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페미니즘 소설’ 박물지
오혜진(문화과학 편집위원)
바야흐로 “페미니즘 소설 전성시대”다. 30대 여성작가들이 주요 문학상들을 휩쓸고, 미디어는 ‘페미니즘 소설’의 약진을 떠들썩하게 보도한다. 그래서 어젯밤, 이 ‘약진’하는 ‘페미니즘 소설’들을 책상 위에 쫙 펼쳐보았다. 흥미롭게도, 책들의 표지에 모두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여자들의 옆모습 혹은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누구지? 이 여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이 여자들은 마치 한 명 같다. 얼굴 없이 홀로 고요한 이 여자가 ‘지금 여기’, 2017년 남한 “페미니즘 소설”의 페르소나인지도 모른다.
최근 ‘페미니즘 소설’로 호명되는 작품들은 대체로 여아 낙태나 취업기회 불균등, 경력단절과 같은 성차별 현상, 디지털 성범죄 및 성폭력, 그로부터 파생된 ‘가해/피해’의 구도를 다룬다. 이는 분명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젊은 독자들이 가장 집중했던 의제들이 ‘낙태법 폐지, 디지털성범죄 근절, 문화예술계 성폭력 및 여성혐오 사례 고발’ 등 여성 안전과 생명에 대한 위협, 기회의 불균등이었다는 점과 관련되겠다.
물론 나는 이 책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조금 의아해진다. “페미니즘 소설”이란 건 그렇게 자명한 범주였나. 아예 표지에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써두기까지 한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의 발문을 쓴 이민경은 이 책에 대한 감상을 “페미니스트끼리 모여 있을 때의 기분”, 즉 “안도감”이라고 적었다. 그 기분이 뭔지 물론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적어도 어젯밤, 그 구절을 읽는 마음은 조금 심란했다. 적어도 내게 ‘지금 이곳’의 페미니즘은 “안도감”을 주는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전장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올해 한국문학계를 휩쓸었던 <82년생 김지영>을 생각해보자. 이 작품은 한국 근대 장편서사의 마스터플롯인 ‘여성수난사’에 대한 거의 최초의 인류사회사적 각주 달기를 시도했다는 점만으로 현실 고발 및 폭로의 효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김지영’은 여성 고등교육률이 남성의 그것을 상회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빙의’ ‘실성’과 같은 주술적·낭만적 장치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었고, 그 청자로 설정된 것 역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 상정된 남성이었다. 무엇보다, ‘김지영’은 바로 그 남성들에게 고통의 운명연대로서 ‘여성’이라는 범주를 호소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할머니, 여자 선배의 목소리까지 한 몸으로 체현하는 ‘동일화’의 문법을 고수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게 됐다. 현재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논쟁에서 보듯, 지금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 배제’를 말하고, ‘진짜 여성’에 대한 감별 행위가 횡행하는 때 아닌가. 메갈리아 이후, 남성의 전유물로만 생각됐던 호전성과 맹목성을 ‘여성성’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없게 됐으며, 그 호전성은 어느덧 ‘타자(성)에 대한 혐오’까지도 방불케 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문학은 어떤 “페미니즘 소설”을 갖게 될까.
‘생물학적 여성’만을 ‘안고’ 가겠다는 페미니즘 앞에서 이제 “페미니즘 소설”은 “안도감”을 주는 자명한 범주가 아니라,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질문의 장소’여야 하지 않을까. ‘여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진짜 여성’이라는 가상의 범주, 그 억압의 굴레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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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0744.html#csidx260395ca3f64063858bb591dd030a4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