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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187; 문화현실분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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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뉴스레터1호][신간안내]한국의 ‘대중’은 스스로 생각하고 잡히지 않는 존재(김성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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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Jun 2014 00:00:55 +0000</pubDate>
		<dc:creator>운영자</dc:creator>
				<category><![CDATA[문화현실분석]]></category>
		<category><![CDATA[알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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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한국의 ‘대중’은 스스로 생각하고 잡히지 않는 존재” &#160; &#160; ‘대중의 계보학’ 김성일 교수 인터뷰: 한겨레 이유진기자 &#160; 김성일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대중이 새롭게 출현할 분화구는 사회의 모순이 응집된 곳이며, 지배 권력과 자본의 영향력이 흔들리는 가장 약한 지점이 될 것”이라고 &#8230; <a href="http://cultural.jinbo.net/?p=256">계속 읽기 <span class="meta-nav">&#8594;</span></a>]]></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한국의 ‘대중’은 스스로 생각하고 잡히지 않는 존재”</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대중의 계보학’ 김성일 교수<br />
인터뷰: 한겨레 이유진기자</p>
<p>&nbsp;</p>
<p>김성일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대중이 새롭게 출현할 분화구는 사회의 모순이 응집된 곳이며, 지배 권력과 자본의 영향력이 흔들리는 가장 약한 지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br />
“촛불이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나올 다양한 실천 양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중의 집단행동엔 정답이 없다. 분명한 건, 엘리트 집단이 핵심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종결을 선언할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싸움이 될 거라는 거다.”</p>
<p>최근 &lt;대중의 계보학&gt;(이매진)을 펴낸 사회학자 김성일(46)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를 2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에서 만났다. 이 책에서 그는 1920~30년대 근대적 대중의 형성부터 2002년 이후 광장의 시민까지 ‘대중의 계보’를 추적했다. “미셸 푸코식의 ‘계보학’이라면 더 면밀하게 분석해야 했다”고 하지만, 개화기 이후 한국 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면서 형성된 대중을 시대별로 검토한 흔치 않은 시도다.<br />
책을 보면, 대중은 “근대사회가 출현하면서 등장한 역사적 집단”이다. 더욱이 한국 대중은 ‘사건’으로 등장한다. ‘오노 사건’, ‘노사모’ 활동, 길거리 응원전, 미선이 효순이 촛불 집회, 이라크전 파병 반대운동,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최근 세월호 참사까지 새로운 결집방식과 자율적 실천들을 낳았다.<br />
근대 이후 하향식 ‘국민’ 형성됐지만<br />
지식 민주화로 깨어있는 대중 출현<br />
한국의 대중은 늘 저항적이지만도 않고, 권력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대중독재(임지현) 현상으로만 분석되지도 않는다. 엘리트에게 ‘계몽’되거나 ‘지도’되는 집단이 아니다. 제국의 지배를 뚫고 지구적 차원으로 변혁을 일으키는 주체인 ‘다중’(네그리·하트)도 아니다. 김 교수는 “대중의 지성화”가 존재한다며 “그 자체로 자기 동일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비껴가는 탈주를 감행한다”고 분석한다.<br />
“한국 대중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역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집단적 마녀사냥의 주술로 사용되기도 한다. ‘쓰레기가 되는 삶’(바우만)을 대량생산하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고발로서 정치적 기획을 위한 대중 연구가 시작돼야 할 이유다.”<br />
김 교수는 한국의 대중은 운동경기부터 정치주장까지 행위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한 뒤 주체의 의지를 발동해 다양하게 ‘욕망의 선’을 탔다고 본다. 대중은 스마트폰으로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함성에서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심리가 결합된 포퓰리즘까지 “신출귀몰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br />
‘대중’의 계보도는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저항하는 대중, 포섭·동원되는 대중, 감성적인 대중이다. 저항하는 대중은 갑오년 동학농민전쟁, 만민공동회, 3·1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 민권에 대한 열망과 앎의 주체로서 등장한 흐름을 가리킨다. “일상에서 지식을 습득해가는 근대의 대중”이자 지식의 민주화로 “깨어 있는 대중”의 탄생이었던 셈이다. 이 계보는 4·19 혁명, 1970~80년대 노동운동, 5·18 광주민주항쟁, 6·10 항쟁 등으로 이어진다. 포섭·동원되는 대중은 박정희 정권 때 ‘국민’과 ‘민족’이라는 집합주체로 불렸던, 하향식으로 호명된 수동적 집단이다. ‘국민 개조’ 프로젝트가 등장했고, 대중은 총동원 체제 안으로 포섭되었다. 한일협정 때문에 정치적 위기를 맞자 박 정권이 민족 정체성을 내세우며 현충사 복원사업, 이순신 동상 건립, 신사임당 재발굴 등으로 정권 정당화·방어논리로서 ‘민족’ 담론을 구사해 대중 현상을 강화했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은 정부정책과 재벌의 문제였음에도 금모으기를 하면서 국난 극복의 주체로서 대중이 동원됐다. 감성적인 대중은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소비대중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br />
김 교수는 “한국 사회는 지금 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도 해결이 불가능해 그 어느 때보다도 폭발적인 대중 결집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국민들이 ‘국가’를 호명하는 것도 그는 “새로운 질문”이라고 했다. 지식인들은 권위주의와 획일화, 억압으로서 ‘국가’, 파시즘의 가능성이 있는 ‘민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왔지만 지금 대중이 호출하는 ‘국가’, ‘민족’이란 그 범주에서도 벗어난다는 것이다.<br />
“지금 한국의 대중한테는 ‘국가’라는 게 초월적인 소외의 장소가 아니라 함께 대응하고 아파하고 나눌 수 있는 소재다. 대중에게 ‘국가’나 ‘민족’은 멀리 있지도, 억압적이지도 않은 존재가 될 수 있다. 국가를 연성화된 것으로 인식해 위임된 권력에 도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br />
특히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대중의 양상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 그는 풀이했다. 명분을 갖고 운동의 지도부가 끝내자고 지시하는 옛날 방식이 아니라 “각자 생각하고 움직여 삶 속에서 꾸준히 밀고 가는 것”으로 변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런 변화를 “대중의 새로운 반응”이라고 보고 있다.<br />
“대중은 엘리트의 말을 듣지 않으며 벗어나고 넘나든다. 국가, 언론, 시민운동도 대중을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 아닌가. 답답하지만 문제의식이 살아있으니 직접 찾아보고 지식을 구성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대중은 미지수 엑스(X)로 존재하지만 멈추지 않는 ‘흐름’이자 ‘현상’이다.”<br />
