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9호][칼럼] 끝에서 시작으로 (이명원)

[한겨레 기고문]

끝에서 시작으로

이명원(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정치세력들은 박근혜가 현재 처한 상황을, 차기 대권을 둘러싼 혹은 개헌에 따른 이해득실을 따지는 이해관계의 장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민들은 낡은 시대를 ‘끝’장내야 한다는 것, 그와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어야 한다는 ‘일반의지’를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피의자인 박근혜가 형사상 소추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입헌주의를 노골적으로 파괴·조롱하는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나, 개헌을 빌미로 탄핵안조차 미적거렸던 여야 의회세력 모두 시민들의 일반의지와는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그들만의 ‘특수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혼용무도의 몸통이고, 의회세력들은 그것의 앞잡이이자 뒷잡이의 노릇을 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대의기관’이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 대신, ‘대표한다’는 뒤틀린 나르시시즘과 뒤틀린 권력의지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나라가 이렇게 내적으로 멸망 직전인 것은 박근혜와 여야 정치계급들이 이해관계가 상통한다면 언제고 결합/분리될 수 있는 유사가족이기 때문이다. 내 판단에 이들은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선출된 왕이나 귀족처럼 행세하고 있다. 이들에게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데 필요한 인용문 정도로만 취급되는데, 인용해 놓고 출처조차 밝히지 않는 정치적 표절을 밥 먹듯이 반복하고 있다.

시민들은 정녕 바보인 것일까. 그래서 저 엉터리 같은 책략들이 난무하는 청와대와 여의도와 서초동을 바라보며, 한 자루 가냘픈 촛대에 의지해 겨울나무처럼 이 차가운 광장에 서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금 시민들은 하나의 명백한 ‘끝’을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은 박근혜 정권의 종언만으로는 만족될 수 없는 장엄한 플롯이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끝장내지 않고서는 시대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것을 예감한다. 게다가 오늘의 시대는 거대한 전환기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포함한, 장기지속되던 제반 질서 모두가 싫든 좋든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요구하고 있다.

그 시작은 타협적이거나 땜질식 처방은 아닐 것이다. 지난 역사의 과정에서 우리는 숱한 배신의 계절을 경험했다. 권력을 가족처럼 분점한 세력들은 “잠잠하라 양들아” 하는 식으로 시민들의 희망을 모욕적으로 배반하는 과두정치를 지속해왔다. 그들은 해체되어야 할 시점에 동정에 호소해 “도와주십시오”라고 무릎을 꿇는 척했고, “과반수가 되어야 저들을 견제할 수 있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동정과 눈물을 선량하게 믿었던 시민들은 과거에도 그렇듯, 막상 집합적 열망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양 세력 모두에게 그것을 부정당하는 배반의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또 속지는 않겠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은 권력을 그들에게 위임하지 않는 시민들의 정치적 표현과 행동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다짐하자. 시민들의 일반의지를 대의하지 않는 정치세력은 그것이 박근혜건 의회세력이건 분쇄해야 할 명백한 시민들의 ‘적’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새로운 ‘시작’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광장으로 권력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 광장에서 싸우고, 토의하고, 계획하고, 웃고 떠들어야 한다. 주권재민의 사문화된 정치철학적 원리를 현실로 만드는 비타협·비협력·저항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신속하게 박근혜 정권을 ‘퇴출’시키는 데 동참하지 않는 세력은 모두 시민과 민주주의의 ‘적’이다. 새로운 ‘시작’의 최소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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