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 73호를 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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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를 펴내며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래도 무언가라도 해보자’ 사이의 플랫폼

 

2013년 2월 20일. a는 새벽에 일어나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요 몇 달 새 5시간 내외로 겨우 선잠을 자고, 벌떡 일어나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 아니 요 몇 년간 제대로 숙면을 취한 기억이 없다.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기획해보고, 과연 그게 될 것인가 공상을 하다가는 넋이 빠져서 잠이 드는 날들이다. 오늘은 새로운 결속체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고 서울로 팀원들과 함께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협동조합을 만들어보자고, 서울시 담당자와 잘 나가는 협동조합 사람들을 미리 만나 나름 부푼 꿈을 안고 나타났다. 또 누군가는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냐고 모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또 누군가는 제도 안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보조 장치를 자꾸 만들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느니, 차라리 제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다른 것이 되어서 각자 자기 삶을 사는 게 더 나은 게 아니냐고 독백을 읊조린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a의 머리는 어느 새 혼자 꿍꿍 창문을 처박고 있다. 너무 피로하다. 꿈속의 질문들,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자꾸 되묻는 얼굴들. 기차 안의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꼭 움켜쥔 채 모로 새로 기울어져 잠들어 있다. 그들의 기울어진 꿈속에는 어떤 말이 울리고 있나? 왠지 그들의 잠은 평온한 것만 같아 화가 난다. 그러나 구겨진 짐처럼 좌석에 내던져진 그들의 몸은 자기들의 고단한 꿈자리를 온 몸으로 항거하는 것만도 같아서, 화가 났던 스스로가 문득 부끄러워진다. 짐을 챙기고, 플랫폼으로 내려선다. 가방 끈을 추스르고 추운 새벽 집을 향해 광장으로 나선다. 새벽 광장 커다란 액정 화면에서 대통령 취임, 복지국가, 대통합, 인선…자막이 스쳐간다. 거대한 영상, 흘러다니는 자막 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간다. 때론 무심하게, 누군가는 뚫어지게 화면을 응시하며 멈춰 선다.

또다시 새벽 버스에 몸을 실으며, 다시 잠에 빠지며, 내일은 또 무언가 다른 것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에 부르르 새벽 공기에 몸을 턴다. 꿈결에, ‘그래 무엇이 될지 몰라도, 해볼거야.’ 신음 같은 잠꼬대를 하며 텅 빈 새벽 버스에서 홀로 잠이 깬다.

2013년 [문화/과학] 73호에 담긴 오늘날 한국의 상황을 나는 이런 짧은 장면을 화두로 삼아 이야기해보고 싶다. 두 번 연속 보수정당이 집권하고,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예고하는 것 같은 경제 불황은 생존의 불안한 터널의 종착역을 가늠할 수 없게 한다. 국가를 변혁하거나 진보 진영을 재구축하자는 거대한 공동체에 대한 담론이 여전히 팽배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commune)를 구축하려는 시도들도 지속되고 있다. 대선의 패배와 진보 운동의 몰락 앞에서 누군가는 환멸을 곱씹고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되새기고, 또 누군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는 ‘그래도 무엇인가 하겠다’는 결단이 더 소중하다고 논한다. 이번 [문화/과학] 73호 글에 실린 다양한 현실 분석과 진단에서도 이러한 입장 차이들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다중’과 ‘봉기’에 대한 일련의 이론적 실천적 논의들이 그간 계속 진행되어 왔듯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혁명과 그러한 혁명적 주체화를 위한 정치적 실천과 이론화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와는 조금은 다른 지점에서, 삶 속에서 돌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출현하는 봉기와 결단의 주체성 또한 현실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더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대선 패배와 진보 진영의 한계를 비판하는 많은 논의를 보며 이러한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기존의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은 더욱 날카롭고 정교하게 제기되어야 하겠지만, 진보 진영의 무기력과 한계에 대한 환멸을 곱씹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와 단절하여 새로운 말과 태도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73호의 특집 <어소시에이션과 문화자립>과 작은 특집인 <한국사회 대선 이후>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기획되었다. 이외에도 73호의 글들은 진보 진영의 기존의 정치적, 담론적 실천의 한계를 점검하고, 새로운 이론과 실천을 모색해보는 차원에서 구성되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73호 [문화/과학]의 구성과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편집위원 체제로 [문화/과학]이 세상에 발걸음을 내딛은 후 이제 3번째 호가 나오게 되었다. 지난 시절의 [문화/과학]의 발간사들을 살펴본다.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와 국내외 정세, 따끈따끈한 문화분석으로 촘촘하게 지면이 채워졌던