연구실을 나서자 봄날 캠퍼스에서 더운 기운이 훅 끼쳐왔다. 교문 앞에 한 남학생이 한손에는 초, 다른 손에는 마이크를 들고 “세월호 참사를 이렇게 그냥 잊을 수 없다”고 외쳤다. 그 앞에는 ‘대중’이 앉아 있었다. 30여명이었다. 그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몇명이 될까.</p>
<p>&nbsp;</p>
<p>&nbsp;</p>
<p>한겨레 5월 25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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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뉴스레터1호][칼럼]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의 공화국(김정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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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Jun 2014 00:00:53 +0000</pubDate>
		<dc:creator>운영자</dc:creator>
				<category><![CDATA[문화현실분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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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의 공화국 &#160; &#160; 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60;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이것이 국가인가?’ 이 물음에는 ‘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라는 사회적 환상이 담겨 있다.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고, 위험에 처한 국민을 구조할 수 있는 &#8230; <a href="http://cultural.jinbo.net/?p=229">계속 읽기 <span class="meta-nav">&#8594;</span></a>]]></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의 공화국</p>
<p>&nbsp;</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p>
<p>&nbsp;</p>
<p>세월호 참사로 인해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이것이 국가인가?’ 이 물음에는 ‘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라는 사회적 환상이 담겨 있다.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고, 위험에 처한 국민을 구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세월호의 승무원들은 대부분 단기 계약으로 일하는 비정규직으로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고, 해경은 구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방관했으며, 정부는 상황을 파악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 채 인명을 구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더구나 정부와 해경이 구조와 수색의 독점권을 부여한 ‘언딘’이라는 민간구난업체는 외려 인명 구조 요청은 받은 적이 없다고 변명하고, 세월호를 운영한 청해진해운은 정부 관료, 공무원, 정치인들과 유착해 안전에 대한 고려 없이 탐욕스럽게 돈벌이 사업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거의 모든 방송과 신문은 객관적인 보도와 진상 규명을 외면할 뿐 아니라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정부를 변호하려는 행태를 보였다. 정부기관, 민간업체, 대기업, 언론 등이 모두 총체적으로 부패해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하며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이유이다.</p>
<p>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것이 바로 국가다’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의의 핵심 정책들 가운데 하나는 외주화(outsourcing)이다.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과 작업의 일부를 외부 전문업체에 맡겨서 생산비용을 절감한다는 논리로 시행된 외주화는, 기업 내부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폭 축소하고 외부의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로 대체하는 ‘노동의 유연화’를 동반했으며, 노동과 작업에 따르는 각종 위험 상황에 대응해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방어하는 일차적인 ‘안전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약화시켰다. 노동조합의 감시와 견제를 벗어난 기업 활동은 노동자들의 안전에 무감하고 이윤 획득에 민감한, 생명이 아니라 돈이 더 중시되는 잠재적으로 잔혹한 사회를 만들어왔다. 또한 이와 같은 기업과 시장의 논리는 정부의 운영 원리로 스며들었고, 이른바 ‘CEO 대통령’이라는 표현처럼 ‘민주 국가’는 ‘기업 국가’로 변모했다. 국가의 재정 악화를 타개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의 주요 기능은 점차 외주화되었다. 여러 공공기업의 민영화가 이루어졌고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는 분야도 사기업으로 이전되었으며, 이처럼 국가의 공공성이 해체됨으로써 시민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민간 경비ㆍ소방업체와 계약하거나,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각종 민간 보험업체에 의존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경의 역할과 기능이 ‘언딘’이라는 사기업으로 외주화된 것은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정부는 외주를 주었으니 책임이 없고, 외주업체가 담당하는 전문적인 업무를 관리할 능력도 없다. 그리고 외주를 맡은 사기업은 다시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남기는데 매진함으로써 국민의 공공성과 안전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난다.</p>
<p>&nbsp;</p>
<div></div>
<div id="page">
<p>  이 모든 과정에 대해 우리는 사실상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알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시장경쟁의 원리에 맞춰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발하고 관리하는 ‘자기 관리 주체’로 행위했고,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들을 사회의 열패자로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묵과해왔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알지 못하는 앎’(unknown knowns)이 이런 것이다. 잘 알고 있지만 부인하고 있는 앎이다. 오늘날의 냉소적인 주체들은 ‘이런 것이 바로 국가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라는 듯이 행위하며 살아왔다. ‘민주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하며 놀라서 분노할 때, 우리가 무의식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에 민주주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로 많은 이들이 정신적 충격을 느끼고 사회적 공황(panic) 상태에 빠진 이유는, 국가에 대한 ‘알지 못하는 앎’을 유지시켜온 ‘민주 국가’라는 사회적 환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환상의 이면에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상 자체가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면, 무너진 것은 사회적 환상만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현실 자체이다.</p>
<p>&nbsp;</p>
