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6호][칼럼] 우리시대의 여성혐오 (손희정)

우리 시대의 여성혐오

 

손희정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녹지> 48호 기고)

 

 

오늘 아침. 일찍부터 <녹지>에 송고할 여성혐오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가 못 볼 꼴을 보게 되었다. ‘남남북녀 결혼 주선’을 전문으로 하는 한 결혼정보회사의 프로모션 웹툰을 본 것이다. “북한여성의 장점”이라는 제목의 이 웹툰은 “성형을 안 해도 예쁘다, 나이 차에 신경쓰지 않는다, 가난한 국가(북한)에서 왔기 때문에 검소하다, 군대에 나녀왔으므로 개념이 탑재되어 있다,남한 여성들처럼 결혼 조건을 재지 않는다, 동방예의지국의 효를 배웠기 때문에 시부모에게 잘한다, 여타 국제 결혼과 달리 혼혈이 아닌 순혈 자손을 얻을 수 있다” 등을 북한 여성의 장점으로 꼽고 있다. 물론 ‘그녀’는 순진무구하지만 남편 앞에서만은 색녀로 변신한다는 고리타분한 성적 판타지 역시 (아니나 다를까) 등장한다. 이 웹툰은 그야말로 21세기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형성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열 장의 jpg 파일에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으며, 일종의 ‘민족지적인 사료’로 취급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여성혐오 이야기’는 우연히 마주친, 그러나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이런 웹툰을 중심으로 풀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우선 아주 간단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그토록 여자를 사랑해서 여자와 한 이불을 덮고 살고싶어하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가 어떻게 여성혐오적일 수 있을까? 혹은 그런 광고에 현혹되는 남자들을 어떻게 여성혐오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혐오의 사전적 의미란 ‘미워하고 싫어함’ 아닌가.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성혐오는 의외로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들에게서 오히려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기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온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 및 강박적 이상과 판타지일 뿐, 물질성을 띈 개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의 여성이 그 틀에 부합하지 않다면 그 여성은 당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비단 ‘호색한’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남성 간에 교환 가능한 소유물로 생각해 온 가부장제 사회에 만연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제 웹툰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 광고가 제안하는 북한 여성의 장점, 즉 최고의 배우자를 구성하는 요건들은 가부장제가 구성해 온 이상적인 여성성의 조건이며 ‘서양물 든 김치녀’라는 미묘한 조합의 남한 여성들이 더 이상 체현하고 있지 않은 미덕이다. 따라서 남한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북한 여성은 경외의 대상이 된다. 이는 물론 일부 남성들의 ‘여성혐오 판타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에 복무해 온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치즈코는 이와 같은 여성혐오는 ‘여성멸시’와도 같은 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멸시’는 당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여성혐오를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 웹툰에서 “예비 신부님은 저의 재산이나 직업, 집평수 같은 것은 안 궁금하신가요?”라고 질문하는 풀죽은 남자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당대의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멸시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삶의 조건 자체에 대한 불안 및 공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안과 공포는 자본주의 체제와 그것이 보장하는 평등한 기회, 평등한 풍요에 대한 믿음을 위협한다. 자본주의와 그 정치적 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남성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약속하면서 세계사에 등장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주의는 남성들 간의 평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에 대한 환상을 근간으로 할 뿐이다. 이 동등한 관계에 대한 환상은 재산의 규모와 사회적 지위 및 그런 자산이 부여하는 권능을 증명하는 여성에 의해 깨진다. 과거에는 ‘용감한 자가 미녀를 차지’했다면, 이제는 ‘돈=힘 있는 자가 미녀를 차지’하는 시대인 것이다. (혹은 ‘미녀’가 돈=힘 있는 자를 차지한다.) 무소불위의 이데올로기이자 정치경제체로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거짓 약속과 그 제도적 오류를 직시하는 것보다는, 그 오류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여성을 혐오하는 편이, 성별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더 쉬운 일이다. 이때 여성이 ‘액받이’가 되는 이유는 물론 자본주의가 성별중립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결합함으로써 ‘근대적 가부장체제’로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 불안과 공포는 경쟁자로서 등장한 여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와도 연결되어 있다.이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 이론이 밝혀왔던 것처럼 남성에게는 없는 여성의 재생산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차로 ‘가정주부화housewifisation’ 된 남성들의 생산력 상실과 연결되어 있다.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을 가치절하하는 논리가 ‘그들은 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착안하여, 노동력을 유의미한 생산성에서 탈락시켜 착취하는 과정을 ‘가정주부화’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이런 노동의 가정주부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성별을 가리지 않고 확대·가속화된다. 가정주부화된 남성 노동력은 비정규직이나 유휴 노동력으로 유연화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유휴 노동력’은 잠재적인 생산력이 아니라 그저 잉여로 처리된다.) 가정주부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통치성이 ‘유연성’과 만난다는 점에서 “자본이 지구화된 경제에서 비교 우의를 실현하는 최적의 전략”(미즈·벤홀트-톰젠, 2013, 83쪽)이 된다.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국민의 한 명으로 인정 받았던 남성들은, 자본주의 역사 이래로 처음으로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엄기호, 201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이 웹툰이 “북한 여성은 군대에 갔다 와서 개념이 있다”고 말하면서 ‘군대’와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군대 복무에 대한 보상심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를 통해 국민이자 유일한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고자 하는 심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역차별이라는 환상과 그 안에서 배태되는 상실감과 분노 역시 그 근간에는 여성혐오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주부화’라는 개념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이, 이처럼 불안정한 경제적, 정치적 지위는 여성들이 영원처럼 경험해 왔고, 스스로 그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조건이다.

