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4호] [청춘직설]‘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손희정)

경향신문 기고문

 

[청춘직설]‘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손희정(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동일본 대참사로부터 5년이 흘렀고, 한 달 후면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돌아온다. 우리는 여전히 재난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재난과 그 영향을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재난은 평등하게 닥쳐온다”고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화 <2012>는 인류를 집어삼킬 자연재해에 대비해 21세기형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방주에 올라탈 수 있는 자들은 정보를 독점한 권력층과 소수의 엘리트, 그리고 방주 제작에 투자한 ‘세계적 갑부’들이다. 영화는 범작이지만 그 상상력만큼은 예리하다. 기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평등하지 않다. 돈과 힘을 가진 자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삶이,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 삶이 따라붙는다. 이는 닥쳐올 위험과 희생을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수해버리는 이 세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이를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누군가의 이익이 다른 누군가의 “생활(생명·건강·일상)을 희생”시키면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원자력 발전은 이 시스템의 섬뜩한 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 보여주는 것처럼 원전이 건설되는 지역은 ‘핵폭탄’을 떠안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핵마피아, 발전주의를 지속시키려는 국가, 그리고 전기의 편리함을 누리는 도시인이 이 시스템의 수혜자들이다. 후쿠시마의 사람과 동물, 그리고 자연이 그 희생양이 된다.

 

물론 누군가는 질문할 것이다. 후쿠시마도 원전 유치로 경제적 이익을 얻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본과 인력이 대도시로 몰려들었던 근대화 과정에서 후쿠시마는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런 후쿠시마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전 및 핵폐기물 처리장 유치를 두고 지역주민들 간에 분란이 생기는 것은 ‘위험한 사업’이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성 1호기 주변의 피폭 피해가 날로 증가하고 있듯, 이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지속 불가능한 개발에 불과하다. 희생의 시스템은 강요된 환상을 통해 유지된다.

 

결국 원전이 폭발했을 때 시스템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못했다. 삶의 기반을 버리고 온갖 비용을 감당하면서 피난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피폭의 두려움 속에서 삶의 터전을 지킬 것인가. 선택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쿠시마 사람들은 ‘원자력 폐기물’ 취급을 당했다.(다카하시가 ‘희생의 시스템’에서 예로 들고 있는 “후쿠시마 현민들은 어디에다 버리지?”라는 인터넷 댓글은 인상적이다.) 이렇게 일본인은 혐오와 차별을 통해 후쿠시마와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원전 자체의 위험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한국인이 세월호 유가족을 타자화함으로써 세월호 참사를 서둘러 잊으려는 ‘외면의 체계’를 형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희생된 것은 후쿠시마만은 아니었다. 노동자 역시 그랬다. 원전 폭발 직후 현장을 지킨 것은 노동자였고, 그중에는 심각한 피폭으로 사망한 이도 있다. 여전히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는 원전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하루 약 7000명이고, 지역 재건에 투입되는 제염노동자는 하루 3만~4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생명을 담보로 참사의 뒷감당을 하고 있을 때,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책임자 중 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에서 진상 규명은 물론 요원하다. 희생의 시스템은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을 ‘후쿠시마 50인’ 등의 이름으로 부르며 영웅시하고 그 노동을 ‘귀중한 희생’으로 미화하면서 또 다른 희생에 기대려 할 뿐이다. 위험한 노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을 생각하면 ‘탈핵’은 정확하게 계급과 노동의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위험이 분배되는 세계에선 ‘안전’의 의미도 배타적으로 구성된다. 다큐멘터리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이다 모토하루)에 따르면 대지진 당시 지역 장애인 중 2%가 사망했다. 비장애인 사망비율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다. 안전에서의 장애인 배제와 차별은 원전 폭발 후에도 계속됐다. 정부는 “피난하라”고 지시했지만, 그 무책임한 알림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같은 의미로 도달하지 않았다. 안전한 피난의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피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의 대형 참사에서 10대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피해자가 특히 많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재난은 참사가 된다. 재난을 막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재난이 사람에 의해 참사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재난의 경험이 남긴 질문과 교훈에 성실하게 응답해야 할 것이다. 오는 3월18일부터 시작되는 ‘4·16 씨네토크’는 이 응답을 위해 준비한 행사다. 다양한 영화를 보고 재난자본주의, 재난시대의 혐오, 진상규명, 공감과 연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상영작 중 한 편이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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