<p>따라서 세월호 참사가 제시한 과제가 있다면 무엇보다 사회적 환상과 현실 세계를 다시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일이다. 부정(‘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의 부정(‘이런 것이 바로 국가다’)을 넘어서는 새로운 긍정으로서 ‘이것이 우리의 국가다’라고 자임할 수 있는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이 요청하듯이, “지금은 침몰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끄집어서 소생시키느냐,아니면 그대로 빠뜨려 죽이느냐 하는 기로에 있다.” 이미 세월호 참사는 무너진 폐허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행위 준칙을 정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만히 있으라.’ 부패하고 무능한 국가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행위는 ‘가만히 있으라’에 준거할 것이다. 이는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와 공명한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 … /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나 / … /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바보 같이 살고 있지 않나 / 아, 대한민국 /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리는 너무 오래 질기게 가만히 있었다. 그리하여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치적 대표자들을 구성할 때까지 세월호 사건은 지속적으로 ‘우리’와 ‘그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할 것이다.</p>
<p>&nbsp;</p>
<p>동국대학원신문, 184호 2014년 06월 09일 (월)</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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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뉴스레터1호][칼럼]융성에 춤추고, 융합에 뒤틀리는 인문학(오창은)</title>
		<link>http://cultural.jinbo.net/?p=23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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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Jun 2014 00:00:51 +0000</pubDate>
		<dc:creator>운영자</dc:creator>
				<category><![CDATA[문화현실분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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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들끓고 쏠리다]  융성에 춤추고, 융합에 뒤틀리는 인문학 &#160; 오창은 &#124;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 &#160; 옛날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상수리 나무가 있었습니다. 수천마리의 소가 그 나무 아래서 노닐 정도였다고 하네요. 구경꾼들이 모여 장터를 이루었는데도 석(石)이라는 뛰어난 목수는 외면하며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가 놀라서 “그 동안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8230; <a href="http://cultural.jinbo.net/?p=231">계속 읽기 <span class="meta-nav">&#8594;</span></a>]]></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들끓고 쏠리다]  융성에 춤추고, 융합에 뒤틀리는 인문학</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오창은 |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p>
<p>&nbsp;</p>
<p>옛날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상수리 나무가 있었습니다. 수천마리의 소가 그 나무 아래서 노닐 정도였다고 하네요. 구경꾼들이 모여 장터를 이루었는데도 석(石)이라는 뛰어난 목수는 외면하며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가 놀라서 “그 동안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이처럼 훌륭한 나무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어찌 그냥 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석이는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짜면 썩고, 그릇을 만들면 부서지고 마는 나무”라고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는 나무임을 한 눈에 알아본 석의 안목이 놀랍지요.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석이의 꿈에 그 상수리 나무가 나타나“그대는 나를 무엇에 비교하려는가? 나는 오래 전부터 내가 쓸모 없기를 바랐네.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클 수 있었겠는가? 그대나 나나 한낱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대는 상대방만을 하찮다고 한단 말인가?”라며 호되게 훈계를 합니다. 상큼한 반전이지요. 유용함은 누구의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크게 갈릴 수 있습니다. 그 상수리 나무는 수천마리의 소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일 수 있지만, 배·관·그릇 등을 만드는 인간에게는　쓸모 없을 뿐인 것이지요. 궁극의 목적은 누군가에 의해 쓰임새로 판별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쓰임새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자』(오기남 풀이, 현암사, 1999)에 나옵니다.</p>
<p>인문학 열풍도 상수리 나무 이야기에 빗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문학은 그간 방치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폐과되었고, 인문학 교양수업은 비실용적이라면서 너무나 섣부르게 축소되었습니다. 인문학 전공자들도 당연히 대학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었지요. 인문학자들은 각고의 노력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저작들을 집필하고, 삶의 현장에서 ‘거리의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시민 인문학 열풍’은 유용성으로 인해 배제되었던 인문학자들이 노숙인 인문학, 소외계층 인문학, 대중 인문학 등을 통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수천마리의 소가 어울리듯,자연스러운 쓸모가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요. 삶과 더불어 호흡하는 인문학은 ‘쓸모없음’이 만들어낸 ‘쓸모 있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p>
<p>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 관련 이야기에는 비극적 반전이 기다리고 있네요. 인문학이 쓸모 있다고, 그것도 국가적 차원에서 인문학 진흥에 힘을 기울일 만큼 쓸모가 있다고 정부가 나서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정부의 주도 아래 2013년 11월 19일 ‘인문정신문화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014년 2월 17일에 인문학진흥을 담당할 부서로 문화체육관광부에 ‘인문정신문화과’가 신설되었습니다. 앞으로 인문정신문화진흥법이 제정되고, 인문학 대중화를 위한 국민독서운동도 전개된다고 하네요. 국가가 인문학을 사랑해주고, 국민들의 독서까지 챙긴다고 하니, 인문학이 드디어 도끼의 날 앞에 선 상수리 나무가 되었네요.</p>
<div></div>
<div id="page">
<p>우려스러운 부분은 정부의 인문학 사랑이 아니라, 정부가 인문학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쓸모’입니다. 인문학이 앞으로는 창조경제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고, 문화융성을 이뤄내는 도구가 되고, 학문융합을 통한 고부가가치 산출의 자원이 된다고 합니다. 철저히 ‘쓸모’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 쓸모에는 ‘국민계몽’도 포함되어 있고, 국가이데올로기도 기입되어 있으며, 혁신적 제품 생산의 꿈도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습니다.</p>