지난 호들을 살펴본다. 어떤 면에서는 문화와 정치 양 측면에서 어느 정도 낙관적이고 활기가 가득한 시절이었다고 새삼 회고해본다. 이에 비해 지금, 여기를 살펴보는 73호의 글들은 다소 비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치나 문화, 혹은 문화정치의 측면에서 활로나 낙관적 전망보다 비관적 전망이 좀 더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또 [문화/과학]의 입장이 강하게 전면화되고 통일적으로 드러났던 이전의 지면들보다, 73호에는 보다 다양한 입장과 경향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정세의 변화도 매우 중요할 터이고, 문화연구나 문화정치의 지형도나 현실적, 이론적 파급력의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화/과학] 자체의 편집 방향이나 기획 방향의 변화도 중요하게 이러한 변화를 내적으로 추동하는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고, 집중적이고 통일된 논의나 결론을 본 것은 아니지만, 편집위원 체제가 개편된 후 [문화/과학]은 내적으로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편집위원 전체의 의견이 결집된 것이거나 명문화된 것은 아니지만, 73호에도 반영된 어떤 경향적 흐름을 간략하게 개인적 차원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먼저 현실분석에 있어서 이론의 집중도가 강했던 경향에서 현장의 목소리와 흐름을 분석하는 경향성을 높이려 한 측면이 이번 호에 가장 두드러지게 반영된 편집 방향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전체 특집인 <어소시에이션과 문화자립>의 경우도 이론적 입장 표명이나, 경향을 총괄하여 지도를 그려나가거나, 특정 입장에서 배치하는 방식보다는 다양한 흐름의 경로들을 듣고 따라가고 그 가능성과 모색의 의미를 성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 총론이라 할 이동연의 「문화적 어소시에이션과 생산자-소비자연합 문화운동의 전망」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그저 다양한 목소리를 다채롭게 채록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 좌파의 한계와 나아갈 길을 탐색한 서영표의 「대선과 진보정치의 미래」에서도 지적되고 있듯이 중요한 것은 분명한 입장 취함이지만, 동시에 배타적인 반정립만으로는 진보좌파는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없다. 그런 점에서 뚜렷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기존의 진보좌파가 보여준 배타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정당화나 진영 논리와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어소시에이션을 구축하는 것이 [문화/과학]이 고민하는 새로운 결속을 위한 입장 취함이기도 하다.

특집인 <어소시에이션과 문화자립>은 총 6편의 원고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이동연의 「문화적 어소시에이션과 생산자-소비자연합 문화운동의 전망」은 그간 진보적 문화운동의 한계를 비판하고 문화복지 담론의 딜레마를 점검하면서 생산자-소비자 어소시에이션을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동연이 제시하는 생산자-소비자 어소시에이션의 구체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즉 “서로 영역별로 분리된 생산자연합의 연합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 생산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소비자 연합의 형성이 필요하다. 인디음악, 독립영화, 대안미술공간, 대안공연예술, 인디게임과 같은 대안적인 창작콘텐츠들을 소비자들에게 적절하게 제공해줄 수 있도록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재-연합하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비자연합은 생산자연합에 비해 불안정하고 일관된 요구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특별한 문화적 취향을 보유한 소비자들의 연합이 생산자연합의 연합과 만날 수 있는 문화적 계기와 호혜적 교환의 플랫폼이 마련된다면 적극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먼저 대안문화 시장을 형성하기 위한 생산자연합의 연합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이론적 구성이 선행되어야 하고, 개별 문화예술 장르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 문화운동의 목적과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내실 있는 제안서 구성이 필요하며, 함께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할 수 있는 담론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창작콘텐츠들을 하나의 유통구조로 통합할 수 있는 연합의 연합, 즉 통합적 조직형태를 구상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제안을 해주고 있다. 이동연이 글을 마치며 논하고 있듯이 생산자 소비자 어소시에이션을 구축함에 있어서 “온라인 문화협동조합의 형태는 사실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대안문화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기능을 행사할 뿐이다. 생산자-소비자연합 문화운동의 궁극적인 형태는 연합의 연합에서 다시 연합의 재분화로 나가야 한다. 각기 자율적인 문화예술의 영역들이 더 많은 발전을 위해 자기 진보를 이루어야 하고 소비자들은 더 강력한 연합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대안적 어소시에이션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협동조합 논의에 대한 점검 또한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하승우의 논의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된다.

