 행사였다. 한편으로 오늘날 예술가들의 경제적 형편을 화두로 삼은 이번 심포지엄에 예술계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예술계의 어려운 생존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니, 행사의 흥행이 꼭 반갑지는 않아 보인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와 삶의 양극화가 급기야 예술의 장 안으로까지 영향을 미쳐 예술가들의 생계와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우리는 2010년 인디 뮤지션 이진원과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을 통해 눈으로 직접 목도한 바 있다. 모르긴 몰라도 생존의 위험에 내몰린 가난한 예술가들과 이들에게 어떤 지원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야 하는 문화예술 관계 기관 담당자들에게는 이 심포지엄의 주제가 매우 시기적절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 거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출범 이후 예술인 복지정책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예술가들, 혹은 예술 관련 기관들이 이 심포지엄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정보와 교훈 제법 많을 듯했다. 한국에서 예술인 복지와 그들의 생존을 위한 공공의 지원을 위한 담론은 이제 본격적인 출발선 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심포지엄은 예술과 노동의 관계, 예술가의 경제적 활동의 현황, 예술인 복지를 위한 국가정책의 역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따른 사례비 지급의 근거 등에 대해 한국을 비롯해 다른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서로 비교할 수 있어 유익한 행사였다. 먼저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암스텔담대학의 명예교수인 한스 애빙(Hans Abbing)은 예술가들의 빈곤에 대해 당연시하는 예술계 풍토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노동자들의 평균임금보다 낮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이를 불평하기는커녕 기꺼이 작업하려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가치 비용 높아 어쩔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이러한 주장이 예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예술 창작의 즐거움, 예술의 에토스라는 것이 경제적 빈곤을 감내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예술가들만의 상징적 보상체계라고 말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예술계 내의 예술가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려는 잘못된 근거에 불과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근대 예술미학의 숭고한 슬로건이 예술가들을 착취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것은 애초부터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한스 애빙은 이러한 잘못된 논리에 저항하는 전략으로 문화와 예술의 시장에 대한 대안적 상상, 문화예술 공공공간의 민영화에 대한 반대, 정당한 대우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예술기관들의 인증 활동,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좀 더 다양한 영역에서의 활동 등을 제안한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박영정 연구위원은 한국의 예술인 복지정책의 추진현황과 과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박영정 연구위원은 문화정책의 역사에서 예술인 복지를 다루었던 사례들, 문화관광연구원이 조사한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의 주요 통계 결과들을 제시하고, 2011년에 제정된 예술인복지법의 주요 내용을 검토하면서 현재 한국의 예술인 복지 정책의 수준을 언급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술인 복지정책의 추진방향으로 예술가들이 사회보장체계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개선,예술인들의 특수성을 고려한 복지정책의 설계, 예술인 사회보장체계와 예술인 지원체계의 연계지원 방안 마련, 장기적인 예술인 복지정책의 로드맵 수립 등을 제시하였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재불 문화정책 연구자인 목수정씨는 현재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시각예술인 사회보장제도의 개정안 국면을 소개하면서 예술인 복지정책을 주도한 주체들 간의 역설적인 갈등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목수정씨의 언급에 따르면 프랑스의 시각예술인들의 사회보장제도는 ’예술인의 집’(La Masion des Artistes)과 ’작가사회보장협회’(AGESSA)로 구분되어 관리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예술인의 집이 예술가들의 복지정책을 주도한 기관이었지만, 예술인의 집에 등록되는 예술가들의 자격이 일정한 소득(연간 8,487 유로, 한화로 1,160만원)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 이하의 소득을 받는 예술가들은 더 열악한 상황임에도 예술인의 집에서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최근에 프랑스 정부는 예술가들과의 합의 하에 예술가 자격의 기준을 없애고, 두 기관의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관 통합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동안 기득권을 가졌던 ”예술가의 집” 집행부가 반대하면서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목수정씨는 낡은 예술인 사회보장 제도를 혁신하기 위해서 1953년에 만들어진 예술인 사회보장단체를 폐지시킨 ”예술인의 집”이 40년이 지난 후에 대다수 예술가들이 지지하는 새로운 통합 조직 설립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때문에 저지하려는 행태를 지적하면서 예술가들이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네 번째 발제자로 나온 전 ’영국시각예술인연합’ 디렉터였던 수잔 존슨(Susan Jones)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영국문화예술위원회’의 독립성의 기본 원칙이 ’경제논리로부터의 예술의 예외성’이었음을 먼저 강조한다. 경제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통상 가난한 예술가들을 국가차원에서 보살펴주는 것이 위원회의 기본 임무인 것이다. 