<p>월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의 미래』(이은정 옮김, 동녘, 2011)에서 ‘현재의 지배적 관점에서 벗어나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대안에 입각해 비전을 마련하려는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쓸모 없음이 미래의 대안으로 이어진다는 월터 카우프만의 생각은 『장자』에 나오는 상수리 나무 이야기와 묘하게 겹쳐집니다.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인문학 진흥은 성과를 산출해야만 하기에 인문학의 궁극적 존재이유를 망가뜨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통치의 수단으로서 인문학이 호명되는 순간, 인문학의 무용적 가치는 뒤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p>
<p>&nbsp;</p>
<p>&lt;경향신문&gt; 2014년 3월 29일자 19면</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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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뉴스레터1호][칼럼]청춘 착취 자본주의(최철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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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Jun 2014 00:00:4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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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문화현실분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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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청춘 착취 자본주의 &#160; 최철웅 &#124; &#60;문화/과학&#62; 편집위원 &#160; &#160;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60;10분&#62;은 ‘출근’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이 시대 청년들의 애환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시대 여느 이십대처럼 방송사 PD시험을 준비 중인 호찬은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지방이전을 앞둔 한 공공기관의 6개월 인턴사원으로 입사한다. 잠시 거쳐 갈 &#8230; <a href="http://cultural.jinbo.net/?p=233">계속 읽기 <span class="meta-nav">&#8594;</span></a>]]></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청춘 착취 자본주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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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right;">최철웅 | &lt;문화/과학&gt; 편집위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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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지난 4월 개봉한 영화 &lt;10분&gt;은 ‘출근’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이 시대 청년들의 애환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시대 여느 이십대처럼 방송사 PD시험을 준비 중인 호찬은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지방이전을 앞둔 한 공공기관의 6개월 인턴사원으로 입사한다. 잠시 거쳐 갈 뿐이라며 대놓고 농땡이를 치는 동료 인턴과 달리 호찬은 성실하게 업무를 도우며 직원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직원채용공고가 나자 사무실 직원들은 이미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며 호찬에게 응시를 권한다. 호찬은 고심 끝에 어려운 집안 형편을 고려해 방송국 PD의 꿈을 접고 안정된 직장생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갑자기 연줄을 댄 다른 지원자의 채용이 결정되고, 호찬은 다시 인턴 사원의 자리로 돌아간다. 직원들은 함께 분개하고 노조지부장은 노조차원에서 문제제기 하겠다며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새로운 직원은 친화력 있게 다른 직원들과 어울려 가고, 사무실 직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호찬에게서 등을 돌린다. 호찬은 모욕감과 인간적 배신감을 느끼지만, 사회생활의 생리가 그런 것 아니냐는 싸늘한 공기만이 사무실을 휘감고 흐른다.</p>
<p>감독이 자신의 인턴 경험을 토대로 연출한 덕에 영화는 이십대 청춘의 고민과 직장생활의 현실에 대해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전형적인 특징들을 잘 포착해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직장생활의 경험과 취업을 준비 중인 후배들의 모습이 중첩된 것은 그 때문이리라.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견고한 벽, 지시는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직장상사, 현실이라고 위안하기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직장인의 삶…. 당대의 청춘들은 수많은 경계지대들 또는 사이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졸업과 취업 사이, 기대와 현실 사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등. 그 경계지대란 생애주기 상의 불확정적 시기이기도 하고, 심리적 공간 내에서 체감하는 격차이기도 하며, 제도적으로 물질화된 권력의 차별이기도 하다. 경계선 상의 삶은 미래의 가능성에 활짝 열려있다기보다, 불안정하고 불안한 삶의 반복을 의미할 뿐이다. 오늘은 자원봉사자로, 내일은 인턴으로, 그리고 그 후엔 실업자로 ‘돌고 도는’ 삶의 패턴. 그 모호한 경계지대를 자본과 권력은 ‘청춘’의 고유한 열정, 가능성, 경험 등의 수사로 메우면서, 부당한 착취와 정책적 무능력의 현실을 은폐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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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인턴, 자원봉사자도 노동자도 아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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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원래 의료계의 실무수습제도를 뜻하던 인턴십 제도는 언젠가부터 고등교육과 취업을 매개하는 필수적인 고용패턴으로 인식·운용되고 있다. 현재 공공기관은 물론 비정부기구와 사기업 모두 인턴십을 필수적인 채용과정으로 도입하거나, 인턴 경험을 우대사항으로 평가하는 추세다. 기업들이 경력직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면서 청년층 고용률이 떨어지자, 2008년 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년 인턴제’를 도입하여 “중소기업과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2010년부터는 대기업에까지 청년인턴제가 확산되며 신입사원 공채를 대신하게 되었고, 인턴 경쟁률도 덩달아 치솟았다. 인턴이 되는 길은 더욱 좁아졌지만, 인턴이 되고 나서도 확실하게 보증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도 아니며, 최저임금이나 시간외수당을 못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단순한 복사와 허드렛일부터 정규직이 감당해야 할 수준의 업무까지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지만 노동자인지 교육생인지도 애매하다. 인턴제의 가장 큰 특징은 모호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p>
