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9호][칼럼] 광장과 혁명의 매뉴얼 (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광장과 혁명의 매뉴얼

오혜진(문화연구자)

 

‘혁명’을 책에서나 보던 나로서는 요즘 좀 설렌다. 주말마다 광장을 가득 메우는 군중을 보며, ‘이건 정말 4·19 혹은 6월 항쟁의 재림인가, 내가 드디어 그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바짝 세운다.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사실 혼란스럽다. 내 게으른 두뇌는 자꾸 2016년의 광장을 1960년·1987년의 광장과 오버랩하는데, 기실 그것들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주, 나는 집회에 관한 여러 ‘주의사항’들을 접했다. ‘국민총궐기 동선 및 시간표’, ‘광장 근처 화장실 배치도’, ‘무대발언자를 위한 함께하는 집회 주의사항’ 같은 것들. 정부나 집회 주최 쪽이 아니라, 각종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이 ‘매뉴얼’들은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모든 사람들이 배제되지 않고 참여하는 새로운 집회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의 산물일 테다.

혁명에 대한 이런 상상력은 유례없다. 잘 알려졌듯, 1960년 혁명의 밤을 묘사한 소설 <무너진 극장>에서 작가 박태순은 이렇게 썼다.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무질서에로의 해방 상태. 이런 본능이야말로 최루탄을 맞으면서도 애써 진행시켜갔고 대열을 만들어갔던 데모의 다른 한쪽 면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온갖 ‘과도한’ 것들, 조절되지 않은 분노와 정제되지 않은 언행, 그 정동(情動)의 ‘끓어넘침’이야말로 혁명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무질서”야말로 부패한 지배층이 가장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점을 안다면, 광장의 온갖 ‘혼란’과 ‘난동’은 그 자체로 군중의 유일한 무기이자 전략이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혁명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어떻게 오늘날 새 세대가 제시한 혁명의 ‘매뉴얼’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여성·장애인·청소년·성소수자·이주노동자 등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하지 말라는 것, ‘모두 일어나라’고 종용하지 말라는 것, 반말·욕설을 하지 말라는 것 등의 ‘주의사항’은 과연 ‘혁명의 정동’과 양립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혁명의 역동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삭제해버린 ‘매뉴얼화된 혁명’을 주문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을까.

예상대로 반발이 크다. 그런 ‘도덕적 강박’이나 ‘정치적 올바름’을 다 지킨 채 이뤄지는 ‘혁명’은 없다는 것. 물론 일리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많은 ‘배제된 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끊어내는 것을 광장에 나오는 이유, 혁명의 목적으로 삼은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혁명은 부정한 체제의 뿌리를 뒤흔드는 가장 발본적이고 급진적인 행위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습속·인식에 깊게 스민 지배적 기율들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정한 혁명이 가능할까. 약자에 대한 욕설·폭력이 용인되는 예외적 순간으로서 혁명의 정동을 상상할 때, 그 혁명은 기득권 남성의 전유물에 불과하다. ‘닭·년’ 등의 여성화된 욕설을 혁명의 언어로 승인할 때, 이 나라에는 그 어떤 ‘혁명’도 도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광장에서 벌어지는 혐오의 언어에 대해 계속 말하고 토론해야 한다. 광장이야말로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효과적인 ‘깨우침’의 시공간임을 기억하자. 지금 필요한 것은 ‘매뉴얼화된 혁명’에 대한 경계와 함께, 2016년의 새로운 ‘혁명의 매뉴얼’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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