 

이런 불안의 판타지 안에서 여성은 꽃뱀 혹은 먹튀녀가 되거나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서 얼마 안 되는 밥그릇을 강탈해갈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경쟁자로 등극한다. 90년대의 여성혐오 담론이 ‘아줌마’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반면 2000년대에는 ‘된장녀’를 지나 ‘김여사’로 이동하는 것 역시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아줌마’에 대한 혐오는 공적 영역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9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그래, 나 아줌마다”라는 선언의 형태로 아줌마를 구해내고 동시에 IMF 이후 한국의 경제적 몰락 이후 국가가 ‘아줌마의 생활력’을 재전유하면서 아줌마에 대한 멸시/혐오는 담론의 장에서 사그라든다. (물론 현실의 장에서도 사그라든 것은 아닐터다.) 그러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 ‘소비력’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혐오의 대상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된장녀’는 한 손에는 비싼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고급 가방을 든 도시 여성이었고 ‘김여사’는 명백히 ‘오너 드라이버’였던 것이다. 이는 여성혐오의 성격이 멸시에서 위압감 혹은 박탈감으로 전환되었음을 암시한다.

 

당대 여성혐오의 마지막 원인은 사적 영역에서 남자들이 경험하는 피곤함이다. 그것은, 이 웹툰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순진무구하며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외국 여성’과의 국제결혼이라는 남성 판타지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한 프랑스 저널리스트는 남성성에 대해 분석하면서’마초성’과 ’죄의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남성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아르케만, 2011). 그가 말하는 ’마초성’이란 68혁명 이전의 가부장제를 그리워하면서 현대를 개탄하는 남성우월주의이고, ‘죄의식’이란 68혁명 이후 ’모든 잘못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성들의 난감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죄의식은 모든 것을 남성의 탓으로 돌리고 남성을 비난하며 여성을 희생양의 자리에 올려놓는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둘 다 벗어난 남성을 ’화해한 남성’이라고 말하는데, 재미있게도 그가 예로 들고 있는 ’화해한 남성’은 러시아 여성과 국제결혼을 한 프랑스 남성들이다. 서유럽 여성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은 파트너와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는 남한 여성들로부터 느끼는 피곤함은, 이 남성 저널리스트가 느끼는 피곤함과 다르지 않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이야기에는, 그러나 분명한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백래쉬backlash’다. 즉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반발 혹은 반격에 불과한 주장인 것이다.

 

한 편의 웹툰을 통해 간단하게 살펴본 것처럼 우리 시대의 여성혐오는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가진 가부장제의 젠더질서가 자본주의라는 근대 정치경제체와 접목되면서 전지구적 가부장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현상이다. 거기에 그 성과를 보기 시작한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반발이 중첩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여성혐오는 탈역사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을 가진다. 물론 이 글에서 편의 상 네 가지로 정리한 요인들은 서로 쉽게 분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긴밀하게 얽혀있고 연관되어 있다. 혹은 오히려 한 가지 원인의 네 가지 차원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혐오란 단순한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여성의 이미지로 매개되는 사회적 권력 관계다. 특히 이 사회적 권력 관계는 여-남의 양성 간의 권력 관계일 뿐 아니라 여성을 교환가치로 환산하는 남-남 간의 권력 관계이기도 하며, 이를 ‘자기혐오’로서 경험하는 여-여 관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이성애적 교환경제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문화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권력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여성혐오’는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판타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간단히 폐기되지 않는다. 그 물적 토대 및 인식론적 토대와 대결하지 않는다면 여성혐오는 어쩌면 영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대결할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것 같다.

 

 

참고문헌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꿈지모 역,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동연, 2013.

엄기호,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남성성의 가능성/불가능성」, 권김현영 외, 『남성성과 젠더』,자음과 모음, 2011.

우에노 치즈코, 나일등 역,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2.

폴 아케르만, 이정순 역, 『Mr. 남성의 재탄생』, 사람의무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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