<p>인턴십의 모호한 포괄성은 다양한 형태의 파행적 운용을 야기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사례는 정규직 전환보장이나 보수도 없는 무급인턴의 경우이다. 일부 언론사나 큐레이터 등 고학력 구직자들이 몰리는 곳에선 “완벽에 가까운 영어실력, 주5일 3개월 이상 근무” 등 높은 조건을 내걸고 무급인턴을 모집해 빈축을 사고 있다. 이력서에 넣을 근사한 한 줄의 경력을 위해 무보수노동마저 감내해야 하는 청년층의 곤궁을 가장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무급인턴의 경우 자원봉사와의 경계도 모호하다. 한국의 근로기준법 제2조 1항 1호는 근로자를 &#8217;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8217;로 정의한다. 따라서 비단 ‘교육’만 받는 것이 아니라 정직원과 다를 바 없는 업무를 수행한다면 노동자로서의 임금과 제반권리를 보장받아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삼는 사기업은 자원봉사자를 업무에 활용할 수 없다. 기업이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한 지위를 활용해 무급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도 노동자도 아닌 애매한 지위의 인턴들은 아무런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셈이다.</p>
<p>자원봉사와 무급인턴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곳이 공익을 내세운 각종 비정부기구들이라는 점도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최근 출판도시문화재단이 열린도서관 ‘지혜의 숲’을 개관하면서 ‘권독사(책과 독서를 권하는 사람)’라는 명칭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권독사는 독자의 관심과 기호에 따라 도서나 출판사, 학자들의 코너를 소개하고, 책이 꽂힌 위치까지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독서의 즐거움을 전파한다는 명목 하에 전문적인 사서가 수행해야 할 작업을 자원봉사자들이 대신하는 셈이다. 2011년에는 희망제작소가 무급인턴을 모집하자 노동력 착취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우리는 월급은 주지 못하지만 꿈‧비전‧사랑을 준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각종 영화제나 지역축제들에서 현장관리와 진행을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담당하는 것은 이제 상식적인 관행이 되었다. 부당한 관행일지언정 모두가 동참하는 게임에서 굳이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할 의사는 누구에게도 없는 셈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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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너의 노동력을 공짜로 팔지 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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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에서 드러나듯 자원봉사와 무급인턴 고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돈 대신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들이 보기에 세상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로 넘쳐나며, 그들이 마음껏 청춘의 열정과 시민적 덕성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대안적 사회의 밑거름이 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실제로는 소외된 노동에 불과할지언정 당사자들에겐 자발적이고 소외되지 않은 선물로서 경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경험이란 것이 대개 실무와 무관한 허드렛일에 불과하고, 전문적인 인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업무를 값싸게 활용하는 방식이란 사실은 애써 감춰진다. 물론 일부 지원자들은 정신적 만족감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기꺼이 무상의 노동을 제공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들은 청년층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계층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국제기구나 해외기업의 인턴십 등 스스로 교통비와 생활비를 기꺼이 부담하면서 명성 높은 기구의 글로벌 인턴십을 향유하는 이들이 그런 예다. 인턴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인턴 내에서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p>
<p>자원봉사나 무급인턴 활동은 공익적 목적과 자발적 동기에 의해 수행된다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해당기업이나 기구의 이윤창출과 비용절감에 기여하게 된다. 주관적으로는 시민적 미덕을 발휘하고 있을지언정 객관적으로는 소외된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의 추출에 연루되는 것이다. 게다가 임시적인 무급의 노동을 통해 탈숙련화를 조장하고, 무상으로 노동을 제공할 여유가 없는 이들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열린도서관의 자원봉사자들은 본의 아니게 전문 사서들의 일자리를 침식하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턴의 제반권리나 보상에 다들 눈감는 것은 채용자나 지원자 모두 인턴을 ‘거쳐 가는’ 자리로 간주하는 탓이 크다.</p>
<p>실업난이 지속되는 한 정규직을 인턴으로 채용하고, 유급인턴을 무급인턴으로 대체하려는 기업들의 행태는 더욱 일반화될 것이다. 이는 결국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구직자들이 ‘바닥으로의 경주’를 펼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잃을 것이 없는 기업은 공짜 노동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경험’을 제공해준 대가로 오히려 인턴십의 비용을 청구할 수도 있으리라. 미국 사회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인턴십 프로그램의 실태를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비판한 로스 펄린의 저서 『청춘 착취자들Intern Nation』의 한국어판 부제는 ‘너의 노동력을 공짜로 팔지 마라!’이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노동과 관련한 일체의 부당한 관행과 평가절하를 ‘함께’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력서의 한 줄을 채우기 위해 ‘돌고 도는’ 인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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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경희대 대학원보, 201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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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뉴스레터1호][칼럼]세월호 참사와 청소년의 권리(천정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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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Jun 2014 00:00:42 +0000</pubDate>
		<dc:creator>운영자</dc:creator>
