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7호][칼럼]#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손희정)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글.손희정
(여성신문 기고문)

시대를 풍미하는 여성혐오와 반동적 복고주의
페미니스트 혐오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페미니스트가 뭘 잘하고 못 하고에 선행하는 문제다.
가부장제 사회는 그 사회가 만들어 온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 및 강박적 이상과 판타지에 부합하는 여성들은 숭배의 대상으로,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혐오의 대상으로 구성한다. “창녀 vs 성녀”의 이분법적 도식이다. 이런 구분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억압적인 성 역할을 내면화하게 함으로써 자율성을 단속하며, 여성 공동체를 분리해서 지배하는 영리한 통치술이다. 조강지처 vs 신여성, 현모양처 vs 여권주의자, 여성 노동자 vs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개념녀 vs 된장녀… 이런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신여성, 여권주의자,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된장녀’ 등 혐오의 자리에 놓여있는 ‘여성/여성 이미지’는 언제든지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대체될 수 있다. 실제로 페미니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김태훈의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페미니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그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태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인 여성멸시와 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이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여성을 싫어하고 폄하하는 태도는 멸시라기보다는 혐오phobia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느 정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나 ‘위협감’을 동반한다는 의미다. 김태훈은 ‘무뇌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면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런 여성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남성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남성들은 “살아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에 따라 ‘무뇌아적 페미니스트’들에게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지표는 2000년대 이후 여성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여성혐오는 여성들의 공적 영역 진출이 약진했던 1990년대보다, IMF 후 여성들이 더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내몰렸을 때 오히려 더 심해졌다. 이는 여성혐오가 여성들의 ‘개선된 현실’에 근거한다기보다 사회의 전반적인 정치, 경제적인 상황과 연관되어 있음을 뜻한다. 기득권으로서 정치적, 경제적 주체였던 남성들이 경제적 안정은 보장받지 못하고 정치적 발언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며, 그러한 권리들을 박탈당했을 때도 보수적인 문화 안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남성의 역할을 강요당할 때, 그들은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을 ‘밥그릇 쟁탈전’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공격한다. 과거를 향수하는 반동적 복고주의의 도래다.

페미니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백래쉬(backlash, 반발)

페미니스트 혐오가 여성혐오만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는 “누구를 페미니스트로 상상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1990년대 말에는 오한숙희나 구성애, 전여옥, 공지영, 유지나, 변영주 등을 떠올렸다. 2010년대의 ‘페미니스트’는 누구일까? 김미경 같은 자기 계발 멘토나 곽정은 같은 섹스 칼럼니스트, 혹은 자수성가형 CEO이자 ‘퀸메이커’ 김성주 같은 여성들이 아닐까?
경제력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소비주체로서의 여성의 등장이 페미니즘의 완성이고, <섹스 앤 더 시티>가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텍스트로 독해되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다. 페미니스트의 대표 이미지 역시 ‘엘리트 여성’들이다. 경제력, 성적자기결정권, 소비 주체는 페미니즘의 오랜 의제였다. 이들 목표가 달성됐다면 그 역시 페미니즘의 성과다. 문제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다. 자본주의는 페미니즘의 의제조차 상품화해 시장의 영역으로 포섭해 버린다. 자기계발서는 나를 상품으로 만드는 수사다. 섹스 칼럼니스트의 연애 지침은 ‘결혼 시장’을 활성화하는 이성애 연애의 상품화와 다르지 않다. 김성주의 자수성가 스토리, 회비 한 번 내지 않고 대한적십자사의 총재가 된 모습이 우리 시대 페미니스트가 지향해야 할 바인가? 그것은 그저 무한경쟁 시대에 도덕은 사라지고 자신의 생존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동물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이크를 쥐고 대중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몇 안 되는 여성들이기에 ‘페미니스트’의 대표가 된다.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게 페미니즘의 목표 중 하나지만, 목소리를 낸다고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이렇게 묻고 싶다. 페미니즘의 상품화는 페미니즘의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페미니즘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 아닌가? 이를 페미니즘을 교묘히 포섭하여 무력화시키는 신자유주의의 반격으로 이해하고, 또 정치적으로 그렇게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
년대 이후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자본주의, 국가주의는 가부장제와의 공모 없이는 등장도 유지도 불가능했음을 밝히고, 그 안에서 ‘약한 고리’를 찾아 세계의 지배적 체제를 전복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바탕에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여성해방은 물론 인간해방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자각이 있다. 페미니즘은 존재 그 자체로 근대적 지배 체제의 거대한 구멍과 역설을 드러낸다. 위협적인 철학이자 정치경제학이며, 윤리학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페미니즘의 일부분을 자신의 관심사로 끌어안아 페미니즘의 혁명성에 차폐막을 친다. 신자유주의에 동조하고 편승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해서 이를 페미니즘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규정하고 페미니즘의 전복적인 상상력과 실천적인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가 원하는 바일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백래쉬는 일부 여성들의 성공을 가시화하고 강조함으로써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과 공/사 구분에 기초한 성별분업체제를 가린다. 이 착시 효과는 남성들에게 불안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나아가 사회 전반의 불안과 분노로 연결돼, 문화적으로는 반동적 복고주의를 불러온다. 그 위에서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는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덮고 스스로 영속할 이데올로기적 바탕을 마련한다. ‘무뇌아적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으로 상상되는 상품’은 그 궤를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트위터에서 촉발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등으로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층적인 결, 긍정적 에너지 그리고 민우회 회원 증가 등이 유의미한 흐름이 될 수 있도록,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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