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4호] [야! 한국사회] 식민주의, 파시즘, 법 (권명아)

한겨레신문 기고문

 

[야! 한국사회] 식민주의, 파시즘, 법

 

권명아 (동아대 국문과 교수)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많은 논란이 분출하고 있다. ‘위안부’ 동원이라는 전시 성노예 동원 제도는 어느 날 갑자기 출몰한 게 아니다. 또 이른바 ‘보편적’인 근대 가부장 국가의 ‘보편적’ 차원의 연장도 아니다. 관련한 실명 비판도 필요하지만, 전략적 소모전에 말려들 필요는 없다. 소모전의 덫에서 벗어나, ‘위안부’ 동원을 식민주의와 파시즘 비판, 젠더 연구의 차원에서 더욱 심화시켜야 할 때이다.

 

‘위안부’ 동원은 성에 대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관리가 전시 동원의 체제적 운영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성에 대한 ‘국가적’ 관리는 풍속 통제라는 더욱 넓은 법적 구조에서 이뤄졌다. ‘위안부’ 동원에 관한 연구가 모두 풍속 통제 연구로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에 대한 식민주의적 관리가 전시 동원 체제로 이어지고 여기서 법이 작용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은 이른바 ‘자발성’과 강제에 대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풍속 통제는 ‘선량한 풍속’과 이를 침해하는 ‘풍기 문란함’이라는 무규정적 규정을 통해 식민지 주민들을 끝없이 분류하고 위계화하고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벌 받고 모욕당해 마땅한 ‘문란한 여성’과 보호받아야 할 ‘선량한 여성’이라는 분류 체계는 이런 식민지 풍속 통제의 ‘법적 이념’에 의해 구성되고 재생산되었다. 풍속 통제의 법제는 이와 관련된 세부적 법 조항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관련된 모든 법 조항을 무작위로 적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과정에서 법의 자의적 적용은 필연적이었고, 법을 집행하는 ‘말단’ 집행자의 자의성은 극대화되었다. 1926년 전후 독일법의 사례를 들며 조르조 아감벤은 풍속, 안녕질서, 문란, 선량함과 같이 법적 규정이 아닌 무규정적 규정이 법의 내부로 들어오는 과정을 근대적 생명정치가 죽음의 정치(파시즘)로 넘어가는 문턱이라고 분석했다. 법이 스스로 초법적이 되는 과정을 연구자들은 파시즘이라고 규정해왔다.

 

이른바 ‘보편적’인 근대적 맥락에서 선량함이나 풍속과 같은 영역은 도덕이나 규율, 감정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풍속 통제는 이런 영역을 법적 통제의 영역에 두었다. 선량한 시민이 되는 일은 ‘상식적’으로는 ‘자발적’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법적 강제로 수행되었다. 이런 식으로 피식민자 내부를 분할하고 분류하고 적대적으로 대립시켜서 통치하는 방식은 풍속 통제에서 시작되어, 전시 동원 체제의 비국민에 대한 절멸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전시 동원 시기 조선인과 대만인은 일본인이 되어야 했지만, 결코 그냥 일본인은 될 수 없었다. 대신 조선인과 대만인은 ‘좋은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좋은 일본인’이 되는 방법은 추상적이었지만, 대신 그 반대편에 있는 비국민의 분류는 무한하게 증식했다. 황민화 정책은 초법적인 법적 강제를 개인의 수행성으로까지 확대했다. 이를 황민화 정책의 존재론적 전도라고 한다. 윤리나 ‘자발성’이라는 인간 내적 차원까지를 강제적 통제에 포섭했고 이게 ‘국민 정신총동원’의 뜻이다.

 

일본의 경우 패전 직후 미 군정하에서 풍속 통제법은 대표적인 파시즘 법제로 폐지되었고, 성에 대한 관리에 한정해 축소되었다. 이 과정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풍속 통제법은 한국 사회에 일제강점기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분단 이후 독재정권은 풍속 통제법을 통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한국에서 식민주의 비판이 파시즘 비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역사 때문이다. ‘위안부’ 동원에 대한 비판이 ‘민족주의 프레임’ 문제가 아니라 식민주의와 파시즘 비판의 일환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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