				<category><![CDATA[문화현실분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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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세월호 참사와 청소년의 권리 &#160; 천정환 &#160;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 하나가 있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사고,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인명사고의 공통점은, 학생들과 그 단체활동을 상대로 장사해 사는 업자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 업자들은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8230; <a href="http://cultural.jinbo.net/?p=226">계속 읽기 <span class="meta-nav">&#8594;</span></a>]]></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세월호 참사와 청소년의 권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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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right;">천정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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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 하나가 있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사고,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인명사고의 공통점은, 학생들과 그 단체활동을 상대로 장사해 사는 업자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 업자들은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무책임하게 장사하며 더 손쉽게 돈을 벌어왔을 것이다.</p>
<p>학생들은 학교와 업자라는 &#8217;어른&#8217;들만 믿고 안전을 저당 잡힌 돈벌이의 객체였다. 특히 세월호 사건에서 나타난바, 학생들은 목숨이 걸린 상황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제대로 된 정보도 듣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만 듣다 희생됐다. ‘가만히 있으라’는 권위주의는 ‘(어린) 니들은 몰라도 된다’는 무시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p>
<p>그런데 이는 나쁜 업자들만 가진 관점이나 의식이 아니다. 가장 평범한 학교나 가정에서도 그런 관점은 언제나 작동한다. 청소년들이 그저 ‘몰라도 되고’ 보호만 받아야 할 어리고 미숙한 존재이고, 따라서 정책과 정보의 객체일 뿐이라는 관점은 상식으로 통용된다. 단원고 학생들을 ‘아이’라고 부르며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어른’들의 슬픔과 죄의식 속에도 혹 그런 의식이 은연중에 끼어 있지 않은지?</p>
<p>&nbsp;</p>
<p>참극을 겪은 우리는 이제 ‘말 잘 듣는 사람보다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로 바꾸자’고 하고,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기도 한다. 다 옳은 말이다. 굴종을 요구하는 문화에 맞서야 하고, 청소년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과연 어떻게? 토론 수업을 더 도입할까?</p>
<p>청소년들은 이미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이며,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른’들과 입시몰입 교육과, 또 잘못된 정치가 그들이 그런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감추고 있는 것 아닌가? 청소년들이 세월호에서처럼 당하지 않고 정당하게 인권과 사회권을 누리게 해야 한다면 첩경이 있다. 그들을 ‘인간’으로 즉,‘아이’가 아니라 책임 있고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대접하는 일이다. 이를 위한 확실한 장치도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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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로 선거권 제한연령을 낮추어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일이다. 선거권을 18세 혹은 그 이하로 낮춰야 한다. 피선거권의 연령제한도 낮춰야 한다. 이 방법의 정치적ㆍ사회적 효력은 작지 않을 것이다.청소년들의 무권리 상태와 노동현장에서의 착취를 해결할 계기가 될 것이며, 그들은 스스로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p>
<p>이는 초고령화가 진행중인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병든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미래를 살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맞추어 ‘(부자) 노인을 위한 나라’를 ‘모두를 위한 나라’로 바꿔가야 한다.</p>
<p>&nbsp;</p>
<p>그런데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수백 명의 청소년이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 때문에 물속에 잠겨 있던 지난 4월 28일, 헌법재판소가 청소년들은 계속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판결 하나를 했다. 18세 청소년은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ㆍ신체적 자율성 충분치 않다”며 선거권ㆍ선거운동ㆍ정당가입 제한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냈다.판결이 죽음의 명령인 ‘가만히 있으라’와 똑같지는 않다 해도, 보수적인 기득권층의 생각을 대변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p>
<p>&nbsp;</p>
<p>세계 232개국 중 215개국, OECD 34개국 중 32개국이 18세를 선거권 행사 연령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의 지력이나 판단력이 세계 꼴찌 수준인가? 세월호 참사는 청소년 권리 후진국에서 일어난 일이다.</p>
<p>인권과 정치적 권리는 함께 커간다. 다시 18세, 아니 17세 선거권을 주장한다. 미래의 한국을 위해 이 땅에서 오래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선거권을 주라. 헌재와 여야는 기득권세력과 노인들 뒤에 숨지 말고, 젊은이들 앞에 당당히 서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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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국일보 : 삶과 문화] 2014.05.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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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뉴스레터1호][칼럼] 한국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외국인들의 어제와 오늘(이윤종)</title>
		<link>http://cultural.jinbo.net/?p=23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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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Jun 2014 00:00:40 +0000</pubDate>
		<dc:creator>운영자</dc:creator>
				<category><![CDATA[문화현실분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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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한국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외국인들의 어제와 오늘 &#160; 이윤종 &#160; 한반도는 고대부터 크고 작은 수많은 외세 침탈의 역사를 겪어왔다. 그러나 조선 시대 후기까지 한반도에 있어 “외국”이란 언제나 중국 아니면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이웃나라인 중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차지하는 크기가 워낙 큰 데다, 한반도가 &#8230; <a href="http://cultural.jinbo.net/?p=235">계속 읽기 <span class="meta-nav">&#8594;</span></a>]]></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한국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외국인들의 어제와 오늘</p>
