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호][칼럼]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의 공화국(김정한)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의 공화국

 

 

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이것이 국가인가?’ 이 물음에는 ‘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라는 사회적 환상이 담겨 있다.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고, 위험에 처한 국민을 구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세월호의 승무원들은 대부분 단기 계약으로 일하는 비정규직으로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고, 해경은 구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방관했으며, 정부는 상황을 파악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 채 인명을 구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더구나 정부와 해경이 구조와 수색의 독점권을 부여한 ‘언딘’이라는 민간구난업체는 외려 인명 구조 요청은 받은 적이 없다고 변명하고, 세월호를 운영한 청해진해운은 정부 관료, 공무원, 정치인들과 유착해 안전에 대한 고려 없이 탐욕스럽게 돈벌이 사업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거의 모든 방송과 신문은 객관적인 보도와 진상 규명을 외면할 뿐 아니라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정부를 변호하려는 행태를 보였다. 정부기관, 민간업체, 대기업, 언론 등이 모두 총체적으로 부패해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하며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것이 바로 국가다’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의의 핵심 정책들 가운데 하나는 외주화(outsourcing)이다.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과 작업의 일부를 외부 전문업체에 맡겨서 생산비용을 절감한다는 논리로 시행된 외주화는, 기업 내부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폭 축소하고 외부의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로 대체하는 ‘노동의 유연화’를 동반했으며, 노동과 작업에 따르는 각종 위험 상황에 대응해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방어하는 일차적인 ‘안전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약화시켰다. 노동조합의 감시와 견제를 벗어난 기업 활동은 노동자들의 안전에 무감하고 이윤 획득에 민감한, 생명이 아니라 돈이 더 중시되는 잠재적으로 잔혹한 사회를 만들어왔다. 또한 이와 같은 기업과 시장의 논리는 정부의 운영 원리로 스며들었고, 이른바 ‘CEO 대통령’이라는 표현처럼 ‘민주 국가’는 ‘기업 국가’로 변모했다. 국가의 재정 악화를 타개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의 주요 기능은 점차 외주화되었다. 여러 공공기업의 민영화가 이루어졌고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는 분야도 사기업으로 이전되었으며, 이처럼 국가의 공공성이 해체됨으로써 시민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민간 경비ㆍ소방업체와 계약하거나,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각종 민간 보험업체에 의존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경의 역할과 기능이 ‘언딘’이라는 사기업으로 외주화된 것은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정부는 외주를 주었으니 책임이 없고, 외주업체가 담당하는 전문적인 업무를 관리할 능력도 없다. 그리고 외주를 맡은 사기업은 다시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남기는데 매진함으로써 국민의 공공성과 안전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난다.

 

  이 모든 과정에 대해 우리는 사실상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알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시장경쟁의 원리에 맞춰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발하고 관리하는 ‘자기 관리 주체’로 행위했고,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들을 사회의 열패자로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묵과해왔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알지 못하는 앎’(unknown knowns)이 이런 것이다. 잘 알고 있지만 부인하고 있는 앎이다. 오늘날의 냉소적인 주체들은 ‘이런 것이 바로 국가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라는 듯이 행위하며 살아왔다. ‘민주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하며 놀라서 분노할 때, 우리가 무의식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에 민주주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로 많은 이들이 정신적 충격을 느끼고 사회적 공황(panic) 상태에 빠진 이유는, 국가에 대한 ‘알지 못하는 앎’을 유지시켜온 ‘민주 국가’라는 사회적 환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환상의 이면에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상 자체가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면, 무너진 것은 사회적 환상만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현실 자체이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가 제시한 과제가 있다면 무엇보다 사회적 환상과 현실 세계를 다시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일이다. 부정(‘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의 부정(‘이런 것이 바로 국가다’)을 넘어서는 새로운 긍정으로서 ‘이것이 우리의 국가다’라고 자임할 수 있는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이 요청하듯이, “지금은 침몰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끄집어서 소생시키느냐,아니면 그대로 빠뜨려 죽이느냐 하는 기로에 있다.” 이미 세월호 참사는 무너진 폐허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행위 준칙을 정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만히 있으라.’ 부패하고 무능한 국가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행위는 ‘가만히 있으라’에 준거할 것이다. 이는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와 공명한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 … /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나 / … /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바보 같이 살고 있지 않나 / 아, 대한민국 /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리는 너무 오래 질기게 가만히 있었다. 그리하여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치적 대표자들을 구성할 때까지 세월호 사건은 지속적으로 ‘우리’와 ‘그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동국대학원신문, 184호 2014년 06월 0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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