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5호][칼럼]‘이자스민’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상(최철웅)

‘이자스민’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상

 

최철웅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이자스민의 미친 법 발의를 막자”는 선동이 횡행하고 있다.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서 다문화가정의 복지 및 아동 보호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자스민은 그 자체 우리사회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가 집중되고 각축을 벌이는 민감한 ‘정치적 장소’가 되었다. 다문화가정의 복지에 관한 법률과 제도를 제정하려 할 때마다 그녀가 ‘원흉’으로 지목되곤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의된 ‘아동복지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실제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발의에 동참한 다른 9명의 의원도 모두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이다. 그러니 이자스민 의원이 발의했다는 것부터가 그릇된 사실이다.그럼에도 이자스민이 소환된 것은 이 의원이 비슷한 취지에서 이주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안의 발의를 꾸준히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지난 4월 ‘이주아동권리보장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의 출생등록과 건강 및 교육권 보장을 위한 법률제정의 필요성을 촉구한 바 있다. 당시에도 이미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이자스민을 성토하는 반응이 뜨겁게 분출됐었다.

현재 국내에는 이주노동자와 불법체류자, 난민 등을 포함해 미등록 이주아동이 2만 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여기서 미등록이라 함은 부모가 불법 체류 상태거나 난민으로서 자국 대사관 출입을 꺼려 출생등록을 못한 경우를 의미한다. 출생등록을 하지 못한 이주아동들은 국적도,시민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출생등록을 하지 못하면 본인임을 증명할 수 없기에 학교 진학은 물론 병원 진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교통카드 발급, 인터넷 등록, 휴대폰 개설, 은행 계좌 개설 등의 필수적인 일상 행위마저 본인 명의로는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불법 체류하는 성인에 대해서는 엄격히 단속하더라도, 아동에게는 다양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나 국가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 한, 부모의 불법적인 신분으로 인해 기본적인 권리들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다. 1990년 발효된 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은 출생 후 즉시 해당 국가에 등록되어야 하며, 출생 시부터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진다.’(제7조 2항)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은 이주아동의 권리보장에 관한 한 매우 열악한 수준으로,인권단체들의 요구로 초·중·고교 입학과 예방접종만을 허용해주고 있는 형편이다.

 

부르주아적 공포와 인종주의

이주아동 권리보장 법안 발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불법체류자들이 납세 및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국민의 세금을 들여 복지를 제공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아동들의 권리보장을 이유로 불법체류를 합법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는 다소 사태를 단순화한 억지 주장에 가깝다. 소득세 등의 직접세는 내지 않더라도 소비행위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간접세는 납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법체류자라 해서 무슨 대단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대부분 합법적인 체류기간을 지나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이들이 떠났을 때 당장 대체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관계기관의 암묵적인 묵인 하에 서로 눈감아주고 있는 형편이다. 저임금으로 부려먹으면서도 영구적인 시민권은 부여하지 않으려는 이주노동자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가 이들 불법체류자들인 셈이다.

불법체류자들에게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제하려면 그들에게 합법적인 시민권을 부여하면 된다. 아마 그것이 불법체류자들로서도 바라는 바일 터다. 그렇다면 불법체류자와 그 아동들의 권익보장에 비판적인 이들도 이러한 해법에 찬성할까? 단지 의무와 권리의 비대칭성만이 문제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외국에서 한국인 이주자가 똑같은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상호주의에 입각해 우리도 선진국에 준하는 권리보장을 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기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과 공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대한 이민정책으로 수억 명에 달하는 동남아인들이 한국으로 몰려들고,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한국여성과 의도적으로 결혼하려 들 것이라는 공포를 종종 내비치곤 한다.그들에게 동남아시아 출신 불법체류자는 ‘일자리는 물론 우리의 여성과 안전마저 훔치는 이방인들’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엔 지젝을 빌어 인종적 타자들이 우리의 향락을 욕망하고, 나아가 어떤 낯선 향락에 도달했다는 불쾌감이 깃들어 있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적 공포와 더불어 인종과 성을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중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화된 인종주의와 통치전략

 

우리는 이러한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발현을 간단히 개인의 욕망의 구조나 시민의식의 미성숙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부의 통치전략과 맞물려 철저하게 제도화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 권리보장과 다문화가정 지원 의제를 새누리당이 선점하고 보수일간지들이 우호적인 담론을 펼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보수우파는 다문화주의에 대해 오히려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저출산과 인구감소 경향, 중소기업의 인력난과 농촌총각들의 결혼문제,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한류의 경제적 효과 등을 고려할 때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을 적극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포용적이고 온정주의적인 수사와 달리 실제적인 이민정책은 소위 ‘두 외국인 전략’에 기초하여 매우 차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초 ’해외 우수인재 유치·활용 방안’을 발표하면서 “글로벌 인력을 확보해 창조경제를 실현”하고자 우수인재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고 비자발급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정부가 염두에 둔 우수인재는 연구자와 비즈니스 전문 인력, 유학생 등이며, 이들의 국내 체류기간을 최대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여기에 제 3세계 출신 저임금 노동자들의 자리는 주어져 있지 않다. 애초에 그들은 영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지는 5년 체류기한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우수인재’는 민족과 국민으로 적극 포섭하되, 단순노무인력은 경제적 효용만 뽑아먹고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이중적 통치전략인 셈이다. 여기엔 뿌리 깊은 선진국 콤플렉스와 동남아인들에 대한 멸시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계급적 인종주의를 넘어서

 

이런 점에서 보수우파의 관용적 다문화주의와 자유주의적 형평성의 논리는 기실 계급적 인종주의의 한 판본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다. 그들에게 공히 문제가 되는 인종적 타자는 외국인 일반이 아닌 제3세계 출신 이주노동자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종적 타자를 향한 우리사회의 시선은 철저하게 이중적이다. 우리는 선진국 출신 백인 이민자를 다문화가정이라 부르지 않으며, 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체류하는 것에 은근한 뿌듯함마저 느낀다. ‘농촌총각에게 시집오는 동남아 여성’은 가부장적 부계혈통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용인되나, 한국여성과 결혼하고자 하는 동남아 남성은 불쾌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주노동자와 불법체류자에게 온정과 자선을 베풀 순 있지만, 그들에게 제도적·정치적 권리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 관용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윤리적 실천에 머물러야지,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의 권리로서 제공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우리사회에 팽배한 제국주의적 다문화주의와 형식적 자유주의는 실질적인 자유와 권리 보장이 부재한 공백을 비집고 들어가 차별과 배제를 지속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불법이민자들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비단 우리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불균등 발전으로 인해 제 3세계의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선진국으로 밀려들고, 선진국의 질 낮은 저임금 일자리는 그들에 의해 채워진다. 이민 수용국은 그들의 경제적 기능을 필요로 하나, 정치적 권리를 제공하는 것은 꺼려한다. 결국 불법적인 신분에 처한 이민자들에게는 사회적 낙인과 편견이 덧입혀지고,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으로 인해 국내 노동자와의 갈등과 마찰이 고조되며, 범죄를 비롯한 사회불안의 잠재적 요소로 간주되기에 이른다.이런 추세는 한동안 역전되지 않을 것이며, 그 여파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형태로 끊임없이 강화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한 보편주의와 국제주의적 이념의 재구성이 시급한 정치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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