<p>&nbsp;</p>
<p style="text-align: right;">이윤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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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반도는 고대부터 크고 작은 수많은 외세 침탈의 역사를 겪어왔다. 그러나 조선 시대 후기까지 한반도에 있어 “외국”이란 언제나 중국 아니면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이웃나라인 중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차지하는 크기가 워낙 큰 데다, 한반도가 서구의 시각에서 소위 “극동(Far East)”이라 불리는 동아시아의 맨 끝에 위치한 것도 모자라 북, 남미 대륙 혹은 유럽과의 연결 통로인 태평양마저도 러시아부터 동남아 지역까지 이르는 기다란 일본 열도에 가로막혀 있는, 고립된 지리적, 혹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게다가 남북 분단의 상태까지 반백년 이상 지속되면서, 일제 강점기에 한국 독립 운동의 근거지였던 러시아의 연해주와 지금은 중국 연변 지역인 간도와의 접근성마저도 북에 가로막혀 차단되면서, 남한은 더더욱 외국 혹은 외국인과의 교류가 드문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이래 전략적으로 고도성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김영삼 정부의 국가정책적인 “세계화” 추진 이후, 대한민국도 서서히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물결 속에 편입하면서 서울은 이제 제법 다인종, 다문화가 자연스러운 코스모폴리스(cosmopolis)가 되었다.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 글은 6.25 전쟁 이후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급변해온 한국 사회의 문화적, 인종적 인식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중심으로 그 속에서 그려지거나 비쳐지는 외국인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짚어 보고자 한다.</p>
<p>&nbsp;</p>
<p>우선 한국 대중문화가 본격적인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6.25 사변 이후인 1950년대부터라는 전제 하에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도 만화, 영화, 대중음악, 잡지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문화가 존재하고 사랑받았고 이를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영화 전문가로서 필자가 영화 분야에 관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일제 시대의 영화 중 필름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몇 편 없고, 현존하거나 복원한 영화들 속의 외국인도 시대적 특성 상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운규 등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일제 치하 초기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풍토 하에서 일본인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메타 영화라고 할 수 있는1941년 작 &lt;반도의 봄 (이병일)&gt;의 영화 속 영화인 조선 영화 &lt;성춘향&gt;의 일본인 제작자처럼 다른 조선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중립적인 인물로서 표현되기도 했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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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방 전 한반도의 외국인이 주로 일본인일 수 밖 에 없었다면, 해방 후 6.25 전쟁을 전후한 냉전 시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한국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외국인이란 주로 미군 부대 주변의 미국인들과 일본인 관광객이나 비즈니스맨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특히 냉전 시대에 미국 혹은 미국인은 한국이 생각할 수 있는 서구와 서양인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제유적인 존재였다. 이웃나라이긴 하지만 당시 동구권의 중심국들로서 각각 중공이라 불리던 중국이나, 소련이라 불리던 러시아와의 교류가 남한 사회에서 미국이라는 정치, 경제적 초강대국이자 거대 서방 세계 우방국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외국인의 절대 다수 또한 미군이었고 드물게 일본인이 등장하곤 했다. 특히 미군들은 다수의 한국 영화 속에서 “양공주”라 불리던 미군 기지촌 주변의 한국인 직업여성들의 고객 혹은 연인으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들은 가끔은 진정한 사랑에 빠져 그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에서 구원해 “아름다운 나라”인 미국으로 데리고 가는 남성 구세주의 역할도 맡았지만, 대부분 그녀들을 홀대하고 학대하거나 무책임하게 임신시킨 채 홀로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는 매정한 남성들로 그려졌다. &lt;지옥화 (1957, 신상옥)&gt;, &lt;오발탄 (1961, 유현목)&gt;, &lt;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이만희)&gt;, &lt;육체의 고백 (1964, 조긍하)&gt; 등의 한국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들 속에서 미군들은 주로 후자로 묘사되었다.</p>
<p>&nbsp;</p>
<p>미군이나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양가적인 인식, 즉 정치, 경제적 구원자/원조자인 동시에 정신적, 문화적 착취자/수탈자라는 인식은 7, 80년대를 거쳐 90년대까지 계속 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미국이 1980년 광주 사태를 방관했다는 거센 비판과 함께 영화 속에도 반미주의적 흐름이 강하게 드러나, 굳이 미군이 아니더라도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일반 미국인 남성들도 한국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함으로써 정신적인 타격을 주는 민족적 위협을 상징하는 서사적 장치로 자주 동원되었다. &lt;무릎과 무릎 사이 (1984, 이장호)&gt;, &lt;깊고 푸른 밤 (1985, 배창호)&gt;, &lt;여왕벌 (1986, 이원세)&gt;, &lt;LA 용팔이 (1986, 설태호)&gt;, &lt;아메리카 아메리카 (1988, 장길수)&gt;, &lt;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장길수)&gt; 등의 영화들이 그러한 서사 장치를 잘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조금 더 나아가, 스웨덴 입양아인 수잔 브링크의 실화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lt;인간극장&gt;을 통해 소개된 후 영화화된 &lt;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1, 장길수)&gt;에서는 스웨덴 백인 남성들이 미국인을 대신한 서사 장치로서 (외국에서 성장한) 한국 여성에게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주는 외국 남성으로 활용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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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미군이나 백인 남성에 대한 보다 복합적인 시선은 2000년대 들어 등장한다. 김기덕 감독은 &lt;수취인 불명 (2001)&gt;과 &lt;해안선 (2002)&gt;등의 영화에서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서만 미국/미국인과 한국/한국인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미군 병사나 그 한국인 혼혈 후예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각도적인 접근을 꾀했다. 