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테러2호][칼럼]즐기자 월드컵, 잊지 말자 세월호(천정환)

「프리뷰」 한국 대 러시아

 

“즐기자 월드컵, 잊지 말자 세월호” : 대표팀은 노란 리본을 달고 뛰어라

 

천정환 (성균관대,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 저자)

 

 

1) 관전 포인트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런 축제는 없다. ‘세계’를 상상하고 만나게 만들고, 총질과 적대를 쉬게 하고, ‘외국인’과 평등하게 대화하게 하여 가난하고 힘 없는 나라의 젊은이도 가슴을 펴게 하는 데 스포츠 이상의 것은 없다. 그래서 저주 받은 한반도에 태어나 핍박받은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나, 가난과 전쟁에 찌든 남한ㆍ북한의 젊은이도 자신의 ‘사람됨’을 스포츠를 통해 상상하고 느꼈다. 남미나 아프리카 빈민가의 소년들도 마찬가지였겠다.

스포츠는 진정 진ㆍ선ㆍ미 모두를 품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는 처음부터 오염돼 왔다. 세상의 (거의) 모든 독재자와 착취자들이 스포츠를 통해 뭔가 해먹고자 했다. 히틀러도 전두환도, 세계적인 악덕 대기업들도 스포츠를 사랑(?)했다. 그래서 이 축제는 한갓 ‘공놀이’만은 아닌 것이다. 이놈의 ‘공놀이’는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국가’와 ‘국제’의 내용을 만들고 채워왔다.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항상 경기장 바깥의 ‘상상적 현실’을 창조해왔고 관중의 정체성을 재구조화해왔다. 월드컵 안에서의 상황과 월드컵 기간 동안 벌어질 문화정치의 여러 사안은 상쟁ㆍ상호작용하며, 사람들의 마음과 정세를 바꿀 것이다.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적 통치권력에 찌들어 병이 깊어지고 있는 두 국가의 대결, 한국과 러시아의 승부를 보는 내 관전 포인트는 이런 점이다. 박근혜와 김기춘, 그리고 짜르 푸틴은 자국 대표팀의 좋은 성적을, 또는 좋은 성적을 바라는 대중의 마음을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고심하고 있으리라.

 

2) 축구의 모순, 축구팬의 고민

설레지만 축구팬은 마음은 더없이 복잡하다. 순수한(?) 즐거움을 망치는 요소는 너무 많고 그것은 지속적으로 증폭돼왔다. 우선은 월드컵 그 자체이다.

신자유주의는 국제 스포츠자본주의의 모순을 심화시켜왔다. 스포츠 일국체제 위에 구축된 국제적 프로 스포츠는 스포츠산업과 미디어스포츠의 상업화를 가속화해왔다. 초국적 거대기업이 그 후원자이자 주체다. UN보다 가맹국이 많다는 FIFA만큼 치졸하고 약삭빠른 장사치가 또 있을까? FIFA 자체가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국제적인 독점 대기업으로서, 축구 경기의 모든 것에 엄청난 가격을 매겨놓았다. ‘선진국’의 중산층 이상이거나 부자가 아니면 월드컵 한 경기를 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브라질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참혹하다. 남한이 가난한 사람들과 독재에 저항하는 노동자ㆍ학생들을 찍어누르며 86아시안게임이나 88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루었듯, 브라질의 국가와 자본도 그런 일을 반복하고 있다 한다. 브라질에서는 올해만 최소 45명이 빈민가 철거 과정에서 사망했는데 그중 다수는 어린이였다 한다. 화려한 개막전이 열려 브라질이 3:1 승리를 거두는 동안에도 배고픈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남아공과 북경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국가와 자본의 축제는 곧 빈자들에게는 재앙일 수 있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고, 국가가 독점대기업의 하수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국가의 기만성은 더 커진다. 마름이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실망과 기대가 동시에 증폭된다. 그래서 국가 간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더 재밌는 것처럼 느껴진다. 달리 말해 자본의 운동 때문에 일면 국경이 흐릿해지고 있지만, 또다른 현실에서는 국가간 체제는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그런 상황을 반영한다.