그래서 영국문화예술위원회는 1979년에 정부 지원을 받는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회를 할 때, 사례비를 책정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10년간 73%가 증가할 정도로 매우 긍정적이었지만 최근에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많은 전문 시각예술가들이 직업의 기회를 잃을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존슨의 발표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술가들에게 사례비를 주는 것이 왜 정당하며, 어느 정도의 사례비를 지급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꼼꼼한 사례를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발제문을 보면 예술가들의 사례비 지급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영국예술계가 수많은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에 설립된 비영리 예술가 정보제공 회사인’a-n’은 국가예술발전전략의 일환으로 잉글랜드 문화예술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서 예술가들에게 사례비 지급과 관련된 실용 지침서를 제작하였고, 시각예술인들은 예술 사례비 캠페인 선언문’(Paying Artists Campaign Manifesto)을 만들기도 하였다. 예술가들에게 사례비 지급의 정당성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예술인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공공기관들의 노력은 아직 그 단계까지 공론화가 되지 않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마지막 발제자인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인 안소현씨는 먼저 ”예술을 둘러싼 경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예술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과 양립불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던진다. 때때로 이러한 질문들이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예술작업의 물리적 노동력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예술가의 가치와 경제적 가치의 환원불가능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예술가들에게 정당한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으려는 잘못된 논리로 이용된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창조력의 경제적 가치를 어떻게 환산가능할까? 연소현씨는 이 환산의 근거를 예술가들의 인지도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창조력의 경제적 가치를 예술가들의 인지도로만 환산할 경우 이것역시 시장논리에 의존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제시하는 대안은 예술가들의 창조력의 효과이다. 예술가의 인지도와 창조력의 효과가 명백하게 구분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녀가 말하려는 작가사례비는 ”작가의 창조력을 환산한 대가가 아니라, 작가의 창조력으로 인한 효과, 즉 기관이 취한 부가가치에 대한 사례비로 이해해야”하며, 그래서 작가에게 사례비를 지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예술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5명의 발제 이외에도 전시보조 인력의 모호한 지위와 위치의 문제를 다룬 <만능벽>이란 영상이 상영되었는데,  이 영상을 제작했고 스스로 이 영상의 주인공인 권용주 작가의 설명을 통해서 예술과 노동, 예술가와 경제적 보상의 관계가 갖는 모호한 의미를 새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5명의 발제와 3명의 토론, 그리고 많은 청중들과의 질의와 응답으로 이어지는 대략 4시간이 넘는 심포지엄을 진행하면서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술가들에게 적절한 사회보장이 필요한 이유와 근거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가 다르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대체로 예술가들에게 사회보장제도가 필요한 근거로 정당한 원칙을 중시하는 듯했고, 영국은 합리적 근거를 중시하는 듯했다. 말하자면, 명분과 원칙이 정당하면 예술가들이 특별한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과 그러한 당연한 주장을 국가와 대중들에게 설득하려면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 말이다. 확실히 프랑스와 영국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예술인 복지정책에는 과연 정당한 원칙과 합리적 근거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는 예술가들에게 사례비는 어떤 의미일까 하는 점이다. 대체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행위를 경제적 행위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 행위에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문제는 어떤 경우는 그 예술적 행위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양극화가 매우 심해 사례비의 정당한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과 다른 경우에는 예술가의 사례비를 창작활동에의 헌신 운운하면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가들에게 사례비는 어떤 의미로 간주해야 할까? 심포지엄에 참여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사례비의 의미는 정당한 창작활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으로서 ’지급’(payment)과 예술창작행위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존경과 영예의 의미로서의 ’사례’(honorarium)가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례비에서의 ’비’와 ’사례’의 의미는 경제와 예술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에게 정당하게 작업을 한 만큼 그 대가를 지불할 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 비용을 마땅히 지불하는 이 이중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이해되고 인정될 때, 한국에서 예술인 복지와 권리는 비로소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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