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호][칼럼]융성에 춤추고, 융합에 뒤틀리는 인문학(오창은)

[들끓고 쏠리다]  융성에 춤추고, 융합에 뒤틀리는 인문학

 

오창은 |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

 

옛날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상수리 나무가 있었습니다. 수천마리의 소가 그 나무 아래서 노닐 정도였다고 하네요. 구경꾼들이 모여 장터를 이루었는데도 석(石)이라는 뛰어난 목수는 외면하며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가 놀라서 “그 동안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이처럼 훌륭한 나무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어찌 그냥 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석이는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짜면 썩고, 그릇을 만들면 부서지고 마는 나무”라고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는 나무임을 한 눈에 알아본 석의 안목이 놀랍지요.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석이의 꿈에 그 상수리 나무가 나타나“그대는 나를 무엇에 비교하려는가? 나는 오래 전부터 내가 쓸모 없기를 바랐네.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클 수 있었겠는가? 그대나 나나 한낱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대는 상대방만을 하찮다고 한단 말인가?”라며 호되게 훈계를 합니다. 상큼한 반전이지요. 유용함은 누구의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크게 갈릴 수 있습니다. 그 상수리 나무는 수천마리의 소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일 수 있지만, 배·관·그릇 등을 만드는 인간에게는 쓸모 없을 뿐인 것이지요. 궁극의 목적은 누군가에 의해 쓰임새로 판별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쓰임새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자』(오기남 풀이, 현암사, 1999)에 나옵니다.

인문학 열풍도 상수리 나무 이야기에 빗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문학은 그간 방치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폐과되었고, 인문학 교양수업은 비실용적이라면서 너무나 섣부르게 축소되었습니다. 인문학 전공자들도 당연히 대학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었지요. 인문학자들은 각고의 노력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저작들을 집필하고, 삶의 현장에서 ‘거리의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시민 인문학 열풍’은 유용성으로 인해 배제되었던 인문학자들이 노숙인 인문학, 소외계층 인문학, 대중 인문학 등을 통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수천마리의 소가 어울리듯,자연스러운 쓸모가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요. 삶과 더불어 호흡하는 인문학은 ‘쓸모없음’이 만들어낸 ‘쓸모 있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 관련 이야기에는 비극적 반전이 기다리고 있네요. 인문학이 쓸모 있다고, 그것도 국가적 차원에서 인문학 진흥에 힘을 기울일 만큼 쓸모가 있다고 정부가 나서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정부의 주도 아래 2013년 11월 19일 ‘인문정신문화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014년 2월 17일에 인문학진흥을 담당할 부서로 문화체육관광부에 ‘인문정신문화과’가 신설되었습니다. 앞으로 인문정신문화진흥법이 제정되고, 인문학 대중화를 위한 국민독서운동도 전개된다고 하네요. 국가가 인문학을 사랑해주고, 국민들의 독서까지 챙긴다고 하니, 인문학이 드디어 도끼의 날 앞에 선 상수리 나무가 되었네요.

우려스러운 부분은 정부의 인문학 사랑이 아니라, 정부가 인문학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쓸모’입니다. 인문학이 앞으로는 창조경제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고, 문화융성을 이뤄내는 도구가 되고, 학문융합을 통한 고부가가치 산출의 자원이 된다고 합니다. 철저히 ‘쓸모’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 쓸모에는 ‘국민계몽’도 포함되어 있고, 국가이데올로기도 기입되어 있으며, 혁신적 제품 생산의 꿈도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습니다.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의 미래』(이은정 옮김, 동녘, 2011)에서 ‘현재의 지배적 관점에서 벗어나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대안에 입각해 비전을 마련하려는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쓸모 없음이 미래의 대안으로 이어진다는 월터 카우프만의 생각은 『장자』에 나오는 상수리 나무 이야기와 묘하게 겹쳐집니다.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인문학 진흥은 성과를 산출해야만 하기에 인문학의 궁극적 존재이유를 망가뜨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통치의 수단으로서 인문학이 호명되는 순간, 인문학의 무용적 가치는 뒤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경향신문> 2014년 3월 29일자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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