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4호] [2030 잠금해제] 정치언어의 품격과 ‘혐수막’들 (오혜진)

한겨레신문 기고문

 

[2030 잠금해제] 정치언어의 품격과 ‘혐수막’들

 

오혜진 (문화연구자)

 

 

가끔 피로할 때 공원을 산책한다. 잘 가꿔진 꽃나무들에 이름표가 빼곡히 달렸다. 그 수고스런 열정에 감복하다가도, 문득 이건 지나친 계몽강박이 아닌가 싶어 답답해진다. 그냥 이 식물들의 익명성을 조용히 음미하면 안 되나. 한번은 산에 갔더니 ‘한국의 명시’를 적은 플래카드들이 등산로 곳곳에 걸려 있었다. 아무리 시가 좋아도 단풍을 가릴 이유야 있었을까. 지하철 승강장에서도 스크린도어에 적힌 정체 모를 시들을 감상하게 되는데, 이게 진정 시민들의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되나 싶다. 이쯤 되면 이 나라엔 빈 공간만 있으면 글자를 채워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문자강박이라도 있는 건가 의심스럽다.

 

그나마 꽃나무 이름표처럼 일말의 지시성과 정보성이라도 지닌 텍스트들은 좀 낫다.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정보 전달이나 정서 순화와는 무관한 문자더미들을 무시로 만난다. 수년 전부터 유행이 된 듯한 정당들의 홍보 현수막이다. 1초면 달 수 있는 ‘인터넷 댓글 전성시대’에 한 번 쓰고 버릴 현수막들이 나붙는 광경은 꽤 흉하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광우병 천안함 이젠 테러방지법도 왜곡 ‘그들이 또’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같은 새누리당의 문구들은 악명 높거니와, “박근혜 정부가 일 좀 하게 해주세요” “하늘이 감동할 때까지 새누리당의 노력은 계속됩니다” 같은 구호들은 처절하다. 현수막 정치의 장본인이 내건 “현수막 정치 지겹지도 않으십니까?”라는 현수막은 실소를 자아낸다.

 

내용과 디자인 양면에서 해로움과 촌스러움을 과시하는 이 현수막들을 보는 것은 괴롭다. ‘혐수막’이라는 말도 나온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무시는 기본이며, 사실 왜곡 및 날조가 횡행한다. 이념과 정책은 실종되고 감정에 호소하는 문구들이 판친다. “국민 편이 하나쯤은 있어야지! 국민 편이 되겠습니다”(국민의당) “소녀상의 눈물 국민과 더불어민주당이 닦아드리겠습니다” 같은 야당의 구호들도 막연하긴 마찬가지다. 독재시절의 정치구호였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 “잘 살아보세” 수준으로 퇴화한 것 같다.

 

현수막 정치가 시각공해의 주범이며, 대중의 우매화 및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파시즘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은 익히 지적돼왔다. 구호가 아니라 정책으로 말하라는 주문도 먹히지 않는다. 물론 대중의 정동을 자극해 정치적 자원으로 삼는 것은 대중정치의 핵심이다. ‘정치구호’는 대중의 관심을 비교적 빠르게 집결시키기에 선호된다. 그러나 ‘구호’는 사태의 복잡성을 손쉽게 단순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섬세하게 다뤄져야 한다.

 

해방 직후의 혼란상을 묘사한 이태준의 소설 <해방 전후>에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자신의 행보를 정하지 못한 주인공 ‘현’이 회관에 함부로 내걸린 광목 드림(현수막)을 보고는 “이들이 대중운동을 이처럼 경솔히 하는 줄은 정말 뜻밖이오”라며 비 맞은 드림을 끌어올리는 장면이다. 정치언어의 품격이야말로 선진정치의 지표라는 점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필리버스터가 잠시나마 시민들을 열광케 한 건, 막말과 욕설이 아니라 멀쩡하고 조리 있는 ‘조국’의 언어로 정치가 행해지는 광경을 목도한 기쁨이었다는 걸 잊지 말자. 성숙한 시민의 정치는 단말마적인 ‘정치구호’가 아니라, 논리적 설득과 성실한 토론, 그리고 실제 행해지는 참여와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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