문화적 자립 운동은 한편으로는 독점에서의 자립과 자립을 위한 연대라는 두 과제를 동시적으로 감당해야만 한다. 협동조합(하승우)과 사회적 경제에 대한 논의(김성윤)가 자립과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 글이라면, 강정석의 글은 문화 독점의 현실과 역사를 분석한 글이며, 나도원과 송수연의 글은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문화 자립운동의 현장을 전하는 글이다.

강정석의 「자본주의적 공간의 형성에 대한 단상: 독점과 일상생활의 변화를 중심으로」는 서울의 공간적 재구축의 역사를 롯데백화점과 아파트촌과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강정석은 이를 통해 “결국 서울 곳곳의 거대한 공간적 ‘스펙터클’은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했던 ‘자본-국가-네이션’이라는 선진자본주의국가 삼위체가 공간적으로 표상된 결과인 것이다.”라고 분석한다. 또 이러한 공간의 독점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실천의 전술을 세르토와 하비의 논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강정석은 하비의 ‘반란적 건축가’ 개념을 빌어서 “자기 주변의 환경을 바꾸고, 타인의 환경도 함께 바꾸며,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공공성을 추구하는 환경을 스스로 건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강정석에 따르면 “반란적 건축가가 만들어야 할 건축물은 외형적인 구조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특정한 기회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실천적 행위가 일어날 때, 우리는 자본의 거시적․미시적 체계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의 「협동조합운동의 흐름과 비판적 점검」은 한국사회에 최근 불고 있는 협동조합 설립 운동에 대해 정치적 운동으로서 갖는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비판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승우의 논의에 따르면 다른 지역과 달리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정치적 의미를 배제하고 출발함으로써 그 출발에서부터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승우는 협동조합이 새로운 결사체로서 지니는 대안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들을 몇 가지 차원에서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하승우에 따르면 “협동조합운동은 지역운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조합원들이 사회적 주체로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원한다. 협동조합은 사업체이자 결사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승우는 “협동조합운동이 그런 개입과 조직의 전략을 고민할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 마케팅이나 다른 사회운동의 전략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원칙이다.”라고 논하면서 협동조합의 기본 7원칙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자기의 원칙으로 삼는 것만이 한국에서 협동조합이 지역운동이자 자립적인 정치운동으로서 자리매김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하승우가 제기하는 협동조합의 7원칙은 자립과 어소시에이션을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사실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일독을 권한다.

김성윤은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인 것의 문제」에서 “우리는 근 몇 년에 걸쳐 거의 유일한 대안(적 생산양식)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 담론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다양한 분석을 통해서 김성윤은 사회적 경제 부문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협동 사회라는, 복지를 동반한 공화적 제도”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 즉 사회의 전반적 조건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나도원은 「공동체를 위한 당사자 운동―‘예술인소셜유니온’의 과정과 전망」에서 “자본에 예속되어 굴복하지 않고 자유의 예술로 극복하기 위해선 주체의 형성이 필요하다. 사회도 공동체 형성과 지역의 활기에 기여하는 예술이 도시․문화․환경생태의 자산이며, 예술인 문제는 청년․비정규․여성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특히 예술인소셜유니온을 예술가 집단만의 문제로 한정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비정규직 문제가 만연해있고 여성․청년노동 문제가 심각한데,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예술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직업은 대개 지금의 예술인 현실과 비슷한 국면으로 변화할 것이며, 앞으로의 노동형태는 현 체제로는 근로자로 포함되지 않는 형태가 많아질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인복지법이나 예술가소셜유니온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예술인은 누군인가라는 “정체성 혼란은 ‘미래형’이며, 바로 그렇기에 안전띠를 마련해놓아야 한다. 문제제기를 통해서 구축할 새로운 제도는 비정규 노동자의 권익과 제도 바깥의 노동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선례가 된다.”는 중요한 제안을 하고 있다.