현실의 모순이 심할수록 미디어는 극성을 부리며 환상을 생산하고자 하고, 실재와 환상 사이의 괴리는 더 증폭된다.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거나 개발도상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국제적 메가이벤트는 더 처절하게 자연과 인간 사이의, 민중과 자본 사이의 극심한 모순을 드러내고 또 은폐한다. 점점 심각해지는 모순 때문에 한켠에서는 ‘스포츠를 즐겨라’는 정언명령과 즐김에 대한 강박증이 더욱 커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지 축제와 스포츠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평창동계올림픽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3> 청와대와 집권당이 바라는 축제

물론 이 나라 안에서도 ‘축제’의 즐거움을 망치는 요소는 많다. 그것은 바로 한국과 축구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열 명이 넘는 동료시민과 청소년들이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박근혜 정권의 무능ㆍ부패는 참담하다. 뉴스를 보기가 겁날 지경이다. 밀양에서 광화문에서, 문창극과 김기춘이를 통해서, 그들은 끝없이 국민을 괴롭히고 대한민국을 침몰시키려 획책 중이다.

가장 평범한 ‘국민’조차 ‘도대체 이게 국가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도무지 제 정신으로 ‘대~한 민국!’을 외치기 어렵다. 이런 ‘세월호-국가’가 세계 16강을 했다, 8강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16강’은 ‘환상’으로서의 국가, ‘구조자 = 0’은 이 국가의 비참한 ‘실재’일 것이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괴리를 분칠하고 은폐하기 위해 이번 월드컵에서 언론과 정권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미디어 전략을 펼 것이다. 월드컵을 ‘국면전환+국민화합’의 도구로 삼고 싶을 테다. 누가 무조건 대표팀의 선전과 막무가내식 얼빠진 응원을 가장 원하고, 또 그것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겠는가? 정몽준식으로 말하면 심판을 매수해서라도 16강에 진출하기를 바랄 것이다.

 

4) 붉은악마와 ‘국가대표’가 할 일

축제의 의미를 띠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문제점을 노출해온 월드컵 거리응원도 오늘날 한국 미디어스포츠와 스포츠자본주의의 모순을 응축할 것이다. 한국대표팀과 붉은악마가 채택한 이번 월드컵 슬로건은 “즐겨라 대한민국(Enjoy it, Reds!)”이다. 애초에 스포츠국가주의를 좀 벗어나자는 좋은(?) 취지에서 선택된 것인데, 세월호 사건 이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충분히 애도하지도, 세월호가 남긴 교훈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상중에 열리는 축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관련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다.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은 월드컵 (시청) 보이콧을 선언한다. 정윤수ㆍ정희준 등의 논자는 거리응원의 중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모두 당연하고 정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대중의 눈과 귀가 온통 월드컵보도에 쏠리고, 이를 권력과 자본이 악용하려 하기에 보이콧이 능사일 수만은 없는 딜레마가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세월호 사건의 유족들이 고민을 단박에 정리해주었다. 유족 대표들은 먼저 붉은악마를 만나자 제안하고 “월드컵 응원열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며 붉은악마에게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며 표어까지 만들어주었다. `즐기자 월드컵, 잊지 말자 세월호’다. 축제는 즐기되 잊지 말 것! 우리가 처한 모순 속에서 이만한 적실한 행동방침은 없는 듯하다.

 

그리하여 축구팬들과 붉은악마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는가? 아니다. 유족들은 더 높은 사명을 축구팬과 붉은악마에게 부과한 것이다. 특히 2010년 이래 붉은악마는 사실상 존재 근거를 상실하고 있었는데, 스포츠의 사회적 책임과 축구장 안과 밖을 동시에 사고할 줄 아는 수준 높은 의식을 요청한 것이다. 붉은악마는 정몽준-김흥국 류의 축구관에서 벗어나 진정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붉은악마는 노란 손수건과 노란 플랭카드를 준비하여,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해야 한다.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인가? 무능부패한 정권과 천민자본주의가 300여명의 동료시민과 청소년들을 수장시켰다는 사실, 아직도 세월호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표팀도 노란 리본을 달고 뛰어야 한다. 노란리본을 단 사람들은 많고 리본은 그 자체로 모호하지만, 리본은 최소한의 요구이고 최소한의 환기이다. ‘국가’대표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대표해서 뛰기 바란다. 혹 골을 넣는다면 희생당한 청소년들을 위해 골세리모니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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