봉준호 감독도 그의 천만 관객 흥행작 &lt;괴물 (2006)&gt;에서 한강에 유독 물질을 방류해 의도치 않게 대형 유전자 변이 괴물을 제조하는 도덕적 결함을 지닌 미군 장교 뿐 아니라 그 괴물에 맞서 싸우는 미군 병사를 이후에 병치시킴으로써 미국과 미국인/미군에 대한 한국인의 복합적인 심리 상태를 표출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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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인/미군들로 대표되던 외국인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함께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보다 다양하게 세분화되기 시작한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 도시와 최근에 한국관광공사 사장까지 역임했던 독일 출신 사업가이자 방송인인 이한우/이참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다양한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귀화 한국인으로서의 정착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특히 이참은1994년 KBS 드라마 &lt;딸 부잣집&gt;에서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외국인 사위로 등장해 한국 드라마 속 외국인 배우의 포문을 열었고 이후로도 SBS의 &lt;천국의 계단 (2003)&gt;, &lt;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2004)&gt; 및 MBC의 &lt;제 5 공화국 (2005)&gt; 등의 드라마에도 꾸준히 출연해 한국에 거주하는 다수의 유럽 혹은 미주 출신 (재연) 배우 지망생들에게 꿈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로 이러한 유럽계 외국인들의 방송 출연 빈도는 매우 높아져서 KBS의 예능 프로인&lt;잘 먹고 잘 사는 법 (2002- )&gt;의 “팔도유랑기”라는 코너에 출연했던 벨기에 출신의 줄리안, 프랑스 출신의 티에리, 한국계 프랑스 입양아 출신인 필립을 비롯해 MBC 드라마 &lt;탐나는 도다 (2009)&gt;에 주연급으로 출연한 프랑스 출신 황찬빈 (피에르 데포르트) 등도 다양한 한국인 시청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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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0년대 이후 다문화 가정의 증가와 함께 시행된 한국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백인에 국한되었던 한국 대중문화 속 외국인의 인종적, 문화적 스펙트럼을 점차 넓히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KBS의 예능 프로그램 &lt;미녀들의 수다&gt;는 유럽과 미주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한국어가 능숙한 미녀들을 게스트로 섭외해 다문화주의에 대한 다양한 토크를 유도하며 유익한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굳히기도 했다. 물론 포맷의 식상함은 &lt;미녀들의 수다&gt;를 장수 프로그램으로 안착시키지는 못 했지만, 인기 프로그램은 아니더라도 다문화 가정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으로 KBS에서 1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방송하는 &lt;러브 인 아시아&gt; 등의 프로그램과 함께 한국 내 비백인 외국인들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는 불식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와 행복을 찾는다는 소재로 성공한 SBS 드라마 &lt;황금신부 (2007-8)&gt; 이후로 공중파 일일 드라마들은 점차 자연스럽게 한국에 거주하는 동남 아시아계 신부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이 혹은 이들의 자손들이 한국의 인종주의에 의해 고통 받는 불행한 일상을 영화 속에서는 보다 현실적으로 그리기도 하는데, &lt;의형제 (2009, 장훈)&gt;, &lt;완득이 (2011, 이한)&gt; 등의 5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 특히 그러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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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10년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 영화나 TV 드라마뿐 아니라 가요계에서도 외국인들은 이제 심심치 않게 보인다. KBS의 최장수 프로그램 &lt;전국노래자랑&gt;을 통해 스타가 된 방글라데시 출신 가수 방대한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해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연예인이 되었다. 특히 한류를 의식해 중국과 동남아 시장을 겨냥한 한국 아이돌 그룹 속에는 닉쿤 (2PM), 빅토리아 (F(X)), 페이 (미쓰에이) 등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아시아계 스타들이 포진해 있다. 물론 닉쿤은 음주 운전 사고로 물의를 빚은 후 예전에 비해 한국 내에서의 인기가 상당히 주춤하고, 한 때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슈퍼주니어의 한경도 그룹에서 탈퇴하는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물론 이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외국인 가수의 시초는 아니다. 1999년 데뷔한 남성 트리오 Y2K의 일본인 형제도 한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었다. 또한 2012년 슈퍼스타 K를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락 그룹 버스커 버스커의 드러머는 아시아계가 아닌 백인 미국인인 브래드이기도 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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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말하자면 한국의 대중문화 속 외국인들은 이제 미국과 일본, 중국이라는 과거의 제한적이었던 국적의 고리를 풀고 다양한 나라 출신들로 확대되었다. MBC 군대 체험 예능 프로그램인 &lt;진짜 사나이&gt;를 통해 스타 개그맨으로 자리를 굳힌 샘 헤밍턴이 호주 출신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다. 2014년 현재 다양한 분야의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백인 뿐 만 아니라 아시아계나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들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의 비백인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일 민족주의라는 환상 하에서 오랫동안 타인종이나 외국인에 대한 공포와 경멸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의 정치, 경제적 지원 하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백인 미국인 이외의 외국인에 대해 양가적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우호적인 감정을 품을 틈도 없이 한국인들이 바삐 살아와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보다 열린 시선과 자세로 한국에 방문하거나 거주하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외국인들을 진정으로 포용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외국에 나가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감내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먼저 외국인에 대한 그러한 시선을 폐기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고 차별의 차이를 만드는 시선부터 먼저 거두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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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월간 &lt;미술&gt; 5월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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