송수연은 「새로운 문화정치의 장, 자립문화운동―문화귀촌, 청년의 소셜 네트워크, 메이커 문화를 중심으로」에서 “자립문화운동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생활을 위한 문화적 접근과 환경을 조성해 가는 과정이다”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자립문화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단축과 함께 자기 노동의 시간(소외되지 않는 노동)을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 노동의 시간’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소외되지 않는 노동’이자 가타리의 ‘자기 생산 능력’이다. 자기 노동을 위한 시간의 확장은 잉여스럽기까지 한 활동을 촉매하고 이는 결국 다른 생활양식에 대한 선택이자 선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음으로 개인의 자립이 갖는 문화적(지적, 감성적, 윤리적, 신체적) 역량은 사회적으로 풍부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때 지속될 수 있다. 이는 자립이 연대를 통해 확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라고 분석한다.

73호의 작은 특집은 <한국사회 대선 이후>라는 주제로 김덕민의 「역사는 반복된다. 모두 비극으로―2012년 대통령 선거 경제담론의 리토르넬로」와 서영표의 「황무지 위에 선 진보좌파,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2012년 대선과 진보좌파의 미래」 두 글을 수록했다. 김덕민은 진보 진영의 한계와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현재 한국에 있는 민주진보 진영과 좌파운동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목격하였다. 특히, 좌파운동은 민주진보 진영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따른 위기 상황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는 신자유주의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규율을 도입하면서 엄청난 압력을 행사하고 좌파운동을 궤멸상태로 몰아붙인 것은 사실이나 이에 대응하지 못한 이유는 좌파운동 또한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신자유주의의 위기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프로그램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있다. 과거의 운동 관습과 관성을 답습하고, 새로운 운동을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알고 보면 예전 프로그램의 (일부 추가적인 카테고리를 추가한) 복사판이었다. 한국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도 없으며, 과거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도 없었다.”

진보 진영이 한국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갖고 있지 못하고, 과거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도 없었다는 진단은 여러 면에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진보’의 미래는 한국사회의 역사와 구체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분석과 해석의 시각, 그리고 이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정한 분석은 서영표의 글에서도 이어진다. 서영표는 다음과 같이 현재 진보 진영의 한계를 진단한다. “진보정당‘들’은 스스로를 무장해제하고 의석 확보에 모든 것을 거는 제도정당으로 ‘타락’했거나 아무런 힘도 없는 식물정당으로 전락했다. 시민운동은 저명한 시민운동가 몇 명을 정치인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운동적 성격을 던져버렸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문재인에게 모든 것을 걸음으로써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잘못과 민주당의 한계를 모조리 공유하는 낡은 세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진단 하에 서영표는 진보운동의 과제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 번째 과제는 동북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입장과 행동을 가진 진보좌파의 재건이다. 두 번째 과제는 경제적 부와 권력의 세습반대를 통해 넓은 연대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 번째 과제는 “동북아 평화세력”으로서 그리고 “세습 반대 운동”의 주체로서 한반도 통일을 위해 실천하는 통일세력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번이 3회째가 되는 <문화과학 북클럽 논쟁>은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에서 펴낸 [광주, 여성](후마니타스, 2012)을 선정했다. 구술 채록의 1차 편집자인 정경운 교수와 구술자 전문가 김원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토론자인 김원 교수가 논하듯이 구술사는 ‘밑으로부터의 역사’, ‘공식적인 역사로부터 배제된 개인의 체험’을 현재의 기억에 근거해서 다시 불러오는 역사 서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자료 안에 있는 ‘사실적인 진실성’이나 ‘서사적 진실성’이라는 것이 구술사를 통해 의미 내지는 맥락에 따라 재구성되고 또 섞여서 기록이 된다. 따라서 구술 자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새로운가?’보다는 ‘왜 이 시점에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중요하다.

<문화현실분석>에는 권경우의 「SNS혁명과 그 후…」와 홍성일의 「강호동 없는 텔레비전의 불가능성: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인적 독점에 관하여」라는 두 편의 글이, <근대성과 문화연구> 코너에서는 송현민의 「박정희 정권의 금지곡을 둘러싼 ‘감시와 처벌’」이 수록되었다. <해외 문화연구 동향>에는 니웨이의 「첩보드라마 분석」이 <이론의 재구성>에는 정정훈의 「(불)가능한 권리와 인권의 정치」 등 다채로운 글을 수록한다.

권경우는 「SNS 혁명과 그 후…」에서 SNS 혁명 이후를 사유한다. 즉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홀로 있는 시간’, 즉 잃어버린 고독의 회복이 아닐까?”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권경우는 이제 “스마트폰을 떠나도 견딜 수 있는 삶을 창조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질문한다. “그것은 SNS 공간을 넘어 오프라인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과정에도 우리의 시선을 두고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때로 개별적 기억의 순간일 수도 있고, 때로는 집단적 경험의 공유일 수도 있다. 자신의 노출이나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존재함으로써 타자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독은 어쩌면 SNS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SNS 혁명 이후에 고독은 발견 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새로운 혁명의 지향성을 지녀야 한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한다.

홍성일은 「강호동 없는 텔레비전의 불가능성: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인적 독점에 관하여」에서 “외환위기 이후 급격하게 우리 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노동의 성격 역시 변화하였으며, 이와 같은 노동의 성격 변화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기획, 제작에도 반영되었고, 그 결과물이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일반화로 나타났다.”는 매우 흥미로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루저의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하고 이들 사이의 유사 가족화가 심화되며, 매회 새로이 닥쳐온 고난을 해결해나가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중심 포맷은 외환위기로 촉발된 구조조정의 일반화, 중산층의 붕괴, 사회적 양극화에 상처 입은 일반 시청자들의 불안한 정서를 아우르며 이를 조작하는(manipulate) 노동의 형식이었던 셈이다. 이는 동시에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시청자들의 팬덤화, 이를 통한 적극적 시청 행위의 재강화는 프로그램의 소비 활동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시 프로그램 속으로 재투입되어 프로그램 제작에 반영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프로그램 자체를 생산하는 감정노동으로 작동한다.

송현민은 「박정희 정권의 금지곡을 둘러싼 ‘감시와 처벌’」에서 박정희 정권의 검열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답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푸코나 부르디외가 비판하는 검열의 최종 목적, 혹은 박정희가 꿈꾸었던 검열의 최종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귀여움의 대상으로의 전락과 양육하고 사육하는 권력, 즉 ‘케어’(care)하는 사목적 권력이다. 귀여움이란 전형적으로 강자가 약자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다.”

니웨이(倪偉) 교수의 글을 번역 소개한 손주연에 따르면 “드라마의 제작과 소비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 매체가 당대 중국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감지한 ‘상하이 문화연구 그룹’은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문화연구를 계속해 나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연구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니웨이(倪偉) 교수다.” 상하이 화둥사범대학(上海華東師範大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푸단대학(復旦大學) 중문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니웨이 교수는 중국 근현대문학과 문화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2009년부터 중국 대륙에서 인기를 끈 첩보드라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전파>(永不消失的電波), <암산>(暗算), <잠복>(潛伏), <낭떠러지>(懸崖) 등을 통해 드라마에서 운위되고 있는 신앙의 문제와 그 심층에 놓여있는 문화적 징후들을 짚어내고 있다.

정정훈의 「(불)가능한 권리와 인권의 정치」는 일련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권의 정치란 ‘인권’의 (불)가능성을 작동시키는 정치, 그럼으로써 현행화된 인권들을 혁신하는 정치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인권’의 불가능성을 가능화하려는 영속적 시도, (불)가능한 권리로서 ‘인권’을 인권들로 가능하도록 만들어가는 무한한 운동의 과정이자 결코 종결되지 않는 역동성이야말로 인권의 정치를 특징짓는 근본적 차원이 아닐까? (불)가능한 권리들에 대한 집요한 고집, 제도화되고 법률화된 인권들로 회수되지 않는 ‘인권’의 잔여들에 대한 안티고네적 집요함이야말로 인권의 정치의 가장 핵심적 성격이 아닐까? 왕의 법이 금지한 오빠의 매장을 그 법보다 더 상위에 있다고 믿는 법에 호소하여 끝까지 요구하였던 안티고네의 고집.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하면서도 현실을 지배하는 법들보다 더 근본적인 법적 정의의 실현을 호소하였던 그녀의 집요한 고집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화하려는 무한한 시도로서 인권의 정치에 고유한 이미지, 인권의 정치를 형상화하는 어떤 이미지가 아닐까?” 이러한 질문의 끝에서 정정훈은 “우리는 인권운동의 종별적 특성이 바로 인권의 정치를 실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과 국가의 폭력 앞에 박탈되고 파괴되는 인간의 권리를 방어하고 재구축하기 위한 투쟁의 현장들에 항상 인권운동이 있어왔다.”는 재인식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이야말로 안티고네적인 집요함의 사례가 아닐까 하는 제안을 해주고 있다.

 

2013년 2월

편집위원 권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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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 [문화/과학] 73호를 펴내며 에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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